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여러 다양한 형태의 첨단 미디어가 발달하기 이전에 조형예술가들은 색채를 매개로 해서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써 빛을 표현해왔다. 특히 이는 종교화에서의 성인의 후광과, 천상의 빛을 대면한 듯한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보듯 종교적이고 신성한 존재를 밝혀주는 성스러운 빛의 형태로서 나타났다. 또한 빛은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의 실체를 암시해주는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빛의 형태를 띤다. 그런가하면 스튜디오를 벗어나 자연과 대기 속에서 그림을 그린 외광파 화가들에게서의 빛은 자연광을 화면에 도입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던 것이 인상파 화가들에게 와서야 색채가 다름 아닌 빛에 연유한 것임이 밝혀지게 되고, 빛에 대한 형식실험이 그 진정한 근거를 얻게 된다. 이후의 각종 첨단 매체를 도입한 영상설치미술에서 빛은 조형예술가가 자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한 요소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2005년 <세계 빛 엑스포 2005, 빛 - 환경>전에 연계하여 열린 이 전시에서는 현대미술에 나타난 빛의 다양한 양상을 접할 수 있다. 빛이 물질적이고 조형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로 나타나는가 하면, 무의식과 욕망 그리고 영적인 존재와 같은 비물질적 존재를 상징하고 암시하는 형태로 현상하기도 한다. 여러 형태의 조명기구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기 발광성 소재를 아우르고 있으며, 더 나아가 모니터나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 자체를 빛의 한 형식으로 보기도 한다. 빛 자체를 겨냥한 경우도 있고, 단지 자신의 주제의식을 풀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빛을 도입한 예도 있다. 총 28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이 전시는 그 경향이 대략 빛 조형설치작업과 영상설치작업 그리고 사진설치작업으로 구별해볼 수 있으며, 이 가운데 빛 조형설치작업에서는 실제로 빛을 소재로 했거나 단지 암시만 하는 작업 등을 포함한다.


빛 조형설치작업

오상욱, 김태곤, 최태훈, 문주, 김지혜, 이은숙, 박근우, 박소영, 김상규, 전재철, 안유자, 심영철, 이영호, 이윤아, 채송화, 이수홍, 박원주, 서상호, 송운창, 정국택 등의 작업은 빛이 실재로 소재로서 도입되거나 암시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먼저, 오상욱은 LED 튜브로부터 빛의 다발 혹은 빛의 줄기를 형상화한다. 중심으로부터 사방으로 펼쳐진 그 빛줄기는 분수대의 형상을 닮아 있으며, 쉼 없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지속적인 점멸이 빛의 축제, 빛의 향연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무미건조한 공간을 일순간 환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켜놓는 그 빛의 성분은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며, 심리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이다. 이는 매스와 물성 중심의 조각과 환경조형물에다가 빛을 끌어들여 그 공간성을 확장하려는 작가의 일관된 관심과도 통하는 것이다.

김태곤과 최태훈의 작업에서의 빛은 은하수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김태곤(은하수)은 공간에다가 빛을 반사하는 수백 가닥의 실을 설치해서, 일종의 가상적인 은하수를 연출한다. 은하수가 어둠 속에 흐르는 빛의 줄기 혹은 빛의 다발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로부터 빛 자체의 즉물적인 성질이 느껴진다.

최태훈(은하수)은 금속판이 본래의 물성을 잃고 마치 가죽이나 펠트 천과도 같은 유기적인 소재가 될 때까지 변형시켜 나가는데, 이때 그 표면에 그 금속판을 관통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미세구멍들이 생겨난다. 이렇게 조성된 판을 세워 그 이면에 조명을 설치함으로써 구멍을 통해 새나온 빛의 점들이 어우러져 마치 밤하늘을 대면한 것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더러는 판을 이중으로 중첩시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로부터 우주적 스케일이 느껴지고, 직조(直彫)만이 가능한 감동이 전해져 온다.

그런가하면 문주의 작업(여명의 풍경)에서의 빛은 고도로 미니멀한 형식 속에다가 일종의 암시적인 풍경을 함축해낸 형태로서 드러난다. 그러니까 나뭇잎 모양을 투각한 알루미늄 박스 속에다가 붉은 빛을 내는 LED를 내장하게 되는데, 이때 LED로부터 발해지는 빛이 매체 특유의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그리고 차가운 느낌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오히려 그 빛은 해질녘의 어스름하고 은근한 빛을 닮았으며, 그 빛으로 붉게 물든 나뭇잎의 형상은 가을바람에 떨어진 낙엽인 양 느껴진다. 이 빛에 비해 알루미늄 박스가 오히려 차갑게 느껴질 정도이다. 매체 자체로부터 발해지는 인공적인 빛과 알루미늄의 물질성을 대비시킨 이 작업에서 작가는 미니멀리즘의 형식논리와 전통적인 재현의 논리가 만나는 접점의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김지혜(만져지는 빛)는 도기를 소재로 하여 각종 과일과 꽈리 모양을 형상화한다. 그 속에다 전구를 내장해서 천장에다가 매다는 방법으로 설치했으며, 이는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 형형색색의 불빛들로서 나타난다. 이 불빛들은 재차 바닥에 설치된 수조에 반사되면서 촉각적인 빛, 감촉 되는 빛, 환상적인 빛의 아우라를 연출한다. 그 빛의 성분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이성(理性)에 대한 상징의 형태와는 거리가 먼, 여성적인 감성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은숙(비가시적 세계의 생명체)은 투명한 폴리에스테르를 소재로 해서 만든 구조물을 설치한다. 막대 모양의 구조물을 기본 모듈로 하여, 이를 이어붙이는 방법으로써 연이어진 비정형의 구조물 속에다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기 발광성 소재의 형광섬유 조각들을 패치워크처럼 덧댄다. 블랙라이트로부터 발해지는 은근한 빛(거의 어둠과 동격인) 속에 드러난 구조물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마치 스스로 분열하고 증식하는 원형생물의 세포운동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로써 작가는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생명체의 비의(秘疑)를 드러내는 한편, 그 비감각적인 존재에다 일정정도 형상화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박근우(재생)는 그 표면이 편평한 큰 돌무더기 세 개를 공간에다가 설치하고, 각 돌 무더기 속에다가 조명을 설치해서, 그 벌어진 틈으로부터 빛이 새나오게 했다. 그 형상이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빛의 제단을, 성소를 떠올리게 한다(모든 제단은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 돌의 갈라진 틈으로부터 새나오는 빛의 줄기가 제단의 영적인 환기력을 강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박소영(빛)은 천의 표면에 프린트된 나뭇잎 조각들을 중첩시키는 방법으로써 원형(圓形)이나 하트 모양 등의 다양한 형상을 만들고, 그 표면에다 각종 등을 설치한다. 나뭇잎 조각들을 중첩시켜 만든 형상이 마치 새의 깃털과도 같은 가벼운 느낌과 함께, 파충류의 껍질과 허물을 연상시키면서 일종의 생물학적 변태마저 떠올리게 한다. 이와 함께 그 자체 일종의 오브제로서 도입된 조명등과 어우러진 형상이 공간에 투영된 빛을 걸러내면서, 정적이고 관조적이며 시적인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김상규(빛의 흔적)는 공간에다가 유기적인 곡선 형태의 철골 구조물을 설치하고, 여기에다 연이어진 형광등을 장착해서 일종의 빛이 그려낸 선(線) 혹은 빛 드로잉을 연출한다. 조각에서의 선조(線彫)를 확대 적용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작업에서의 빛은 작업의 범주를 공간에로까지 확장시킨다. 이로부터 라이트아트와 미니멀리즘이 결합된 듯한 정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전재철(경계)은 원형으로 오린 종이 조각들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붙여나가는 방법으로써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블랙라이트를 설치해서 공간에 장착된 종이조각들로부터 파르스름한 빛이 발해지게 했다.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그 투명한 빛의 지점들이 환상적인 공간을 연출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심리적이고 내향적인 기분에 젖게 만든다. 마치 태양열 관련 구조물을 연상시키는 유사 형태 역시 흥미롭다.

안유자(지금 그리고 여기)는 레이저 커팅 기법을 이용하여 투명한 아크릴 판의 이면에다가 드로잉을 하고, 그 판의 위쪽과 아래쪽에 LED를 장착한다. 이로써 LED로부터 발해지는 빛의 성분에 따라 아크릴 판의 색채가 변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때 아크릴 판의 색채는 그 이면에 커팅된 드로잉의 다양한 깊이와 각도에 따라 하나의 색으로만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채들을 함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기술적으론 단순한 방법을 통해 색채와 빛과의 모호한 경계를 드러내는 작가의 감각과 재치가 인상적이다.

심영철(기념비적 정원)은 일종의 홀로그램 정원을 보여준다. 그 내용은 자연 소재로 읽히지만, 일면적으론 가시나무를 소재로 한 것이 종교적인 메타포로도 읽힌다. 작가의 작업은 전자정원, 디지털정원, 기념비적 정원 등의 명제가 부가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의 정원은 정원 그 자체이기보다는 일종의 사유의 터, 그 장을 상징하고 암시한다.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정원이 자연을 시뮬라크르로 전이시켜 놓고 있으며, 이로부터는 실제와 가상 이미지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느껴진다.

이영호(명상 - 아우라)는 철판을 커팅하고 용접해 실물 크기의 나무를 재현한다. 그리고 그 속에 조명을 설치해 이음새의 벌어진 틈으로 가녀린 빛이 새나오게 했다. 이때 나무로부터 발해지는 빛줄기는 나무가 내재한 영적인 기운을 상기시킨다. 말하자면 일종의 신목(神木)을 형상화한 것이며, 그 이면에는 모든 존재에 깃든 영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범신론과 물활론에 대한 공감이 놓여 있다. 자기 내부로부터 은근하게 빛을 내뿜는 영적인 나무가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의 본성에 대한 명상에로 이끈다.

이윤아(가상 혹은 실제)는 눈이 부실 만큼 하얀 도기로 만들어진 돌고래 소 조각상을 보여준다. 이렇게 제작된 수많은 돌고래 조각을 가는 철봉을 이용해 공중에다 띄움으로써 마치 돌고래들이 떼를 지어 바다 속을 유영하고 있는 듯한 장관을 연출해낸다. 가상과 실제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바다 속 풍경을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채송화(나는 할 수 있다)는 결의에 찬 사람의 얼굴 표정을 양식화한 조형물을 공간에다가 설치한다. 그리고 공간 위로는 여러 가닥의 가녀린 줄을 설치하고, 그 줄에다가 관객들 각자의 소원과 바램을 적은 종이쪽지를 매달게 한다. 이와 함께 바닥에는 원형을 그리며 촛불들을 설치해서 그 장소에다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다. 일종의 자기암시 혹은 자기최면 행위에 그 맥이 닿아 있는 이 작업은 익명적 주체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그 자체 치유미술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수홍(태극기)은 동양의 전통적인 상징체계 중 하나인 태극을 형상화한다. 태극은 야광 소재의 적색 점과 청색 점들의 조합을 기저로 하여, 이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해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작업에서의 점들은 롤 형태의 순환장치에 의해 서로 어우러지고 뒤섞인다. 음과 양의 상호작용성을 통해 우주의 생성원리를 조형화한 것이다. 또한 태극은 한국의 국기에 등장하는 상징기호이기도 하다. 적색 점과 청색 점들이 분리되고 구분되기보다는 하나로 조화되고 혼합되는 것에서, 이질적인 것들 간의 우연한 결합에 바탕을 둔 작가의 관심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반응과 염원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 느껴진다.
박원주는 자신의 작업을 ‘Warholic으로 명명한다. 전쟁중독 혹은 전쟁광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그러나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엔 작가의 실제 작업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종이를 접고 오려 붙이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사방연속무늬를 만들고, 이렇게 나타난 무늬가 코카콜라 병 모양의 동어 반복적인 나열을 보여줄 뿐이다. 아마도 코카콜라 병을 자본주의 시대의 전쟁 기호로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종이로 재구성해낸 코카콜라 병을 통해 신제국주의의 경제논리를 풍자한 이 작업은 전작에서의 종이로 만든 전기의자를 통해 합법적인 살인행위를 풍자한 것과도 통하는 것이다.

서상호(신세계를 꿈꾸며 만들었다)는 한지를 조형화하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긴 팔을 만들고, 이렇게 만든 팔들의 손이 아래쪽을 향하게끔 천장에다가 매달아서 설치한다. 내용물이 없는 빈손들이 한낱 껍질 혹은 허물로 화한 존재를 느끼게 하며, 그 실체를 결여한 공허한 주체, 익명적인 주체를 느끼게 한다. 늘어트려진 손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주술적이고 명상적인 계기로 유도하는가 하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즉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삶의 비의를 떠올리게도 한다.

송운창(물 - 꿈)은 거대한 크기의 수도꼭지 형상을 재현한 그 자체 평면성이 강한 입체조형물을 설치한다. 물을 소재로 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공간에 부착된 라인 형태의 은박지로써 물길을 형상화하는 한편, 수도꼭지 형상을 통해서는 물의 실체를 암시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암시되는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존재의 꿈이다. 그리고 그 꿈은 조형물의 표면에 콜라주 된 형형색색의 이미지들의 편린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환상적이고 발랄한 시각적 효과에 의해 강화된다.

정국택(비즈니스맨)은 스테인리스스틸을 소재로 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인의 초상이라 일컬을 만큼 정형화된 형태를 띠고 있는 편이다. 셀러리맨 혹은 비즈니스맨으로 나타난 그 초상은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며, 심리적이기보다는 물질적이며, 내면적이기보다는 외향적이다. 살아남기 위해 내달리는 그들의 질주는 그러나 상당정도로 희화화돼 있어서 그런지,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가볍기조차 한 그 초상은 나 자신의 모습이면서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로부터는 존재론적 무게로서의 좌표를 결여하거나 상실한 실존주의 이후의 인간(후기 인간)관이 느껴진다.
영상설치작업

양만기, 김지영, 이한수, 김창겸, 정정주 등의 작업은 이미 영상 그 자체를 빛의 한 형태로 보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빛은 빛 그 자체의 속성을 밝히기보다는 작가의 주제에 의한 매개체의 형태로서 현상한다.

이들 중 양만기는 도심의 야경(夜景)을 소재로 한 영상작업을 보여준다. 영상 속에서 야경은 마치 흐르는 듯한 불빛들의 비정형적인 편린들로 나타나고, 마구 흔들리고 움직이는 빛 드로잉의 무질서한 단편들로서 나타난다. 이는 비록 실제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영상 속에서의 야경은 그 실체를 잃고 다만 순수한 빛의 궤적과 속도가 그려낸 흔적으로 남겨질 뿐이다. 도심의 소음 역시 그 실체를 강화시켜주기보다는 이를 추상화한다. 거의 빛들의 향연을 연상시킬 만큼 현란한 불빛들과 더불어 도심의 야경은 추상화되고, 유혹적이고 야한 본성과 함께 마치 괴물과도 같은 이면을 드러낸다. 야경의 현란하고 화려한 불빛은 아이러닉하게도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상실감과 소외를 증명해준다.

그리고 김지영의 영상작업(부식)은 동남아의 유명 유적지 장면(앙코르와트인 듯)을 보여준다. 여러 연계된 장면의 편린들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 콜라주 된 화면에 등장하는 사원 속에는 거대한 나무뿌리가 들어와 있다. 이는 사원이 자연에 의해 침범 당한 것처럼도 보이고, 사원이 자연과 공생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사원은 더 이상 문명의 소산이 아니며, 그렇다고 자연의 소산도 아니다. 그 사원은 시간이 빚어낸 작품이다. 작가의 작업은 시간과 더불어 존재가 그 실체를 잃고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부식, 침식, 풍화, 산화, 기화, 그리고 특히 망각 등의 일련의 비의적 개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하면 이한수(레이저맨의 영적 운동)는 레이저맨이 숲 속에서 명상한다는 다분히 SF적인 가상적 시나리오를 연출해 보여준다. 그의 영적(靈的) 운동은 스크린 상에 재현된 서사적 상황을 벗어나서, 공간에 놓여진 이름 모를 행성이나 불가사리처럼 생긴,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기 발광성 물체(아마도 미확인생명체인지도 모를 일이다)와 교감된다. 그러나 이때의 교감은 레이저맨의 자력으로는 성사되지가 않는다. 관객의 개입으로 인해 교감이 가능해지며, 이는 관객의 움직임을 포착한 센서에 의한 발광성 물체의 순간적인 점멸로 나타난다. 관객이 레이저맨의 영적 운동 혹은 명상을 돕는 사실상의 매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가상적 캐릭터를 내세워 가상과 실제와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를 증언케 하며, 그 과정에서 관객의 개입으로 인해 비로소 작동되고 완성되는 상호작용성을 실현한 것이다.

김창겸(물 그림자 2)은 공간에다가 석고로 만든 돌확을 설치하고, 여기에다 수면에 비친 하늘과 수면을 들여다보는 사람 형상의 영상을 투사한다. 그리고 일정한 시차를 두고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질 때 나는 자연음을 증폭시킨 소리를 중첩시킨다. 더불어서 말해봐, 기억해? 가버려, 떠나지 마, 그러나, 보고 싶었어, 정말이야? 등등의 사적인 말들을 부가한다. 이 말들 자체는 구체성을 갖는 것이지만, 정작 그 의미는 수면에 돌을 던질 때 나는 증폭음 속에 해체되어 흩어진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불완전한 의미로 인해 진정한 소통이 단절된 인간의 실존을 다룬다. 그리고 이때 영상으로서의 수면은 일종의 자기 반성적인 매개체로서의 거울을 상징한다. 그 수면의 물결이 만들어내는 파문은 생생한가 하면 흐릿하다. 이는 결코 온전한 형태로 복원해낼 수 없는 불완전한 기억과 함께, 그 기억을 갉아먹는 시간의 폭력을 암시한다.

그리고 정정주(빌딩)는 장소 특정적인 작업의 사례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작가는 먼저 실제로 전시가 이루어지는 미술관의 공간 구조를 그대로 본뜬 합판이나 투명 아크릴 판 소재의 미니어처를 만든다. 그리고 미니어처 안쪽 천장 부분에다가 회전하거나 움직이는 소형 카메라를 설치하고, 그 카메라가 포착한 영상을 미니어처 외부에 따로 설치된 스크린에 투사한다. 이때 관객은 사실은 정교하게 재현된 미니어처의 내부 공간 장면을 마치 실재인 양 착각한다. 그리고 관객이 미니어처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그 속을 들여다볼 때, 이를 카메라가 미니어처의 내부 장면과 함께 포착해 보여줌으로써 처음의 실재감이 의구심으로 변한다. 공간구조와 특히 사이즈에 대한 선입견을 흔들어 놓는 이 작업은 사물에 대한 인식행위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사진설치작업

이상현, 금중기, 한기창 등의 작업에서 빛은 사진으로 나타난 주제의식을 보완하고 강조하는 심리적인 장치로서 현상한다.
이상현의 작업(자아이탈적 명상)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자아이탈에 대해 명상 중인 작가 자신의 초상사진을 보여주며, 이는 그대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 맞닿아 있다. 여기서 자아이탈은 진정한 나로 부를 수 있는 실체에 대한 회의이며, 이는 작업에서 여장한 남자의 형태로 나타난다. 나는 남자이면서 여자이기도 하고, 여자이면서 남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를 넘나드는 나는 누구인가. 남자와 여자란 한낱 사회, 제도, 관습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정체성의 이름, 그 실체가 없는 이름(허명)일 뿐인 것은 아닌가. 작가의 초상사진은 이러한 자기 외부로부터 호명된 정체성의 요구로부터 떠나있을 때, 비로소 남자도 여자도 아닌 진정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금중기의 작업(느슨한 충돌)은 사진과 설치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 이면에는 일종의 신화적인 상상력, 문명사적인 상상력이 깔려 있다. 가방과 목마 그리고 양철로 만든 물뿌리개 등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 자동차 미니어처와 소화기 등의 인공물들, 대중적인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불려나온 듯한 로봇과 캐릭터 인형들, 마치 박물학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 미니어처들, 그리고 여기에다가 먹다 버린 사과와 같은 유기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질적인 사물들이 우연적으로 결합돼 있다. 앤틱적인 감수성과 팬시적인 감수성이 충돌하고, 자연에 속한 것과 인공의 산물이 부닥친다. 이 모든 이질적인 것들의 우연한 결합이 상호간 영향사에 바탕을 둔 문명의 생리를 드러내며, 이로부터는 문명과 한 지층으로 중첩된 시간(역사)의 흔적을 엿보는 듯한 시적인 아우라마저 느껴진다.

한기창의 작업(뢴트겐의 정원)은 일종의 메디컬아트로 범주화할만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엑스레이 필름을 이용하여 식물 이미지를 재구성해낸 콜라주 작업으로서, 그 이면에다 조명을 설치한 라이트박스와 조합한 설치작업이다. 여기서 엑스레이 필름에 찍혀진 뼈는 죽음의 이미지를, 그리고 이를 조합하여 재구성해낸 식물 형상은 삶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죽음의 이미지와 삶의 이미지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화면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에서, 단순한 인생무상의 메시지를 넘어서는 화해의 몸짓이 읽혀진다. 또한 이 작업은 죽음의 계기 속에서 삶의 계기를 찾는다는 점에선 삶과 죽음이 서로 맞물려 있는 순환론적 생사관 혹은 자연관에도 그 맥이 닿아 있다. 어둠 속에서 발광(發光)하는 유기적인 형태가 이런 순환론적 관념에다가 일말의 존재론적 아우라를 부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