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하나의 세계, 왕국이다. 소통의 체계이고 인간 사유의 저장고인 책은 말(언어)과 글(문자)들이 바글거리는 기이한 공간이다. 그러니까 책의 행간에는 사상과 의식의 흐름들이 물길을 이루고 다양한 감정과 욕망들이 풀처럼 자라있다. 상상력과 몽상은 그 옆 어디에선가 뱀처럼 기어 다닌다. 더러 섬찟한 문구들은 절벽같이 직립해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사유와 욕망에 얹혀 기생하는 일이다. 생을 연장하고 또 다른 시간과 공간 속으로 유영하는 일이다. 그런가하면 책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몸과 정신에 숙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책은 무수한 오독과 억측을 만들어내면서 미처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길을 만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책을 읽은 무수한 독자들만이 있어 책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 같다. 책은 고체라기보다 말랑거리며 수시로 몸을 바꾸고 늪 같기도 하고 유동하는 수면이나 기체 같다. 혹은 바닥없는 텅 빈 그릇 같기도 하고 누군가 살고 있는 집인 것도 같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책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존재해서는 생은 없듯이 말이다. 삶이란 나와는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사고와 감각, 몸이 다른 이들과 추억과 기억, 꿈과 희망을 공유한다는 것은 어렵다. 책은 그 지난한 과제를 몸소 후광처럼 드리우고 있다. 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타자를 만나고 그 세계, 왕국을 월경하는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네 일상과 닮았다. 책을 사고 읽고 버리고 가끔씩 다시 책을 읽거나 새로운 책을 갈망하는 일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환멸을 느끼고 비전을 갖고 더러 절망을 안게 되는 일과 흡사하다.
그래서일까 김수희는 그 많은 책들을 집적해 다소 묘한 몸들을 성형했다. 직립한 몸통 같기도 하고 짐승의 꼬리 같거나 악어처럼 바닥에 엎드려있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날개처럼 허공에 매달렸다. 작가는 책의 껍질 위에 또 다른 껍질을 이식했다. 자잘한 알갱이처럼, 융기되어 부푼 돌기 형상의 손가락 모양을 한 고무들이 빼곡히 책의 전면을 감싼 것이다. 일상성으로서의 책의 의미를 변환시킨 것이다. 이제 책은 지워지고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제목과 저자는 증발하고 한때 책이었고 펼쳐 읽었을, 읽어야 할 책의 내부는 사실 외부를 감싼 돌기들에 의해 박제화 되었다. 책은 펼쳐 읽어야 비로소 책이 된다. 그 문장과 문장 사이를 더듬고 해독되고 이해되어야 책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봉인된 책이고 그저 하나의 오브재로 전락했다. 소통은 부재하고 더 이상 학습은 가능하지 않다. 이는 개인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얻은 학습들에 대한 이의제기이자 비판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한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책이란 결국 허구라는 얘기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인간이 만든 상징적 질서 즉, 언어체계가 생산해낸 문화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일성성으로서의 책의 의미를 전환시킨 자리에 여전히 미술적인 흔적이 책의 표피를 감싸고 있다. 사실 미술가는 기존의 사물에 어떤 믿음도 갖지 않는 자들이다. 늘상 사물과 대상을 호회하고 다시 보기를 거듭하는 존재들이다. 책이란 대상, 사물은 김수희의 의해 그 책으로 상징되는 학습과 정체성, 그리고 훈육 및 소통 등과 연관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발언의 매개로 쓰이는 한편 흥미롭고 재미있는 유희적 대상으로도 탈바꿈하고 있다. 그것은 사물을 또 다른 존재로 변신시키는 마술적인 체험이기도 하고 사물이 지닌 본래의 속성과 다른 질감 및 형상을 떠올리는 호기심 많은 상상력이다. 작가에 의해 책들은 마치 바닷가 바위의 표면에 잔뜩 들러붙은 소라나 조개의 견고한 껍질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자잘한 자갈을 온통 뒤집어쓴 그런 형국을 하고 있다. 여러 책들이 서로 연결되고 잇대어져서 어떤 몸을 연상시킨다. 책들이 꼬리를 가진 짐승이 되어 전시장 바닥을 돌아다니거나 벽에서 돌출되어 나오는가 하면 원래 기둥이었다는 듯이 바닥과 천장 사이를 지탱하고 있다. 책의 또 다른 삶, 쓰임일까? 분명 작가는 책들에게 저마다의 몸과 생명을 부여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동시에 책이 객관적 세계를 반영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오히려 작품은 작가를 배반하여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독립적인 것으로 행세한다는 사실을 책을 오브제로 해서 이를 통해 기이한 몸들을 성형하는 형식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박영택
#2778
김수희 - 책의 또 다른 몸
박영택
2006. 04. 30.
박영택
서울 출생
인명사전 바로가기 : www.daljin.com/author/688
미술평론가 박영택(b.1963)은 [얼굴이 말하다, 마음산책(2010)], [예술가의 작업실(2012)]을 저술하였고 아시아프 총감독(2010)을 역임하였으며,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