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지배적인 문화는 대중문화이다. 그러나 이 문화적 우세종도 인류의 오랜 문화사를 염두에 둔다면, 불과 얼마 전에 꽃핀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19세기 후반에야 대중 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렸으며, 그 때 사람들 대부분이 문맹을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대중사회의 역사적 기원은 19세기 후반 서구 자본주의의 급속한 산업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사회학자 E. 쉴즈에 의하면 대중사회란 역사상 처음으로 많은 인간 집단이 완전히 문화적으로 통합된 상태를 보여준 사회이다. 대중문화는 도시의 대량 시장의 소비를 위하여 이 방면의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민주적 문화와 상업문화는 밀접하게 연결된다. 대중사회에서 소비되는 문화의 양은 많으며, 그 시장 또한 크다. 그것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는 세계적 문화 언어를 형성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량 소비상품이 되었다.





대중문화에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는 학자들은 대중문화가 모든 것을 혼합하고 주물러서 만들어낸 등질적인 문화라고 비판한다. 그런 의미에서만 대중문화는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생산의 관점에서 본다면 민주적이라 할 수 없다. 세계 곳곳의 많은 아이들이 전 세계적인 유통망을 통해 살포된 같은 동화와 만화, 영화를 보고 자라는 실례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한 상품으로서의 대중문화는 대중의 수동성과 의식의 퇴화, 말초적인 쾌락에만 몰두하게 한다는 것이 대중문화 비관론자들의 생각이다. 대중매체를 타고 오는 대중문화를 통해 억압, 규범, 권력 대신에 유혹, 욕망, 선전이 계급 간의 상징적 통합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고립된 개인들에게 다가가며, 개인주의를 부추키지만, 기본적으로는 전체주의적이다. 문화는 인간의 내면적 자아를 조직하고 훈련시킨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이다. 대량생산과 그것이 만든 문화에 의해 규범화된 행동양식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양식으로 개인의 뇌리에 박힌다.


한국의 대중적 삶 또한 이러한 일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볍고 말초적인 내용들이 문화 소비자들의 감각을 길들여서, 사회 일각에서 생산되는 예술적인 소수의 문화는 소비자들에 도달하기 전에 사장되고 만다. 시장의 논리에만 부응하는 대중문화에 대항하기 위해 단지 예술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악화(惡貨)가 된 지배적 문화는 공공영역의 창출 및 강화를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 공공성이란 아직 낯선 개념이다. 일례로, 통계청에서 발표한 ‘한국인의 생활시간 배분실태’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웃이나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는 ‘참여 및 봉사’ 활동 시간은 하루 평균 4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자기개발이나 발전을 위해 쓰는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된 것은 사회의 재생산에 꼭 필요한 가장 기본적 공공 부문이 시장의 논리와 개인의 부담으로 떠 넘겨진 것이 주요 원인이다.


가령 우리나라처럼 학벌지상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공공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사적 수단으로 치부되어, 지나치게 많은 젊은 인력들이 학력 과잉 현상을 유발하고 있다. 인생의 너무 많은 시간이 학교 주변에서 맴도는데 쓰여진다. 이 때문에 청년층의 경제활동 참가율이나 연령이 가장 낮고 또한 늦다. 여성 인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교육이나 육아 등 가장 기본적인 책임을 개인과 사회가 나눠져야 할 일로 여기는 인식의 전환이 없는 한 어떤 공공의식도 기대하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공공영역은 태어나자마자 위기를 맞았다. 테리 이글턴은 [비평의 기능]에서 공공영역이란 ‘공론에 따라 형성될 수 있는 사회생활의 영역’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공론창출 능력을 지닌 시민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집회결사, 의사표현, 출판의 자유 등을 보장받아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해 협의할 수 있는 상호교류의 마당이다.

맨 처음 신좌파 이론가들에게 부각된 공공영역(public sphere)이란 개념은, 국가와 사회를 매개하고 자본주의 기업의 번영이 가능하도록 제 사회적 세력 간의 균형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전면 관리체제의 조직화 된 자본주의에 이양됨으로서, 공공영역은 사실상 소멸된다. 무엇이 취향이고 교양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다른 곳에서, 즉 공공영역의 경계를 넘어, 시민사회의 상품생산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상적인 의미의 공공영역에서 개개인은 이성적인 대화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나누고, 그들 스스로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을 만들 수 있다. 공공영역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는 더 이상 사회적 권력이나 특권 또는 전통 같은 것들이 아니라, 보편적인 이성의 합의에 바탕 한 담론이 소통된다. 그러한 공공영역에서는 권위가 아닌 진리가, 지배가 아닌 합리성이 통용된다.


테리 이글턴은 걷잡을 수 없는 이해관계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예술작품이나 비평은 자율성과 공평무사함을 주장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수많은 소모품의 생산이 야기한 특정 관객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단절은, 작가들로 하여금 초월적인 자율성이라는 환상을 키우게 했다. 이러한 순수주의 한켠에서 전통적인 공공영역의 현대판 모사품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산업이 번성하게 된다. 바야흐로 대중매체를 매개로 한 공공영역이 탄생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공공영역의 조잡한 후계자였다. 텔레비전은 복잡하고 분화된 사회에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되었으나, 그것은 모든 사회적 관계를 볼거리로 바꾸고, 현실을 소비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사회와 담쌓고 있는 듯한 아카데미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쌓여있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정점에 위치한 대학이 공공영역을 대변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우리의 근대화는 냉전으로 인한 체제 간의 경쟁 아래 군부독재의 주도의 성장제일주의가 관철됨으로서, 뒤틀린 ‘공공성’이 전 사회 영역에 작동하게 되었다. 특히 문민정부 이후에 관철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공공영역을 더욱 축소시키고 있다. 신자유주의란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이야말로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논리에 바탕을 둔 이념과 정책들을 말한다. 시장경제의 자생적 질서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는 사회, 환경, 복지 분야 등 공공분야를 축소하는 정책을 낳게 된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시장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지배는 민주주의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시장은 인간을 사적인 고객으로 취급하지만,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문제에 책임을 질줄 아는 공적 시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부각된 것이 민주주의와 시장 사이의 모순이다. 그래서 일방적인 시장의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은 전세계적으로, 지역적으로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유일한 시장의 지배는 계급 간의 격차를 벌린다. 현대 사회가 전반적으로 ‘유연화’ 되었어도, 노동계급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대중의 대다수가 작업 통제권을 거의 갖지 못한 채 노동자화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계급에 따른 기회의 불평등은 점차 커져서, 이제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고 해결되어야 하는 곳은 시장이나 아카데미가 아니라, 공공영역이다. 공공영역은 일종의 장(場)으로서, 사회관계와 문화제도, 그리고 주관성의 형식들이 상호 작용함으로서 구성된 공간이다. 이러한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은 예술성을 우선시하는 예술지상주의 보다는 정치적이며, 대중문화 보다는 실험적이다. 문화의 공공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의 구축에 예술가들도 참여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에서 상품생산으로부터 배제되었던 예술은 개인생활과 정치생활, 노동과 문화의 분리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서 공공영역과 사적 공간 사이의 관계를 원점에서부터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