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가운 철, 운필의 맛
운필과 철이란 소재의 만남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끼리의 만남이란 점에서 강한 시각적 충일을 일으키고 있다. 운필이 종이가 아닌 차가운 철판 위에 구사되었을 때 운필 고유한 맛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을까란 물음이 먼저 제기될 수 있다. 이는 운필이 갖는 존재의 양식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동반한 것이 된다. 차가운 철이란 소재 위에서 운필의 기운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가 란 물음에 세 사람이 응답하는 형식이 이 전시의 초점이 된다. 종이 위에 구사되었을 때 운필이 지니는 여운 대신 철판 위에 새겨진 운필은 필획이 갖는 힘이 한층 극명하게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선획이란 다른 장르의 그림에 비해 한국화 고유한 특징이다. 선이 단순한 윤곽선이 아니라 명암과 깊이를 내장한 것일 뿐 아니라 생명의 리듬을 표상하는 것이다. 수묵화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수묵화에서의 요체인 필획을 철이란 소재 속에서 구현해본 것이 이들의 작품이다.
김선두는 들풀과 같은 식물을 날카로운 필획으로 다루어오고 있다. 스텐레스 위에 새겨진 필획 역시 그가 즐겨 구사하는 들풀의 삐죽삐죽한 잎과 줄기를 연상케 한다. 종이 위에 시술되던 작업이 먹과 채색의 융화에 의한 것인 반면, 여기엔 운필의 획만이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다. 종이 위에선 쉽게 간과되었던 운필의 빠른 기운과 날카로운 동세가 뚜렷하게 되살아남을 엿볼 수 있다. 김선두는 같은 시기 목인화랑에서 <머물고 간 자리 우리 뒷모습>이란 주제의 작품전을 열었다. 소설가 이청준의 에세이에 붙인 그림인데 여기서는 주로 채색만을 구사하여 철필전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전시도 곁들여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이 전시는 이청준의 글에 붙인 그림이긴 하나 단순한 삽화가 아니다. 글을 통해 그림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림은 글과는 또 다른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글 쓰는 사람과 그림 그리는 이가 어떤 정신적 공감대 위에 선다면 상호 영향과 감화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되돌아 올 것이란 사실을 보여준 전시라 할까.
박유아는 운필이 구사된 철판을 오려 일종의 모빌을 만들어 주렁주렁 매달았다. 운필이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게 한 설치다. 그 역시 오랫동안 필묵이 갖는 고유한 조형영역을 탐색해왔으며 이 전시는 그러한 탐색의 하나의 결실로 보인다. 필획을 공간 속에 입체화함으로써 필획이 지니는 기운과 힘의 응고가 한결 두드러지게 표상되고 있다. 이 같은 모빌의 시도가 일회성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방법적인 모색이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박성태는 철망을 주 소재로 오랫동안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말)의 형상화를 시도하고 이를 공간에 설치하여 독특한 연극적 상황을 유도하는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운필의 흔적이란 주로 형상화의 윤곽에 의해 들어나고 있어 앞서 두 사람과는 대비된다. 그럼에도 리드미칼한 형상의 곡면을 따라가면 운필의 섬세한 기운에 접하게 되고 그것들이 공간 속에 기념화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조명에 의한 과대한 연극적 장치는 애초의 운필이 갖는 리듬을 무화시키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색채에 천착하는 수평선과 꽃
김보희의
최송대는 오랫동안 꽃 그림에 심취해 있다. 단순한 꽃이 아니라 꽃의 생태를 극명히 파고 드는, 또는 꽃의 생태를 통해 생명의 비밀스런 내면을 파고드는 특징을 보인다.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부분만을 확대해 본다는 점에서 다른 화조화와 비교된다. 마치 곤충의 촉수처럼 꽃 안을 파고드는 앵글의 집요함은 꽃이 지닌 독특한 여운을 화면 가득히 뿌려놓는다. 꽃이면서 동시에 꽃이 아닌 세계, 그 아슬한 경계 영역으로 더욱 밀착해 들어갔으면 하는 기대다.
아트 인 컬쳐 2006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