흔히 문학과 연극 그리고 영화에서는 작품을 창작할 때 캐릭터 중심인가 아니면 플롯 중심인가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결정된다. 여기서 캐릭터 중심은 주로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작품으로 나타나고, 플롯 중심은 작품 전체를 끌어가는 구조와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캐릭터가 중심인 작품에서는 상상력에 바탕을 둔 서사가, 그리고 플롯이 중심인 작품에서는 현실에 바탕을 둔 서사가 주요 동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캐릭터는 플롯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성향을 띤다. 말하자면 캐릭터는 동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재현하고 대변한다. 그리고 당대적인 문제의식과 시대정신을 상징하고 암시한다. 그리고 감각적 현실이 간과하고 있는 행간 읽기를, 억압적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이면 읽기를 요구한다. 이 독서 과정에서는 심지어 무의식의 읽기마저도 요구된다.

캐릭터는 이런 일련의 서사예술은 물론이고, 상품의 전략 속에도, 광고의 욕망 속에도, 그리고 나아가서는 스타쉽의 열광 속에도 있다. 물신주의가 팽배한 자본주의 시대에 있어서 캐릭터는 소비자의 욕망을 파고드는 심리적인 기제가 되고 있고, 따라서 캐릭터에게는 문화의 얼굴을 한 자본의 욕망을 퍼트리는 첨병의 역할이 주어진다. 이처럼 하나의 캐릭터에는 당대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학적인 여러 이질적인 맥락들이 교차한다. 미술 역시 예외는 아닌데, 미술에서의 캐릭터는 특히 모더니즘 이후 서사논의와 욕망이론으로부터 그 당위성을 얻고 있다.

김준의 문신맨, 마초맨, 사우나맨
김준의 작업에 나타난 캐릭터는 가부장적 체제를 살아가는 남성들의 정체성을 반영한 것이다. 이를테면 온몸을 문신으로 치장한 문신맨이 일상에 만연한 조폭문화를, 장미클럽을 들락거리는 마초맨이 남성우월주의 문화를 풍자한다. 그리고 사우나맨이 남성의 이러한 현실을 이어받고 있다. 이 캐릭터들은 자기 외부로부터 강요된 여러 억압의 계기들을 내재화하고, 자칫 경쟁사회에서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거세불안에 시달린다. 특히 사우나실은 시간과 돈 그리고 술에 쫓겨 진정한 삶을 저당 잡힌 남성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토막 잠의 와중에서도 그들의 손에 어김없이 들려져 있는 핸드폰에서는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와 함께, 그 억압을 감내하는 일종의 강박증이 느껴진다. 핸드폰의 호출을 받은 몸이 일상 속에서 기계적인 삶을 살아내는 동안에도 머리는 사우나 실에 저 홀로 남아 미처 꾸지 못한 꿈을 꾼다. 이 캐릭터들은 남성들의 사회적 현실을 냄새 맡는 작가의 후각이 거의 본능적인 수준으로까지 발달해 있음을 말해준다.

이불의 몬스터와 사이보그
김준의 캐릭터가 가부장적 체제하의 남성들의 현실을 반영한다면, 이불의 캐릭터는 여성들의 현실인식을 보여준다. 예컨대 몬스터 핑크 또는 성기 괴물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칭되는 몬스터는 관음증과 노출증으로 나타난 여성의 몸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몬스터는 핑크색과 부드러운 질감으로 인해 우호적인 섹스어필을 요구하는가 하면, 괴물을 닮은 외관은 남성의 관음증을 공격하고 위협하는 거세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팜므파탈의 한 원형인 셈이다. 몬스터는 그것이 상기시키는 공공연한 성적 암시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남성과 여성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성적인 성 정체성으로써 성적 편견에 도전한다. 여성을 향한 가부장적인 욕망과 여성 자신의 방어 기제가 결합된 몬스터의 그로테스크한 몸과 중성적인 성 정체성은 또 다른 캐릭터인 사이보그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여기서 몬스터가 의도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성적 어필을 거부하는 것에 반해, 사이보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적 특질을 표출시킨다. 하지만 사이보그 역시 결국에는 잔혹한 기계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아니 오히려 남성의 성적 환상을 거세하기에 더 적극적이다.
조습의 명랑맨
작가 자신이 직접 출연하고 연출한 일종의 상황사진에 바탕을 둔 조습의 작업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명랑맨은 광신적인 종교와 억압적인 군사문화 그리고 가부장적 체제 등 사회에 만연한 권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현대인의 상식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을 비판한다는 일면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한편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를 연상시킨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인상은 풍자 곧 현실의 희화화를 통해서 현실을 비판한다는 전략에 연유한 것이지만,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 자신마저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이르면 비판과 코미디의 경계는 불투명해진다. 이를테면 일종의 가상 종교인 명랑교를 테마로 한 일련의 작업에서 명랑맨으로 분장한 작가는 각각 명랑교의 교주로, 전도사로, 그리고 신자로서 등장한다. 이 사진들에서 작가는 특정 종교의 전도사 이상의 열성분자를, 광신자를 연상시킨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작가의 과장된 몸짓만이 아니다. 피켓과 메가폰은 박해를 자처한 전도사의 선량한 의지를 발악 속에 희석시킨다. 이제 종교는 도심 속에서 무심하게 지나치는 행인들을 향해 코피를 쏟을 만큼 열성적으로 바락바락 소리를 내지르는 발악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된 것일까. 종교와 발악, 전도사와 광신자를 나누는 경계가 불투명해진다. 게다가 명랑교라니. 웃음은 현실을 희화화하는 통렬함에서보다는 과장된 상황의 설정을 통해 현대판 키치로 전락한 종교와 그 신념을 목격하는 것에서 온다.

조범진(팀)의 아치와 씨팍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을 희화화하는 것으로 치자면, 조범진의 아치와 씨팍은 조습의 명랑맨에 뒤지지 않는다. 나아가 현실의 과장과 극화를 위해 일종의 가상현실을 끌어들이기조차 한다. 플래시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은 인간의 똥만이 유일한 에너지원인 똥 도시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변 능력에 의해서 사람의 가치기준이 결정되는, 그리고 모든 시민은 성실한 배변의 의무를 갖는 똥 도시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항문에 칩이 내장돼 있어서 똥을 쌀 때마다 그 횟수와 성분이 일일이 당국에 의해 체크된다. 똥 도시의 주민들은 똥을 쌀 때마다 중독성이 강한 하드 하나씩을 부상으로 수여받고, 갱단이 출몰해 호시탐탐 하드를 강탈하려고 노린다. 조잡한 잔머리를 잘 굴리는 아치, 행동이 늘 앞서 일단 때리고 보는 씨팍,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는 똥 도시의 트러블 메이커 이쁜이, 그리고 똥 감시국 특수 경찰 게코가 등장해서 서로 쫓고 쫓기는 공방전을 펼쳐 보인다. 잔혹과 코믹, 불경스러움과 냉소적 유머, 통렬한 풍자와 욕설이 거침없이 난무하는 거의 배설이라고 해야 할 조범진의 애니메이션은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설정이 영화 델리카트슨을 떠올리게 한다. 똥만이 유일한 에너지원인 오물로 더럽혀진 도시에, 고기를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고 사람을 도살하는 피비린내 나는 동물성의 도시가 겹쳐진다.

이동기의 아토마우스
이동기의 캐릭터 아토마우스는 국적불명의, 혼성잡종의 하이브리드 노매디즘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일본의 만화 주인공 아톰과 미국의 만화 주인공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혼성 캐릭터 아토마우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동기의 작업은 그 자체 허구에 바탕을 둔 혼성 주체를 다룬 것이다. 만화 자체가 허구이고, 그 주인공 역시 허구이며, 더욱이 이로부터 작가가 추출해낸 혼성 주체 역시 허구임을 생각하면, 그의 작업은 철저히 허구에 기초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혼성 잡종 캐릭터 아토마우스는 허구인 것만큼이나 그 자체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대중문화와 언더그라운드 문화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리고 가상 이미지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에 대해서 친근함을 넘어 실재감조차 갖는 세대에게 과연 그 이미지가 허구로 비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오히려 실제보다는 기호를 모본(模本)으로 삼는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아가 가상현실의 영상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허구는 그 자체 또 다른 한 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홍지연의 미술사 인형
노매디즘에 바탕을 둔 이런 혼성잡종 캐릭터는 홍지연의 미술사 인형 연작에서도 엿볼 수 있다. 홍지연의 노매드적 실천 논리는 자신을 ‘기존의 이미지들을 정체불명의 이미지들로 전이시키는 바이러스’로 정의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말하자면 미술사를 그 자체 신성불가침의 한 전범으로서보다는, 미술사와 개인이 만나는 자기화의 과정을 통해서 탈맥락화 재맥락화하는 일종의 소재적 차원으로서 본다. 이처럼 작가는 정상성의 미술사 속에 침투하여 비정상의 암세포를 퍼트린다. 미술사에 대한 그의 훼손은 미술사가 정체불명의 것으로 해체되는 지점을 향한다. 기왕의 미술사에 등장하는 인물 초상을 무차별적으로 차용 조작 상품화한 소위 미술사 인형 연작에서 모든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그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이처럼 미술사를 무차별적으로 차용한 그의 작업은 상품화의 수순을 밟음으로써 자본주의의 논리틀을 지나 어설픈 상품으로 재생산된다. 미술사가 내재한 전통적인 아우라가 정체불명의 상품으로 변질된 것이다.
권기수의 동구리
권기수의 동구리는 일종의 팬시적인 감수성으로부터 태어난 캐릭터이다. 그는 예컨대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같은 전통 회화에 기생하는가 하면, 시력검사 차트 같은 동시대적인 물신들과 동거하기도 한다. 그 정체가 모호한 이미지와 결합하는가 하면, 동영상 화면에서는 기존의 이미지의 일부로서 편집되기도 한다. 모든 맥락을 해체하고, 공적인 이미지를 사적으로 전유한다. 이처럼 동구리는 그 자체 비규정자로서 이미지의 생산보다는 소비에 그 맥락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이미지가 존재하던 방식과는 다르다. 팬시상품과도 같은 가벼움을 미덕으로 하는 동구리는 존재의 무게가 가벼운 만큼이나 고정된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롭다. 그의 생존원리는 패러디와 기생적 삶이며,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기 위해 모든 실제를 변질시킨다. 이로써 권기수의 동구리는 어떠한 근원도 갖지 않는 순수한 허구가 낳은 자식이란 점에서 가상현실 속의 캐릭터인 아바타와도 통한다.

김학민의 가상현실 속의 캐릭터
코스프레 곧 분장놀이를 소재로 한 김학민의 작업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각종 캐릭터들을 보여준다. 캐릭터들의 의상을 입고 그 포즈를 그대로 흉내낸 코스튬 플레이어(모델)를 등신대 크기로 그려, 이를 환상적으로 연출된 공간 속에 설치한 것이다. 여기서 분장놀이는 주어진 상황과 캐릭터의 성격에 맞춰 옷을 갈아입는 놀이로서,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연기하는 연극놀이와도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체의 인식과 연루돼 있다는 점에서 사이코드라마에서의 역할놀이(역할극)와도 통한다. 여기서 분장놀이와 연극놀이 그리고 역할놀이를 하는 주체는 현실 속의 주체와 함께 가상현실 속의 주체라는 또 다른 주체를 갖는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진정한 주체는 현실이 아닌 비현실 속의 주체인 것이며, 그 비현실적 주체는 가상적 주체, 이중적 주체, 그리고 다중적 주체의 형태로 자기의 씨앗을 퍼트린다. 이처럼 김학민의 분장놀이는 주체가 어떤 고정된 실체일 수 없음을 말해준다.

양대원의 동그랑 맨
그 자체 비결정적인 이중적 다중적 주체의 이러한 인식은 양대원의 동그랑 맨에게서도 확인된다. 양대원의 작업에서 그 자체 고정되고 온전한 인체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의 작업에서 인체는 마치 세포처럼 크고 작은 원형들의 집적으로 나타난다. 특유의 가변성과 자기 변태적 성질에 바탕을 둔 이 원형들은 인체에만 한정돼 있지 않으며, 대신 사군자와 뭉게구름, 그리고 심지어는 호흡과 연기로도 나타난다. 마치 박테리아와도 같이 끊임없이 자기를 부풀리고 변형시키는 그것은 자아와 타자, 주체와 객체, 사람과 자연, 형상과 관념과의 경계를 넘나든다. 일종의 흐름 속에 있는 존재, 흐르는 존재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것은 가변적이고 돌발적이며 그리고 우연적인 존재와 동격이다. 결국 그것은 단지 어떤 형상을 떠올리게 할 뿐, 사실은 어떠한 고정된 실체가 없거나 혹은 반대로 모든 실체를 하나로 거머쥐고 있는 익명적 존재에 가깝다. 이처럼 양대원의 동그랑 맨은 고정된 주체를 자기 변형적이고 자기 변태적인 우연적 주체로 해체시키고 변질시킨다.

이부록의 워바타
그런가하면 이부록의 작업에서는 아바타의 한 변형인 워바타를 만날 수 있다. 문자그림인 픽토그램의 외관을 한 워바타는 전쟁과, 가상현실 속의 캐릭터인 아바타의 합성어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일종의 전쟁 캐릭터인 워바타는 동시대가 사실상 전시(戰時)체제 하에 있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 것이다. 그러니까 은폐되거나 공공연한 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 억압과 폭력의 계기들을 일종의 전쟁상황으로 극화한 것이다. 나아가 전쟁은 스펙터클 소사이어티를 위한 매뉴얼, 정치와 사회는 물론 일상과 심지어는 오락마저 지배하는 매뉴얼이 되었다. 워바타는 이처럼 일상 속에 유포된 잠정적인 전쟁의 계기들을 채집하고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전시체제의 풍경으로 변질된 일상을 말해준다.

이외에도 박활민의 홀맨은 구멍을 통해서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관음증적 욕망을 대변해주는 캐릭터다. 마치 모니터처럼 생긴 홀맨은 일상 속에서 접하는 모든 종류의 모니터가 보통사람들의 성적 욕망이 투사된 현대판 자궁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개인을 끊임없이 모니터 앞으로 호출하는, 모니터 주변을 서성거리게 하는 이 욕망의 상자가 발하는 파란 불빛은 모니터가 놓여진 방을 파란 물, 양수로 가득 채운다. 이로써 현대인은 모니터를 통해서 자기가 태어난 근원, 구멍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본다.

그리고 강영민의 서늘한 미인은 말하자면 모든 진지한 체하는 사태를 단지 어깨를 위로 가볍게 움찔 들어올렸다가 내리는 제스처로 받아넘기는 설렁한 농담을, 그 세태의 풍속도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또한 이소미의 스마일 맨은 강요된 웃음의 가면 뒤에 숨겨진 자기를 대변해준다. 가면은 자기를 은폐시키는 동시에 자기를 타자 속에 던져 넣는 익명성의 계기로서의 양가성을 실현하는 기호가 된다. 스스로 타자가 된다는 것, 자신이 이미 타자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