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문제
황혜선은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전통적인 조각수업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녀는 다른 환경에서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에 미국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수업이란 것이 매번 자기작품에 대한 설명과 다른 이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으로 채워지면서 다분히 조형적인 것만 추구하던 작업방식에 익숙해있던 그녀로서는 상당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수업시간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하느냐, 그리고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는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매순간 봉착했고 이를 해명하는 것이 작업이 되었다. 미국유학은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를 질문해보고 해명하는 것이 다름 아닌 작업이며 작가라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황혜선이 미국 유학기에 했던 작업들 대다수는 소통의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다른 문화권에서의 문화적 충격,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 친구들과 소통의 문제, 아울러 결혼을 통한 남편과 자신의 소통의 문제 등이 작업의 주된 테마가 되었던 것이다. 해서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오브제작업으로 선을 보이고 그 작품이 소통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사실 그 작업들을 관통하는 것은 인간간의 진정한 소통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었다. 귀국 후 1997년 금호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은 전시를 통한 소통의 문제가 주된 화두였다. 작업이라는 것은 세상과 통하는 통로라고 생각한 작가는 특히 작품과 언어와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읽혀지는 방식에 대한 관심, 작품과 관객이 소통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집중된 노동력으로 만들어낸 작은 작품들은 작품과 언어와의 역설적 문제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위트와 재미를 선사하였다. 그런데 관객들은 그 위트를 감상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여전히 미술작품에 덧씌워진 텍스트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신이 미술계에 거창한 말, 논리를 전달하고 싶은 것으로 오해되었던 것이다. 결국 작품을 통한 소통의 실패를 깨달은 작가는 그렇다면 굳이 ‘작품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하는 회의를 통해 자신이 작품과 소통하고 작품은 관자들과 소통하도록 놔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침묵으로 절여진 말없는 작품이 그들 나름대로 소통구조를 만들어나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해서 작가의 생각이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소통되기 힘들다는 것을 확인한 후 말이 필요 없는 작품, 말을 하지 않는 작품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정물을 소재로 한 란 작품들이다.

그 작품은 우연히 작가가 화집에서 모란디의 정물 그림 하나를 본 데서 기인한다. 소박하고 단조로운 구도에 정물들이 직립해있는 이 그림은 침묵이 주는 강한 힘으로 적막하다. 작가는 문득 이 같은 작업을 하고 싶었다. 모란디의 회화에서 느낀 감동을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서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 그래서 말없는 사물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조각전공자로서 모란디의 정물 같은 작업을 자신의 방식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조각의 형식인 좌대와 회화의 형식인 캔버스 천을 결합, 즉 좌대에 캔버스 천을 씌운 다음에 물감이 올려지는 행위대신에 바느질을 해 정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랫동안 외부세계를 재현하고자 했던 회화가 스스로 사물이 된 형국이다. 그것은 회화와 조각 사이의 경계에서 진동하는 한편 회화이자 조각이고 조각이자 회화인 기이한 지점에서 서식한다.

스틸라이프 작업은 이후 유리판이 겹쳐지는 작업으로도 연결된다. 작고 얇은 유리판이 몇 겹으로 겹쳐진 것이 깊이를 간직한 액자 안에 끼워있는 형국인데 이는 캔버스 천을 대신해서 실재하는 유리판의 피부위에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드로잉을 올렸다. 유리판 작품은 회화적인 표현이지만 드로잉 된 껍질과 같은 얇고 약한 조각재료인 여러 개의 유리판들이 겹쳐지면서 조각의 형태가 되는, 즉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드로잉이 겹쳐져서 공간을 이루게 됨으로써 조각이 되는 것이다.

그와 병행해서 작가는 지우개가루를 이용한 드로잉도 선보였다. 먼저 그림을 그린 후 그것을 지우개로 지운 다음에 그 지우개가루를 이용해 또 다른 드로잉을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과 관련된 것인데 30대를 지나면서 작가는 잊어야 할 것이 많은 나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망각은 늘 기억과 겹쳐져서 떠오른다. 지우개로 지워도 지우개 가루는 지워지지 않는 또 다른 기억들을 잉태하고 있는 것처럼 망각 속에서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 끝없이 상기되어 부풀어 오르는 내면의 상처를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이렇듯 황혜선의 작업은 지극히 섬세하고 내밀하며 심리적인 세계와 정신적인 풍경, 의식의 지형을 절제와 침묵으로 일관되게 떠내는 편이다.

이후 갤러리 피쉬에서 선보인 작업은 이전의 스틸라이프 작업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전시 공간 전체를 통로로 만들고 정물 형태로 만들어서 관객들이 그 사이를 통해서 저 안쪽에 있는 스노우볼을 보러가게 만든 구조였다. 소중한 장소 혹은 귀중한 것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이렇듯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라는 설정에 의해 스노우볼에 담긴 스틸라이프를 만나러 가는 과정으로서 여러 칸막이를 설치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정물 작품에 주로 등장했던 여러 사물들의 형상을 오려내서 만든 칸막이의 문들이었다. 통로를 거쳐 간 관자들이 스노우볼을 본 후 맨 마지막에는 가로, 세로 2미터 크기의 큐브 형태로 된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윗부분에만 조그맣게 창문 모양의 구멍을 뚫어서 마치 집의 형태처럼 느껴지는데 그것 자체가 하나의 풍경이기도 하고 정물이기도 한 중간 형태를 보여준다. 작가에게 이 스노우볼은 개인의 추억과 관련되어 있다. 어린 시절 작가의 아버지가 해외여행을 하고 올 때마다 스노우볼을 선물해 주었다고 한다. 그 스노우볼은 자신이 가지 못한 곳, 갈 수 없는 나라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그 작업은 자신이 갈 수 없는 풍경으로 마음 안에 있는 풍경이자 풍경 안에 갇힌 장소를 뜻하는 것이다.

2004년도에 인사미술공간에서의 전시 제목은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였다. 작가는 전시장의 흰 벽에 실리콘으로 드로잉을 했다. 얼핏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작업이다. 그것은 부재하면서도 현존하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고,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놀이한다. 작가는 조각의 최소단위인 음각과 양각을 이용해서 최소한으로 표현된 작품을 했다. 1층은 뾰족한 도구로 살짝 파서 음각이미지를 만들었고, 2층은 흰색 실리콘을 벽면에 얹어서 양각으로 드로잉 한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조각의 단위인 음각과 양각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다. 이 저부조/회화는 눈에 가장 익숙한 사물들을 재현해 놓았다. 그것은 그림이면서 조각이고, 조각이면서 그림인 그 이미지/사물은 공간의 피부에 어렴풋하게 환생해서 보는 이들의 기억을 마냥 자극한다. 각각의 사물은 작가의 기억 속의 공간이기도 하고, 그 사물을 본 사람들의 기억 속의 공간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특별한 이야기는 배제되어 있지만 관객들이 스스로 그 사물을 매개로 삼아서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것은 마치 벽면이 살갗이 부풀어 오르거나 상처가 난 것처럼 느껴지면서 촉각적인 공간을 만들어 보인다.
일상과 사적 공간의 기억들
최근작은 10여 년 동안의 작품 활동을 정리하는 시간에 의해 풀려나왔다.
반지, 양동이, 거울, 크리스탈, 유리 컵,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실루엣과 같은 예민하며 단순한 선과 작은 문자들이 어우러져 풍경을 만들었다. 각각의 사물들은 전시 공간에 적당한 거리를 갖고 떨어져있다. 그래서 그 사물 하나하나를 징검다리 삼아 작가의 감정과 의식의 내부로 미끄러져 간다. ‘약속’이란 제목을 단 커다란 반지는 전시장 바닥에 놓여있다. 서약과 맹세, 믿음의 상징인 반지가 쉽게 들 수도, 손가락에 낄 수도 없게 너무 크고 무겁게 제작되었다. 이 대형의 반지는 약속의 무거움을 뜻하며 각인된 약속의 여러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보게 한다. 불멸할 것 같은 약속들은 시간과 세월의 흐름 속에 쉽게 망각되고 퇴색한다. 마음속에 영원토록 무겁게 각인될 수 있는 그런 반지는 없을까? 지극히 섬세한 마음과 감정을 다룬 작업들은 특히 ‘흘리지 못한 눈물’이란 작업에 잘 드러나 있다. 크기가 다른 크리스탈들이 화면에 촘촘히 부착되어 있다. 그 크리스탈에는 각각 ‘그래’, ‘괜찮아’란 문구가 매우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삶을 견디는 주문 같은 문장은 더없이 화려하고 투명한 크리스탈의 저 안쪽에 은밀하고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작가의 눈물처럼 혹은 마음의 결정들처럼 매달려있다. 자신의 감정들이 보석처럼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자 일상에 지치고 힘겨운 자신을 다독거리는 반복적인 중얼거림, 자기 최면 또는 부적이나 주술, 치유에 해당하는 것 같다. 행복과 불행 그 사이 어디에선가 그저 자신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일이 삶은 아닐까?

‘상처’라는 작업은 타인의 피부에 자리한 상처를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얼핏 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상처, 타인의 상처는 무엇일까? 유리 표지에 묶인 수많은 사진들은 누군가의 피부 한 부위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자세히 보면 조그마한 상처들이 슬쩍 드러난다. 이 사소한 상처들은 그 어떤 사건, 시간, 기억을 부감시킨다. 누군가의 몸에 난 상처는 한 개인에 대해 침묵으로 전해주는 너무 많은 말들이다. 작가는 누군가의 몸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 상처를 헤아려본다. 우리 몸의 피부에 난 작은 자국은 결국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누군가와 함께 했었던 몸, 고통과 아픔을 치러냈던 몸, 지금은 희미해지고 다시 새살이 돋고 아물었지만 자세히 보면 여전히 어떤 차이를 지닌 흔적들은 불현듯 그 당시로 줄달음질치게 한다. 그러니까 피부에 난 상처를 쓰다듬거나 다시 본다는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피부는 우리와 세계 사이의 경계선이다. 시간이 내려앉는 것이자 타인의 시선이 멈추는 곳이다. 그리고 피부는 늘 우리와 함께 있다. 따라서 피부는 모든 기억을 저장하고 있으며 수많은 시간과 상처를 지니고 있다. 피부는 말을 못하지만 상처를 통해 자신이 겪어낸 모든 것을 발설한다. 기억과 관련된 또 다른 작업은 바로 ‘잊고 싶은 기억’이란 것이다. 속치마 속단에 실루엣의 이미지를 새겨 넣었는데 그 장면은 오로지 한 개인에게만 의미 있는 장면이다. 일상적인 기물과 풍경이 끊어질듯, 이어지면서 다소 애매하게 수놓아져 있는 이 그림은 감추어진 기억, 그러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에 대한 심리적 진술 같다. 커다란 유리판에 에칭 선으로 작가 자신의 하반신을 그려 넣은 작품은 자신에 대한 관조적 성격이 짙다. 치마를 입은 채 직립하고 있는 자신의 하반신인데 여기서 구두는 바닥으로부터 약 10cm 정도 떠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발이 떨어져 있는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늘상 자신에게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고, 현실감이 없다고들 한단다. 해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현실감이 없나봐” 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인정해본다. 자신이 현실감이 부재란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미지화 한 이 작품은 투명한 유리 플레이트에 그려진 저부조의 회화/부조다. 회화와 조각 그 사이,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사실 이 작가의 주된 경향이다. 이미지는 공간, 화면의 피부에 어렴풋하게 환생해서 보는 이들의 눈을 조심스레 유인한다.

이렇듯 작가의 근작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금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그간의 모든 작업들이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사적 공간의 기억, 그 목록과 흔적과 마음에 남겨진 고인 것들에 대한 회상, 기억에 다름 아니었다. 작가가 즐겨 다루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작고 하찮고 소소한 물건들은 그러나 한 인간의 삶과 인생, 예술에 대해 커다란 부피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라는 점이다. 그 이야기의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나 재료를 찾아서 사용하는 것이 작업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융기한 감정의 문제들이 결국 작업이 된다. 우리는 매 순간 감정과 생각의 실타래를 풀면서 살아가는데 작가는 그것들이 자기 내부에 모이고 고여 어떤 형체로 부감될 때 비로소 이를 외화 시킨다. 그 작품들은 작가의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다 나온 형상들이다. 마음 안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의 몸을 얻어 나온 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 감정이 묻어있는 이미지들이다. 오늘날 미술이 개인이 세계에 반응하는 현재진행형의 심리적 계기가 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심리적 계기를 드라마 없이 정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작품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보는 사람에게 속삭임처럼 다가가는 것을 원한다. 앞서 언급한 모란디의 정물화처럼 말이다.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가진 작품의 힘, 말하지 않는 힘을 표현하고자 한다. 침묵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작품 말이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
황혜선의 작업에는 공통적으로 아련하고 조심스레 드러나는 이미지들, 명확함과 거대한 스케일이 아닌 작고 흐릿하고 적조한 것들, 손상되기 쉬운 재료들, 투명하고 가볍고 반짝이며 침묵과 적조함으로 절여진 것들이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고 이미지이면서 문장이고 보는 것이자 동시에 의식하는 것, 생각이자 물질이며 매우 사적이면서 보편적이다. 망막에 최소한으로 호소하고 정신과 마음을 최대한으로 흡인해내는 그런 작업이다. 그리고 이는 이 작가이 성정과 인성에 연유한다. 그런 작가의 인성이 결정화된 것이 바로 ‘바람과 같은 무게’란 영상작품이다. 작은 모니터에는 탁자 위, 모서리 근방에 놓인 물이 담긴 유리컵만을 전재한다. 관자로 하여금 그 장면만을 오랫동안 응시하게 한다. 찻잔 속의 물은 약간씩 출렁이다가 이내 잔잔해지고 곧이어 다시 출렁이기를 반복한다.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순간 격해질 수도 있고 잔잔해질 수 도 있는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있을 텐데 결국 그런 감정들도 물 잔 안에서 흔들리는 물 정도 밖에는 안된다는 것, 자기라는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이 작업에서 그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견인력과 응시의 차분함, 적멸의 상황성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본다. 불교에서 애기하는 아름다움이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생각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움직이지 않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스크리트로 그것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라고 부른다. 감정이나 외부의 조건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다만 ‘그것을 할 뿐’이다. 황혜선 역시 단지 살아갈 뿐이고 그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어낸 모든 것(기억)들을 이미지화, 물질화 할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이 세상의 가치와 믿음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 등을 대면하면서 이를 작업이란 수행으로 치러낸다. 어쩌면 행복이란 단순히 고통의 부재를 의미할 수 도 있다. 고통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일생이 고통을 피하는 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하려 노력하지만 순간 우리들이 지닌 궁핍한 언어는 곧 메말라 버린다. 미술 역시 궁핍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궁핍함과 허약함을 껴안고 그것으로 자기 생의 고통을 피하고 조그마한 행복의 편린이나마 소중하게 감싸 안으려는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이 작가의 작업이다. 새삼 불교적 사유의 한 자락을 적막과 투명, 침묵 아래서 보고 있다. 현실에서 약간 발이 떠있듯 살아가면서 삶의 어떤 디테일한 부분들을 더 섬세하게 살피는 것이 바로 이 작가만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