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덕갤러리 기획전-매스와 공간 사이 2006.5.11 - 6.2
조각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자유를 그 본질로 하는 작업에 대해서 그 물음은 자칫 환원주의의 우를 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의미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동물이기에 우문인 줄 알면서도, 이를 묻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여하튼 조각으로 하여금 조각이게끔 해주는 특정성을 들자면, 대략 양감(속이 꽉 찬 덩어리)과 물성(재료의 물질적인 성질), 그리고 관계(공간역학)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르적 특수성과 매체적 특수성에 의해 견인돼 온 모더니즘 조각 개념이 근대 이후에는 그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소위 탈조각과 비물질조각이란 새로운 개념이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해체하고 있으며, 또한 조각의 이름으로 아우를 수 있는 범주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다루고 있다. 즉 여전히 조각의 특정성을 간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매스와 공간 사이’란 주제 안에서 이를 살펴보자면, 매스는 정통적인 조각 개념의 특정성을 상기시키며, 공간은 조각 개념의 해체와 확장을 나타내며, 사이는 이를 매개시켜주는 방법론을 암시한다. 그리고 일종의 망 구조로 나타난 선조에서 그 방법론을 찾고 있다. 공간을 투과하면서도 안과 밖이 서로 열려 있는 망 구조야말로 최소한의 질료적인 흔적을 내포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외부로의 확장을 꾀하는 작업일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 작가들 중에서 김세일, 정광호, 홍승남, 김석, 김시내, 이상봉, 오원영 등의 작업이 비교적 망 구조의 선조에 충실한 편이며, 그 외 원인종, 오상욱, 김황록 등의 작업은 주제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예로 보인다.
김세일은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가녀린 철사를 뜨개질하듯 엮어나가는 방법으로써 마치 비정형의 고치와도 같은,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형상을 만들어낸다. 놋쇠 숟가락이나 부처 소상 등의 사물의 한 표면을 기점으로 철사를 꼬아나가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그렇게 형성되고 부풀려진 망이 외부로부터 사물을 감싸 안는 역설적인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를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그대로 절이 되고, 물고기를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바다가 되고, 짐승을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숲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상은 임의적인 것일 뿐, 실상 망 구조 자체는 무한정 부풀려질 수 있는 것이다(결정되지 않은 것). 이는 모든 결정적인 형상, 결정적인 읽기를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열려진 체계에 맞닿아 있다. 이로써 작가는 진정한 존재와 그 실체를 묻는가 하면, 생성과 소멸, 실상(실제)과 허상(허구)과의 미묘한 경계를 다룬다. 그 이면에는 있음과 없음이 결국 마음의 현상(상대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에서의 공(空) 개념에 대한 공감이 놓여 있다.
정광호의 작업(The Pot 51262)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을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서 정통적인 정물의 개념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원래 속이 꽉 찬 사물을 비움으로써 이에 대한 위반을 꾀한다. 가녀린 동선(銅線)을 엮어 만든 구조물에서의 동선은 항아리의 표면에 난 크랙을 재현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작가의 작업은 속이 빈, 표면적으로만 존재하는 사물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 이면에는 전통적인 공(空) 개념에 대한 공감이 놓여 있으며, 이로부터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한 상호 포괄적이고 양가적인 개념이 엿보인다.
홍승남의 작업(存)은 적어도 외관상 보기엔 속이 꽉 찬 덩어리로서, 미니멀적이고 기하학적인 형상화에 바탕을 둔 정통적인 모더니즘 조각 개념에 충실한 편이다. 이 전시에서는 전작에서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 재료와 구조와 방법론에 상당한 변화를 주고 있다(철선의 망 구조로 나타난 판을 용접으로 붙인). 군더더기가 없는 정형화된 형태로부터 인위적인 질서의식의 구축과 함께 일종의 금욕주의마저 느껴진다.
홍승남의 작업이 정형화된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면, 김석의 작업은 상대적으로 비정형의 형태에 가깝다. 그의 철선 구조물이 얼핏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양 보이지만, 사실은 손 가는 대로 감아놓은 실타래를 보는 듯하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이 망 구조물 속에는 각종 색채로 채색된 사람의 두상 복제물들이 매달려 있다. 그리고 그 두상들에는 전선이 연결돼 있어서 불이 들어온다. 아마도 두상들의 다양한 색채가 개성을 상징하고, 그리고 불을 밝힌 두상이 정신을 암시하지 않을까 싶다. 두상은 작가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요 소재이며, 이를 다룬 일련의 작업들은 자기 반성적인 사유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김시내의 작업(시간의 흐름 - Light, Water)은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선들을 용접으로 이어 붙인 일종의 판 구조물이다. 이는 아몬드형의 빈 공간 주변을 선들이 감싸고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의 아몬드 형상은 사람의 눈을 암시하며, 또한 선들을 용접할 때 생긴 마디들은 시간의 계기들을 암시한다. 이로써 작가는 눈을 매개로 한 자기 반성적인 사유를 꾀하는 한편, 순환론적인 시간 개념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봉의 작업은 외관상으론 기둥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선조로 나타난 그의 작업은 기둥으로부터 매스를 들어내고, 대신에 이를 최소한의 구조(골격)로만 축약 표현한 것 같다. 선조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물과 대상의 기하학적인 환원이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오원영은 투명한 아크릴 박스의 모서리를 잇대어 세우는 방법으로써 연이어진 기둥 형상을 만들고는, 아크릴 판의 안쪽에다가 마치 종이를 오려 붙인 듯 금속 소재의 판을 잘라서 부착시킨다. 박스 형태로 나타난 기하학적인 형상과 아라베스크 문양을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형상이 어우러져 있다. 이상봉과 오원영의 작업에 나타난 기둥 형상은 그 이면에 오벨리스크와 토템폴에 투사된 신화의 흔적(땅과 하늘,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을 간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원인종은 용접으로 철선들을 연이어 붙여나가는 방법으로써 평면의 판들을 만든다. 그리고 이 판들을 어떤 형태로 고정시키는 대신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 사이를 띄워 천장에다가 매단다. 외관상 이는 그 사이가 벌어진 박스 형태로서 나타난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망 구조 대신에, 판과 판 사이의 틈을 통해서 공간에로의 확장을 꾀하는 식의, 상대적으로 절제된 방식과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 틈이 일종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아마도 이는 작가의 작업이 막힌 구조와 열린 구조를 동시에 지니는 데서 오는 상호작용성 때문일 것이다.
오상욱의 작업(스쿠버다이버)은 각종 폐공산품을 조합해서 만든 인체를 보여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네온 튜브를 도입하여, 이로부터 발해지는 은근한 빛과 폐품으로 구조화된 인체를 대비시킨다. 여기서의 신체는 정크아트에 맞닿아 있으며, 이는 폐공산품 쓰레기로부터 동시대를 관통하는 리얼리티를 본 신사실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네온 튜브는 아마도 폐품 쓰레기로 나타난 현대인의 꺼져가는 혼을 되살려내려는 작가의 의지 혹은 염원이 일종의 불씨의 형태로서 현상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론 이러한 문명 비판적인 메시지의 이면에는 사이보그적인 신인류에 대한 작가의 비전이 반영돼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황록은 나뭇잎을 조형화하고, 이를 몇 가닥의 가녀린 선과 대비시킨다. 나뭇잎들 사이론 공기가 느껴지고, 이를 연결하고 있는 선들로부터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선들은 말하자면 자연이란 악기의 현인 것이며, 이로부터 감지되는 소리는 자연이 내는 소리 즉 선율인 것이다. 나뭇잎은 금속 소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 맑고 깊다. 전통적인 미적 관념인 기운생동 중 시(詩)의 그것에 맞닿아 있는 운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이 전시에서 작가들은 선조의 다양한 형태를 예시해준다. 망 구조와 틈 구조로써 공간을 조각의 안쪽으로 끌어안는다. 이는 이따금 실재의 구조적인 형태로서보다는 암시적인 형태로 현상하기도 한다. 가벼운 조각과 안과 밖이 통하는 조각을 아우르며, 조각의 실질적이고도 의미론적인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