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오즈본의 저작 <옥스퍼드 20세기 미술사전>에 따르면 풍선과 같이 공기를 이용한 물체를 사용하는 다양한 유형의 작품들을 에어아트라고 한다. 이는 1960년대 말에 유행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만한 전시로는 1968년 <공기를 이용한 구조들>전(프랑스 파리 현대미술관), <에어아트>전(필라델피아 예술진흥회), 1969년 <공기를 이용한 조각>전(뉴욕 유태미술관) 등이 개최된 바 있다. 간혹 스카이아트라는 용어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더 폭넓은 범주를 포괄한 것이다. 그리고 공기를 조형의 한 요소로 도입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흰색으로 칠해진 텅 빈 갤러리를 전시한 이브 클라인의 1958년 작 <텅 빈 전시회>야말로 에어아트의 진정한 선구라 할만하다.
국내에서의 가장 최근 전시의 예로서는 2003년 <인도현대미술전>을 통해 국내에 소개 전시된 탈루 L.N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이 전시에서 탈루는 그 표면을 합성소재로써 코팅 처리한 천을 박음질하여 특정의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 진공청소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풍선처럼 부풀린 일련의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여기서 작가는 마치 기둥과도 같은 형상을 재현하고 있는가 하면, 사람의 각종 장기 형상을 만들어 빨래처럼 줄에 걸어 놓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전통적인 신전이나 사원을 형상화하기도 하는데, 이때 신전은 어떠한 시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언제 어디서건 신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간이 신전이고 이동식 사원인 셈이다. 이외에도 일본과 국내의 일부 작가들에게서 풍선을 조형화한 사례들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공기를 조형의 한 요소로 끌어들인 조권익의 일련의 작업들은 풍선조각 혹은 에어아트로 범주화할만한 본격적이고도 진정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조권익은 특수 제작된 천을 소재로 하여, 이를 공기가 새나가지 않도록 박음질하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공기집을 만든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사방으로 연속된 똑같은 큐브 형태의 연이어진 구조물이 만들어지고, 여기에다가 공기를 주입시켜 이를 부풀린다. 이렇게 부풀려진 구조물을 벽체인 양 세워 전시장 벽면에다가 둘러쳐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한쪽 공간에다가 별도로 제작된 풍선 조형물을 설치한다.
이는 단순히 스튜디오에서 제작되고 완성된 작품을 전시장으로 옮겨와 전시하는 식이 아니라, 전시 공간 자체를 조형화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간설치작업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소위 전통적인 모더니즘 중심의 형식주의 미술을 전시하기 위해 고안된 화랑이나 미술관을 지칭하는 이른바 화이트 큐빅과는 구별되며, 보다 활성화된 공간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오브제 중심의 미술과는 구별되며, 개념성과 실천 논리가 강한 현재진행형의 비결정적인 방식의 조형작업을 실현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시공간의 정체성을 변질시킨다는 점에서 탈장소의 개념이 발견되며, 공간 본래의 소여된 조건을 무효화하고 중성화한다는 점에선 그 실체가 없는 장소,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를 뜻하는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공감과 이에 대한 실천논리가 느껴진다. 즉 주어진 장소를 수동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임의적이고 잠정적인 장소 혹은 환경을 새로이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장소 본래의 공간적 조건을 극대화하고 의미화하는 장소특정성의 개념과는 구별된다. 오히려 장소와 이를 배경으로 놓여진 오브제를 분리하는 식의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포섭되지 않으며, 장소와 조형물이 유기적으로 연속됨으로써 그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조각에 대한 개념을 재고하게 만든다. 속이 꽉 찬 덩어리로 나타난 양감과 재료의 물질적인 성질(물성)이 모더니즘 조각 고유의 성질이자 요소라면, 조권익의 작업은 한눈에도 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체성으로써 조각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조각이 갖는 질량과 부피 그리고 양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탈조각과 통하며, 전통적인 조각 고유의 물질적인 성질에 반(反)한다는 점에선 탈물질 개념과 통한다. 전통적인 조각 개념에서 볼 때 이처럼 탈물질성을 그 근간으로 하는 부드러운 조각은 조각이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적 근거마저 상실할 정도로 그 존재가 희박하게 어필된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견고하지도 무겁지도 고정돼 있지도 않다. 오히려 가변적이고 가볍고 유동적이며 일시적인 감수성을 통해 탈모던 혹은 후기근대 시대의 조형정신을 표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권익의 작업은 촉각적인 조각이다. 즉 그 자체 고정된 형태로서의 시각적인 기호 대신에 쿠션이 감촉되는 조각,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조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는 일정부분 페미니즘 예술가들의 관념과의 연관관계에 놓여 있다. 특히 프랑스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논객인 루이스 이리가레이의 남성적인 글쓰기와 여성적인 글쓰기의 대비를, 남성의 시각적인 문자와 여성의 촉각적인 언어의 대비를 떠올리게 한다(주지하다시피 이미지는 기호의 한 형식이며, 언어의 한 형식이다). 정신과 이성 대신에 육체에 쓰인, 육체가 쓴, 육체의 언어를 주장하는 이리가레이의 여성적 글쓰기는, 상징과 은유를 통한 압축적인 글쓰기(그 자체 모더니즘의 본질주의와 환원주의의 소산인)와 비교되는 이야기 즉 서사(그 자체 후기 근대의 알레고리로 나타난)의 도입으로서 나타나며, 또한 관습화된 언어체계를 해체하는 해체주의의 실천논리로서 나타난다. 작가의 조형작업은 말하자면 양감과 물성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 조각 개념을 해체하고, 이를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조각, 유기체의 피부처럼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조각,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숨쉬는(듯한) 조각으로 대체하고 변질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작가의 작업이 일련의 연속된 큐브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작업을 구조화하고 있는 큐브들 하나하나는 전체 구조물을 이루는 최소단위, 모나드, 단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을 세계에 대한 환원적 표현으로서 읽게 한다. 즉 최소 단위원소의 자기복제로부터 비롯된 세계의 발생론 혹은 기원론에 대한 공감이 읽혀지는데, 이것이 각각의 큐브의 한가운데에 나 있는 숨구멍을 연상시키는 구멍들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따라서 조권익의 작업은 부드러운 조각과 촉각적인 조각으로써 마치 유기체의 피부와도 같은 표면질감을 실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측면에서마저도 세계, 존재, 세포의 단위구조를 은유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큐브로 나타난 반복구조와 유기체적인 성질이 결합된 작가의 작업은 일면 포스트큐비즘의 한 형태를 예시케 한다.
이와 함께 큐브의 단위원소들 하나하나가 등가치를 이루며 반복적으로 열거되고 나열되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로부터는 일종의 횡단적 연계성 개념(그 자체 후기 근대적 사유체계의 한 형태인)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즉 구조물을 이루는 단위원소들 간에는 어떠한 예속관계나 우열관계도 존재치 않으며, 이는 수직적 규준과 비교되는 수평적 규준, 계통적 단계와 비교되는 계열적 연쇄에 바탕을 둔 횡단적 연계성의 실천논리를 강력하게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권익의 작업은 속이 비쳐 보일 것 같은 반투명의 막으로 된 구조물로써 벽을 감싸고 공간을 감싼다. 동일한 반복구조로 나타난 각각의 큐브들의 구멍에서는 마치 존재가 숨을 쉬는 듯한 미세한 동세(動勢)가 감지될 것만 같다. 시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구조물이 존재의 순환원리를 암시하며, 일순간 공간을 거대한 자궁으로 변질시킨다. 그 자궁을 투과한 부드럽게 감촉되는 빛 속에서 존재는 정화되고, 상처를 치유 받고, 위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충환
#2817
조권익의 에어아트
고충환
2006. 07. 31.
고충환
부산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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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고충환(b.1961)은 월간미술대상 학술평론부문 장려상(2006)을 수상하였으며, <비평의 쟁점전> 포스코미술관(2005), <조각의 껍질 혹은 허물전> 모란미술관(2008)를 기획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