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의 한국현대미술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
한국현대미술은 1980년대 중반에 도입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90대년 이후부터 다양한 해석에 바탕을 둔 다원주의 경향을 보이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한 갈래가 정치적 담론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또 다른 갈래는 욕망이론에 바탕을 둔 몸담론의 형태로서 나타났다. 즉 오리엔탈리즘과 후기식민주의 논의, 신제국주의와 반세계화운동, 페미니즘과 퀴어 논의, 그리고 상황주의와 도시주의 논의 등의 정치적 발언을 세련화한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형태로 현상했으며, 그 이해관계가 현실참여미술 계열의 그것과 맞물렸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구조주의와 결합되면서 몸담론과 욕망이론, 그리고 해체론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재현과 서사 논의가 재조명되고, 회화와 사진에 이어 영상매체와 디지털매체가 그 논의를 견인하는 지배적인 시대양식으로서 자리 매겨진다.
이후 한국현대미술은 장르 중심에서 주제 중심에로(이는 큐레이터를 주축으로 한 각종 주제전과 기획전시가 활성화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순수미술 중심에서 순수이미지 중심에로(이는 특히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론에 관련된다)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형상성과 일상성 중심으로(이는 거대담론이 회의에 부쳐진 이후 미시담론과 개인서사의 보편화 현상과 맞물린다) 그 논의의 축이 옮아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거의 모든 면에서 모더니즘과는 비교되는 논리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보다도 탈중심, 탈장르, 탈형식과 같은 탈(脫)의 논리로 나타난다(물론 이런 탈의 논리는 탈형이상학, 탈미학, 탈정체, 탈경계 등의 논리도 있다). 탈의 이러한 논리가 모더니즘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라기보다는, 그 자체 모더니즘의 논리에 대한 반성의 산물인 것이다. 이 가운데 탈중심의 논리는 무엇보다도 중심과 주변부를 나누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 구분이 그 자체 필연적인 것이기보다는 순전히 인위적인 것이며, 게다가 기존의 틀을 공고히 하려는 이데올로기의, 이해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탈장르의 논리에는 장르적 특수성에 대한 반성이 내포돼 있다. 즉 모더니즘의 장르적 특수성에 대한 신념 자체를 장르 내적인 순수성을 강화하려는 배타적인 논리로 진단하고, 이에 대해 이질성과 비순수성을 대질시킨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탈장르이고 하이브리드이다. 그러니까 온갖 이질적인 불순물이 혼합된 혼성잡종인 것이다. 탈장르의 이러한 현상을 계기로 하여 고전과 현대의 만남이 이뤄지고(예컨대 크로스오버 음악과 팝페라와 같은), 조형예술과 인문학이 만나며(예컨대 학제간 연구 방식과 같은), 조각과 음악이 만난다(예컨대 사운드아트와 같은). 거기에는 어떠한 장르간의 위계가 없으며, 따라서 타 장르에 대한 배타적인 논리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수에 대한 신념과 맹신이 없다.
이는 그대로 탈형식의 논리에로 이어진다. 그리고 형식논리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 미술이 삶과 예술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심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모더니즘 논리가 예술을 삶의 현장성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 자체 순수지대로 보는 한편, 그 계기도 예술의 내적 논리 즉 예술 고유의 자율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지대에서는 창작 주체의 개성(아이덴티티)을 위한 자리마저도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런 도그마가 소위 고급예술의 순수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입한 순전한 자기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진단보고, 그 결과 예술의 장으로부터 배제된 삶의 현장성, 삶의 역동성을 복권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 무엇보다도 예술이 삶과는 무관하다는 가정 자체가 유아론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소위 형식실험으로 나타난 특정 형식에 대한 신념이나 새로운 형식에 대한 강박관념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것이 예술 표현의 자유로운 전개를 제약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렇듯 적어도 표면적으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환경이 여러 면에서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중심의 해체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허무는가 하면, 장르의 해체가 이질적인 영역들을 서로 만나게 하는 혼성잡종의 양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형식의 해체는 예술 표현의 자유로운 전개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처럼 중심과 장르 그리고 형식의 논리가 해체된 자리에는 삶의 현장성, 삶의 역동성, 주제와 내용이 들어선다. 따라서 최근의 전시 현실을 보면 장르나 형식에 바탕을 둔 형식논리 대신에, 서사에 바탕을 둔 주제와 내용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한편, 이미지는 생산하는 것이기보다는 소비하는 것이라는 식의 인식이 보편화되면서, 평단보다는 창작 현장에서 매핑, 서핑, 클리핑, 캡처링과 같은 덜 학문적이고 더 유연한 (준)담론들이 제안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가속화된, 그리고 논리적으론 탈맥락화와 재맥락화와 연관된 이 개념들 가운데 핵심개념은 아무래도 매핑일 것이다. 매핑이란 상호간 무관계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한자리에 그러모아 이를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편집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무분별한 것들에게 하나의 인위적인 질서와 체계를 부여해주는 고도의 인식론적 행위이다.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편집행위, 해석행위, 그리고 인식행위 등이 개입된다. 그 행위가 기본적으론 주체의 몫이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 이면에는 사회적 합의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기 마련이며, 이는 그대로 당대적인 에피스테메 즉 지식체계와 시대정신의 한 형태로서 나타난다. 관례, 관습, 제도 등의 사회적 관성과, 계보학, 계통학, 분류학, 통계학, 인종학 등의 학문적 체계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그리고 체계에 기여하는 맥락화의 논리와 체계를 해체하는 탈맥락화의 논리, 연속성의 논리와 불연속성의 논리, 무분별한 집합의 논리와 분별된 총체의 논리, 정체성의 논리와 차이의 논리, 정치학의 논리와 탈정치학의 논리 등이 이러한 인위적인 지식체계에 바탕을 둔 매핑 개념에 모두 맞물려 있는 것이다.
미술에서의 매핑은 미술과 인문학, 미술과 공학이 만나는 학제간 연구방식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니까 인체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정치학적, 지정학적 위치를 탐색하는 인체지도와 유전자지도, 과거에 속한 사건과 정서를 현재의 시점에로 불러오는 시간지도, 다양한 시점에서 본 공간지도의 형태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모두는 사실상 세계를 보는 다양한 관점과 세계에 반응하는 다양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관점과 태도를 반영하고 구축하는 인위적인 지식체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자체는 오브제의 생산과는 구별되는 인식론적 행위로서의 매핑이 현대미술의 한 실천논리가 되고 있음을 예시해준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이처럼 이전에는 없던 온갖 형태의 담론들이 전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장르비평으로부터 (사회)문화비평으로 옮아가는 최근의 비평의 추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 논의가 사실상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비엔날레와 대안공간
199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한 특징으론 전에 없이 국제적인 규모의 전시가 많아졌으며, 그 연장선에서 비엔날레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다. 이를 계기로 해서 세계화 담론과 범아시아주의 담론이 제기된 것도 이 시기의 한 특징이랄 수 있다.
현재 국내에는 광주비엔날레(광주), 부산비엔날레(부산), 미디어시티서울(서울), 이렇게 3개의 현대미술 비엔날레와 더불어서 세계도자비엔날레(경기도), 국제공예비엔날레(청주) 등의 2개 응용미술 비엔날레를 합쳐 총 5개의 비엔날레가 있다. 정치적인 목적이나 지자체의 이해관계와 맞물린 그 설립 배경은 도외시하더라도, 가히 국제적인 문화대국(?)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제는 양적 팽창이 아닌 질적 성장 위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겨야 할 것이다. 이 논의의 연장선에서 유래한 범아시아주의 담론은 지금까지 지구화와 세계화 담론을 바탕으로 한 서구 중심주의 사조를 전범으로 추종하던 행태에서 벗어나, 한중일의 3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권을 하나로 묶는 범아시아 중심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과 함께 그 실천방안을 모색한 경우로 보인다.
비엔날레를 계기로 해서 두드러진 현상으론 중국현대미술과 일본현대미술과의 교류가 전에 없이 활성화된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최근 수년 내에 활발하게 이뤄진 중국현대미술의 국내유치전은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현대미술의 잠재력을 재확인케 했다. 이와 함께 최근에 국내 화랑들의 중국 본토 진출이 눈에 띠게 활발해진 점 역시 주목된다. 2004년 따샨즈 798 지구에 한국의 문화교류공간 스페이스 이음이 개관한데 이어, 2005년 12월에는 차오양 주류공장지역에 아라리오베이징이 개관했다. 2006년 3월에는 지우창 예술단지에 표화랑이 갤러리를 열었으며, 금산갤러리와 갤러리아트사이드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화랑협회가 주축이 돼서 정부로부터 공적자금 5억 원을 출자 받아 현지에다가 전시 및 창작공간을 설립할 계획이 추진 중이다. 중국현대미술의 이러한 약진은 사회주의 리얼리즘미술의 오랜 전통을 발판삼아 이를 중국 고유의 정체성 문제와 연결시킨 소위 냉소적 리얼리즘의 독특한 형식화에 성공한 것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차후에도 중국과 한국의 현대미술 교류는 더 증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최근에 급부상하고 있는 일본 현대미술과 중국현대미술의 현실은 우리 미술문화 풍토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우호적인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범아시아주의 담론을 폐쇄적인 형태가 아닌, 유연하면서도 실질적인 논의로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서 199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관련한 특징적 사실로는 기존의 상업화랑이나 미술관과의 차별화를 표방한 각종 대안공간들의 등장을 들 수 있다. 1999년 쌈지, 루프, 풀, 사루비아다방 등이 개관한 이후, 연이어 아트스페이스 휴와 인사미술공간(약칭 인미공)이 그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일주아트하우스, 브레인팩토리, 팀프리뷰, 갤러리 정미소, 꽃, 프로젝트 스페이스 집(최근에 폐관) 등이 후발주자로서 대안공간을 표방했다. 이외에도 각 지역별 대안공간들로는, 공공미술 교육프로젝트와 같은 미술활동과 지역공동체 활동 간의 연대를 통한 실천논리에서 대안공간의 정체성을 찾은(이는 곧 지역성에 대한 모색으로 나타난다) 인천의 스페이스빔, 소위 대리보충공간을 표방한 안양의 스톤앤워터, 그리고 부산의 반디와 아트인오리(개별작가들의 집단 창작촌과 함께 별도의 독립 전시공간을 운영하고 있는)의 활동이 주목된다. 최근에는 주요 대안공간들(14개)을 하나로 묶는 식의 대안공간 네트워크가 발족하기도 했다.
이들 대안공간들이 그동안 한국현대미술의 지형도를 바꾸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으나, 근래에는 대안공간들의 제도권 편입이 뚜렷해짐에 따라 그 정체성을 재고해야 하는 시점에 이른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의 목소리도 있다. 즉 그 동안 신진작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프로그램은 각종 대안공간의 몫이었다. 그 전시 형태가 대개 비정기적이고 산발적인 양상을 보였으며, 이로부터 유래한 게릴라적인 역동성이야말로 이 전시들의 미덕으로 간주될 만했다. 이런 산발적인 전시 형태가 최근 들어 일군의 전시공간을 중심으로 정례화, 전략화, 체계화되고 있으며, 따라서 대안공간 자체의 정체성이나 위상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제 대안공간이 단순히 신세대 미술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각종 비엔날레형 전시의 산파 역할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심지어 대안공간 출신의 신진작가들을 상업화랑에조차 배급함으로써 점차 미술계 자체의 생리마저 변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대안공간은 그 정의에서 보든 본질에서 보든 변하는 것이 속성이다. 제도권 편입도 그 변화의 한 형태일 것이다. 여기서 대안공간의 제도권 편입 자체를 탓할 거야 없지만, 다만 신진작가를 발굴, 지원, 육성한다는 대안공간 본래의 취지가 변질되거나 퇴색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일상성 담론과 네오팝의 경향성
199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은 일상성과 일상사회학의 개념이 단순한 담론의 차원을 넘어 실제의 전시에 적용됨으로써 그 의미와 실천논리가 확대 재생산되었다. 주로 젊은 작가 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러한 현상은 일면적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 논리와 맞물려 있으며, 또한 종래의 팝아트가 확대 재생산된 네오팝(팝이란 말속에는 일상의 개념이 내재돼 있다)의 경향성과도 연관돼 있다.
이 일군의 작가들에게서 나타난 경향은 그 자체 달라진 삶의 풍속도를 대변해준다. 시대적 아이콘의 한 형식으로서의 캐릭터, 아바타와 같은 가상의 인격체, 픽토그램과 같은 이미지와 문자가 결합된 기호, 가상세계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흉내내는 코스프레 놀이, 놀이와 축제, 순수미술과는 구별되는 키치, 문신과 피어싱과 코스매틱(화장) 등의 몸에 대한 관심, 디즈니랜드 풍의 유아적이고 동화적인 환상 이미지에 대한 관심, 사실과 실제에 기생하는 가짜 서사 만들기, 코쿤족 혹은 히키코모리(자기만의 세계 혹은 자기강박에 사로잡혀 육체적으론 외부와 고립돼 있으면서, 가상현실을 통해서만 외부와 소통하는 이중적인 캐릭터), 키덜트, 코스튬, 트랜드, 홈리스, 게임아트, 간판, 쇼핑, 만화와 애니메이션, 디자인, 팬시상품, 그래피티(낙서화), 스프레이 그림, 스티커 그림, 포르노그래피, 스타쉽, 팬클럽, 페티시즘(물신주의에 대한 반응), 강박관념(채집과 집적), 그리고 각종 하위문화 그룹을 아우르는 등의 실로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처럼 동시대에 있어서의 팝아트는 기왕의 미술은 물론이거니와 인문학과 사회학 간에 그어진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을 친근하고 익숙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그 주제는 일상사회학의 광범위한 논의와 맞물려 있으며, 또한 서핑(사태의 본질 대신 그 표면현상에 감각적으로 천착하는)과, 매핑(기왕의 인식 틀에 자기를 끼워 맞추는 대신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식지도 그리기), 그리고 패러디(이미지 훔치기 혹은 이미지 재맥락화 하기)의 전략에 맞물려 있다. 미술과 대중문화가 교차하는 지점들을 영토화하면서, 그 각 지점들에다가 시대를 관통하는 아이콘을 세운다. 이것이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미적 감수성을 반영하는 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면, 사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 맞닿은 자기암시의 형태로 현상하기도 한다. 더불어 외관상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에서 의미를 위한 구실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는 식의 무의미한 놀이의 형태를 띠는가 하면, 사사로운 경험을 객관화하는 행위의 형태로 현상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9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특정적인 면으론 일상성이나 팝의 개념에도 맞물려 있는 것으로서, 사물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식의 형상미술과 회화의 복권이 뚜렷해진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마치 사진과도 같은 표면질감과 시점의 설정에 바탕을 둔 형상미술의 새로운 경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는 사실주의 회화의 제 경향들, 즉 인상주의 회화에 그 뿌리를 둔 구상회화와 아카데미즘 회화, 그리고 하이퍼리얼리즘과 현실에 대한 참여에서 회화의 당위성을 끌어낸 신형상미술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 도시적 일상에 대한 반응(중립적 입장 혹은 중성적인 감수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로 신세대 작가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이러한 팝의 신경향(네오팝)에 대해서는 어떠한 식으로든 동시대의 아이콘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상성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 미학의 또 다른 한 형태로 보인다. 다만 팝아트가 시대의 표면현상에 대해 반응한 것임에 반해, 리얼리즘 미학은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여러 억압적인 계기들을 주목하고 이로부터 현실에 대한 참여와 실천을 위한 구실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그 경계는 생각만큼 뚜렷하지가 않다. 즉 시대를 투명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반영한다는 반영이론은 리얼리즘 미학과 마찬가지로 팝아트에 대해서도 정당하다. 그러니까 팝아트는 시대의 표면을, 그리고 리얼리즘은 시대의 이면을 반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세미나 원고)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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