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목록과 부피, 그 생애의 무게로 눌린 자국,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내 몸에 스민 기억과 상처에 관한 진술은 한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 삶이 결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면 나는 곧 수많은 타자들과의 생애를 함께 반분하고 있는 셈이다. 예술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인간의 삶 전체를 건드리며 퍼진다. 그러니까 작업이란 개인적이지만 그 개인성이 보편성과 연결되어 마냥 진동하는 것이다.
황혜선은 자기 삶을 비쳐주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문득 그 안에 고인 초상의 한 결을 더듬어 본다. 마치 거울 앞에서 가볍게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을 건져 올리듯이 혹은 주름잡힌 피부와 소매부분이 닳아서 나달거리는 것을 들여다보면서 어느 한 순간으로 미끄러지듯이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무거워지는 기억, 세상에 대한 다소간의 환멸, 모든 견고한 믿음에 대한 불안, 지금까지의 생애가 드리운 허물,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을 다독거려온 시간들, 잠깐씩 명멸하는 밝고 어두운 풍경 등을 하나의 결정적인 사물과 이미지(문자)안으로 불러들여 응결시켰다. 말을 지우고 침묵으로 고요한 이 오브제들은 단색의 밝고 투명하며 반짝이는 속성을 지닌 지극히 일상적인 물질들인데 그것들은 매끈하게 마무리된 정제와 미니멀 적인 가공아래 적조한 자태를 지니고 침묵과 부재, 응시와 관조 사이에 섬처럼 놓여있다. 그 위로 정밀함과 모종의 긴장감이 서리처럼 내려앉아있다. 사실 예술의 시금석(표준)은 정확성이다. 이 사물들은 작가 개인의 인성과 감성, 영민함과 생의 철학 같은 것들의 결정으로 빛난다. 작가는 그 사물들을 통해 예술의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지도를 만든다. 사물을 빌어 감정과 언어를 은밀하게 드러내는가 하면 상상하게 하고 추리하게 한다. 그 사물들은 은유의 메타포에 젖어있다. 모종의 순간, 감정과 느낌, 상념의 한 결정들이 얼어 부동의 결정으로 나앉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의미의 과잉을 덜어내고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소통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물들이다.
이번 근작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융기한 감정의 문제들이다. 우리는 매 순간 감정과 생각의 실타래를 풀면서 살아가는데 작가는 그것들이 자기 내부에 모이고 고여 어떤 형체로 부감될 때 그때 비로소 외화 시킨다. 그 작품들은 작가의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다 나온 형상들이다. 마음 안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의 몸을 얻어 나온 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 감정이 묻어있는 이미지들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 자신이 이 세상에 보내는 주파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다. 오늘날 미술이 개인이 세계에 반응하는 현재진행형의 심리적 계기가 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심리적 계기를 드라마 없이 정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 작가는 조르지오 모란디(Giorgio Morani)의 정물그림에 대해 말했다. 소박하고 단조로운 구도에 신비스러우면서도 관조적인 정물(병과 항아리)들이 직립해있는 무척이나 심플한 그림을 그린 모란디의 그림을 더없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 같은 작업을 하고 싶다고. 그래서인지 그녀는 작품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보는 사람에게 속삭임처럼 다가가는 것을 원한다.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가진 작품의 힘, 말하지 않는 힘을 표현하고자 한다. 침묵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작품 말이다.
이번 작품들은 반지, 양동이, 거울, 크리스탈, 유리 컵,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실루엣과 같은 예민하며 단순한 선과 작은 문자들이 어우러져 만든 풍경이다. 각각의 사물들은 전시 공간에 적당한 거리를 갖고 떨어져있다. 그래서 그 사물 하나하나를 징검다리 삼아 작가의 감정과 의식의 내부로 미끄러져 간다.
‘약속’이란 제목을 단 커다란 반지는 전시장 바닥에 놓여있다. 서약과 맹세, 믿음의 상징인 반지가 쉽게 들 수도, 손가락에 낄 수도 없게 너무 크고 무겁게 제작되었다. 이 대형의 반지는 약속의 무거움을 뜻하며 각인된 약속의 여러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보게 한다. 불멸할 것 같은 약속들은 시간과 세월의 흐름 속에 쉽게 망각되고 퇴색한다. 마음속에 영원토록 무겁게 각인될 수 있는 그런 반지는 없을까?
모래를 가득 채운 양동이 역시 그 자리에 부동의 존재로 놓여있다. ‘너무나 믿기 때문에 채울 수도 덜어낼 수 도 없는’이란 시적 제목을 단 이 사물은 중요함과 사소함을 떠나 모든 믿음들의 더없는 소중함과 그 무게를 나타낸다.
지극히 섬세한 마음과 감정을 다룬 작업들은 특히 ‘흘리지 못한 눈물’이란 작업에 잘 드러나 있다. 크기가 다른 크리스탈들이 화면에 촘촘히 부착되어 있다. 그 크리스탈에는 각각 ‘그래’, ‘괜찮아’란 문구가 매우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삶을 견디는 주문 같은 문장은 더없이 화려하고 투명한 크리스탈의 저 안쪽에 은밀하고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작가의 눈물처럼 혹은 마음의 결정들처럼 매달려있다. 자신의 감정들이 보석처럼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자 일상에 지치고 힘겨운 자신을 다독거리는 반복적인 중얼거림, 자기 최면 또는 부적이나 주술, 치유에 해당하는 것 같다. 행복과 불행 그 사이 어디에선가 그저 자신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일이 삶은 아닐까?
‘상처’라는 작업은 타인의 피부에 자리한 상처를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상처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업으로는 커다란 유리의 한 곳에 아주 작은 구멍을 내고 그 들어간 부위에 씨앗 같은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것이 있다. 얼핏 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상처, 타인의 상처는 무엇일까? 유리 표지에 묶인 수많은 사진들은 누군가의 피부 한 부위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자세히 보면 조그마한 상처들이 슬쩍 드러난다. 이 사소한 상처들은 그 어떤 사건, 시간, 기억을 부감시킨다. 누군가의 몸에 난 상처는 한 개인에 대해 침묵으로 전해주는 너무 많은 말들이다. 여기에는 또한 관음증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 작가는 누군가의 몸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 상처를 헤아려본다. 우리 몸의 피부에 난 작은 자국은 결국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누군가와 함께 했었던 몸, 고통과 아픔을 치러냈던 몸, 지금은 희미해지고 다시 새살이 돋고 아물었지만 자세히 보면 여전히 어떤 차이를 지닌 흔적들은 불현듯 그 당시로 줄달음질치게 한다. 그러니까 피부에 난 상처를 쓰다듬거나 다시 본다는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피부는 우리와 세계 사이의 경계선이다. 시간이 내려앉는 것이자 타인의 시선이 멈추는 곳이다. 그리고 피부는 늘 우리와 함께 있다. 따라서 피부는 모든 기억을 저장하고 있으며 수많은 시간과 상처를 지니고 있다. 피부는 말을 못하지만 상처를 통해 자신이 겪어낸 모든 것을 발설한다.
기억과 관련된 또 다른 작업은 바로 ‘잊고 싶은 기억’이란 것이다. 속치마 속단에 실루엣의 이미지를 새겨 넣었는데 그 장면은 오로지 한 개인에게만 의미 있는 장면이다. 일상적인 기물과 풍경이 끊어질듯, 이어지면서 다소 애매하게 수놓아져 있는 이 그림은 감추어진 기억, 그러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에 대한 심리적 진술 같다.
자화상에 해당하는 작업들 중의 하나인 ‘두려운 낯설음’은 거울에 실크스크린으로 자신의 옆모습을 실루엣으로 올려놓았다. 거울은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지만 정작 그 거울 속에는 자신을 외면하는 자신의 모습, 자신의 측면만이 존재한다. 나를 외면한 내가 있는 거울이다.
자신에 대한 관조적 작업의 또 다른 경우는 커다란 유리판에 에칭 선으로 작가 자신의 하반신을 그려 넣은 것이 있다. 치마를 입은 채 직립하고 있는 자신의 하반신인데 여기서 구두는 바닥으로부터 약 10cm 정도 떠있는 형국이다. 현실에서 발이 떨어져 있는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늘상 자신에게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고, 현실감이 없다고들 한다. 해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마, 현실감이 없나봐” 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인정해본다.
자신이 현실감이 없는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미지화 한 이 작품은 투명한 유리 플레이트에 그려진 저부조의 회화/부조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조각의 단위인 음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그림이면서 가장 얇고 낮은 조각이기도 하다. 회화와 조각 그 사이,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사실 이 작가의 주된 경향이다. 이미지는 공간, 화면의 피부에 어렴풋하게 환생해서 보는 이들의 눈을 조심스레 유인한다. 이처럼 황혜선의 작업에는 공통적으로 아련하고 조심스레 드러나는 이미지들, 명확함과 거대한 스케일이 아닌 작고 흐릿하고 적조한 것들, 손상되기 쉬운 재료들, 투명하고 가볍고 반짝이며 침묵과 적조함으로 절여진 것들이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고 이미지이면서 문장이고 보는 것이자 동시에 의식하는 것, 생각이자 물질이며 매우 사적이면서 보편적이다.
유일한 영상작업은 ‘바람과 같은 무게’란 제목을 달았다. 작가의 모든 제목은 시적이며 문학적 감수성으로 충만하다. 나는 그녀의 독서편력을 유추해본다. 작은 모니터에는 탁자 위, 모서리 근방에 놓인 물이 담긴 유리컵만을 전재한다. 관자로 하여금 그 장면만을 오랫동안 응시하게 한다. 찻잔 속의 물은 약간씩 출렁이다가 이내 잔잔해지고 곧이어 다시 출렁이기를 반복한다. 흔들려봤자 컵 안의 물이란 얘기다. 나로서는 이 작업에서 그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놀라운 견인력과 응시의 차분함, 적멸의 상황성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본다. 불교에서 애기하는 아름다움이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생각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움직이지 않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스크리트로 그것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라고 부른다. 감정이나 외부의 조건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단지 ‘그것을 할 뿐’이다.
황혜선 역시 단지 살아갈 뿐이고 그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어낸 모든 것들을 이미지화, 물질화 할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이 세상의 가치와 믿음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 등을 대면하면서 이를 작업이란 수행으로 치러낸다.
어쩌면 행복이란 단순히 고통의 부재를 의미할 수 도 있다. 고통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일생이 고통을 피하는 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하려 노력하지만 순간 우리들이 지닌 궁핍한 언어는 곧 메말라 버린다. 미술 역시 궁핍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궁핍함과 허약함을 껴안고 그것으로 자기 생의 고통을 피하고 조그마한 행복의 편린이나마 소중하게 감싸 안으려는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이 작가의 작업이다. 새삼 불교적 사유의 한 자락을 적막과 투명, 침묵 아래서 보고 있다.
박영택
#2773
황혜선 - 세상에 보내는 주파수
박영택
2006. 04. 30.
박영택
서울 출생
인명사전 바로가기 : www.daljin.com/author/688
미술평론가 박영택(b.1963)은 [얼굴이 말하다, 마음산책(2010)], [예술가의 작업실(2012)]을 저술하였고 아시아프 총감독(2010)을 역임하였으며,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