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조각
주로 인체를 소재로 한 구상조각은 아마도 조각가의 층이 가장 두터운 장르일 것이다. 인체야말로 가장 일상적인 소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본질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흔한 소재인 만큼이나 개성적 표현이 쉽지만은 않다. 작가들 중에서는 특히 전뢰진, 고정수, 최종태, 김효숙, 홍순모, 김주호, 한애규, 황지선, 김영원 등의 작업이 이러한 인체조각의 한계를 넘어 뚜렷한 자기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편이다.
이 가운데 전뢰진과 고정수의 조각은 한국적인 지역성과 특수성으로서의 전형적인 형식을 실현한 것으로 사료된다. 전뢰진의 조각은 인간과 인간의, 인간과 자연의 동일시를 보여주며, 애초에 그것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나무와 산, 구름과 식물 모티프 등의 자연 소재와 인간의 의미비중에 있어서 그 경중이 없다. 주체와 객체의 차별과 구분이 없다. 산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나무가 되며, 구름과 인체가 구분되지 않는 설화 혹은 신화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인간의 근원을 표현하기 위해 굳이 자연이라는 구분된 개념(인간이 대상화한 객체로서의 자연)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이상향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고정수의 조각은 청석 고유의 물성과 함께 특유의 돋을새김 효과가 두드러져 보인다. 모가 없는 풍만하고 둥그스름한 여체에 가해진 균질화된 표면 효과가 작품을 한눈에 읽히게 하는 통일된 시각적 경험을 유도하는 한편, 고요하고 정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그런가하면 최종태와 김효숙, 그리고 홍순모는 인체조각을 종교적이고 명상적인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명상에 잠기거나 기도하는 소녀상으로써 마리아를 암시하는 최종태의 조각은 고도의 추상적 형식, 사물의 본질에 근접하고 있다. 소녀의 실루엣(아우트라인)과 다소곳하게 감은 눈이 아니라면 거의 추상 조각과 구분되지가 않는다. 최종태의 소녀상이 금욕주의를 반영한다면, 김효숙의 조각은 감정의 표출을, 감정의 터짐을 반영한 것이다. 위를 향해 내민 왜곡된 양손이 신을 향한 작가의 염원과 갈망을 말해준다. 테라코타에 함부로 칼집을 내어 푹푹 떠낸 그리스도 상이 대속자(代贖者)로서의 신의 존재와 그 상처를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홍순모의 조각은 특히 그 발색 효과가 인상적이다. 잡석을 재료로 한 어눌한 듯, 무기력한 인물의 표정이 서민의 전형을, 그리고 지상으로 내려온 인간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김효숙의 그리스도 상과 맥락을 같이 하는 이 작품은 재료의 선택에서 이미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대속자 예수, 인간 예수의 본질에 이렇게까지 근접한 표현을 얻기가 아마도 쉽지는 않았으리라. 한낱 잡석 덩어리와 대속자 예수라니, 이 얼마나 절묘한 만남인가.
한편, 김주호와 한애규의 테라코타 작업은 일상성 담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김주호의 소탈하고 유머가 넘치는 다양한 인물조각들은 세상과 사람,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의 계기를 끌어내고 있다. 생활에서 발견한 일상의 표정을 해학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때로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날카롭게 사회 현실을 풍자한다. 그리고 한애규는 흙이 갖는 소재의 자연스러움과 친근함 그리고 고유의 가변성에 착안하여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재정의되는 변화무쌍한 여성의 삶을 테라코타 조형작업으로서 형상화한다.
현실주의조각
현실주의조각은 예술을 정치적인 도구화 혹은 쟁점화한 1980년대를 그 배경으로 하며, 이때의 현실주의는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즉 사실주의가 사물, 세계, 대상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모사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현실주의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식과 실천논리로서 나타난다. 대략 강관욱, 류인, 임영선 등의 작업이 이러한 현실주의를 실천논리로까지 발전시킨 예를 보여주고 있다.
강관욱의 작품은 철저하게 현실에 연유한 슬픔을 자아낸다. 볼품없이 축 늘어진 가슴을 노출시킨 채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외면하고 있는 주름투성이의 늙은 여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무엇을, 누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테라코타 특유의 황토 빛 발색이 흙의, 대지의 속성과 어머니를 일치시키고 있다. 밭고랑을 닮은 짙게 패인 주름위로 흘러내린 슬픔이 윤기를 잃은 젖꼭지 위에서 말라버린 듯하다.
그런가하면 인체 모델링의 상식을 깨트린 파격적이고도 충격적인 류인의 인체조상들은 현대인의 억압된 심리를 그로테스크하게 표출한 것으로 평가된다. 류인의 조각은 김복진과 권진규에 이어 인체를 소재로 한 형상조각의 연장선에 있다. 페이소스의 표출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의 조각에서 류인은 특히 권진규와 비교된다. 권진규의 조각이 페이소스의 내면화를 통해 자기 투시를 꾀했다면, 류인의 조각은 전적으로 자기 외부를 향해 열려있다. 즉, 절제와 거두어들임보다는 마치 자기 외부를 향해 내지르는 듯한 과장과 왜곡을 보여준다. 걷잡을 수 없는 분출에 가까운 그의 인체 형상 조각은 인체가 갖는 표현 가능성에 대한 그의 뚜렷한 확신을 말해준다. 존재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는 과장된 몸짓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인체의 해부학적인 정확성을 견지한 그의 작업은 삶의 실재에 밀착해 있는 리얼리티의 한 전형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추상조각
비구상조각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추상조각은 그 범위가 비교적 넓고 두터운 편이다. 실재를 추상화하는 방법과 정도가 가변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실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실재의 본질에 천착하는 환원주의적 형태를 띠기도 한다. 대략 정광호, 홍승남, 이상봉, 원인종, 박충흠, 엄태정, 임동락, 심재현, 김청정, 정관모 등의 작업이 추상조각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정광호의 작업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선 정통적인 정물의 개념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원래 속이 꽉 찬 사물을 비워냄으로써 실재에 대한 위반을 꾀한다. 가녀린 동선을 엮어 만든 구조물에서의 동선은 사실은 항아리의 표면에 난 크랙을 재현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은 속이 빈, 표면적으로만 존재하는 사물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 이면에는 전통적인 공(空)개념에 대한 공감이 놓여 있는데, 이로부터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한 상호 포괄적이고 양가적인 개념이 느껴진다.
홍승남의 작업은 적어도 외관상 보기엔 속이 꽉 찬 덩어리로서, 미니멀적이고 기하학적인 형상화에 바탕을 둔 정통적인 모더니즘 조각 개념에 충실한 편이다. 군더더기 없는 정형화된 형태로부터 인위적인 질서의식과 함께 일종의 금욕주의마저 느껴진다. 또한 이상봉의 작업은 외관상 기둥의 형상을 보여주는데, 기둥으로부터 매스를 들어내고, 대신에 이를 선조로 나타난 최소한의 구조(골격)로 축약 표현하고 있다. 선조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그의 작업에서는 사물과 대상의 기하학적인 환원이 느껴진다. 기둥 형상은 그 이면에서 오벨리스크와 토템폴에 투사된 신화의 흔적(땅과 하늘,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원인종은 용접으로 철선들을 연이어 붙여나가는 방법으로써 평면의 판들을 만들고, 그 판들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천장에다가 매단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구조, 판과 판 사이의 틈을 통해서 공간에로까지 확장되는 구조를 드러내 보인다. 그 틈으로부터는 일종의 긴장감과 함께 상대적으로 절제된 방식과 태도가 느껴진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막힌 구조와 열린 구조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상호작용성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박충흠은 용접을 이용해 동판을 이어 붙이는 방법으로써 종(사실은 종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이나 돔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태의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 여기에다 조명을 끌어들여서 용접할 때 생긴 동판간의 이음새 부위로부터 빛이 흘러나오게 한다. 이로부터는 정적이면서도 명상적인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고, 자연의 순환적인 질서와 구조가 환기된다. 이는 그 동안 작가가 천착해온 기존 조각의 형식(대지와 섬을 추상화한)을 일정부분 보존하면서도, 빛과 공간의 상호침투라고 하는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여서 조각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성조각
물성 즉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성질이야말로 양감(덩어리)과 함께 환원주의와 본질주의에 천착한 모더니즘 조각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일 것이다. 말하자면 재료적 특질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조각적 상황을 실현한 것이다. 작가에 따라서 재료 그 자체가 제시되기도 하고(이를 즉물적인 조각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더러는 여기에다가 최소한의 구조적인 접근과 해석이 더해지기도 한다. 대략 최인수, 강진모, 박석원, 심문섭, 문인수, 이수홍 등의 작업이 그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주철과 석고 덩어리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놓여진 최인수의 작업이 주는 인상은 무덤덤하고 심심하다. 그만큼 그 속성이 자연을 닮았다. 인위적인 흔적이래야 주형 과정에서 생긴 이음새 정도이다. 그 이음새마저도 인위보다는 자연에 가까운 양 보인다. 그래서인가, 이 물질 덩어리에서 마치 태고의 바람소리라도 들려오는 듯하다. 그 소리는 주철과 석고를 잉태한 점토로부터, 흙과 대지의 생명력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바닥에다가 점토 덩어리를 굴리는 작가의 신체적 행위와 주철의 표면에 난 녹의 진행과정이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순환 원리로 대변되는 자연의 섭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하면 순백색의 석고 덩어리는 자연을 질료적 차원으로부터 순수한 정신의 실체로 전이시킨다. 이로써 작가는 흙으로부터 유래한 삶의 근성을 자연의 원형(原形)으로 이해하는 한편, 자연의 순환원리로서의 원형(圓形)의 상징적 의미를 실현한다. 참고로, 최근에 작가는 조각의 본질이랄 수 있는 물성과 양감을 비워내는 일종의 탈 조각으로써 자신의 전작에 대한 일종의 반성적인 과정을 실현해 보여주기도 한다.
강진모는 자연에서 채집한 돌을 컴퓨터 커팅 기법에 의해 정교하게 잘라내는 방법과 과정으로써 기하학적이거나 정교한 구형의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그 형상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돌 파편들)을 버리는 대신에, 그 편린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여 그 원형을 복원해서, 이를 처음의 형태와 짝을 이루게 한다. 이렇게 제시된 두 개의 형상은 마치 형상이 돌덩어리로부터 빠져나간 일종의 거푸집을 떠올리게 한다. 두 개의 형상이 사물의 겉과 속을 각각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서로 종속관계가 아닌 등가치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작가는 겉과 속, 안과 밖, 음과 양으로 대변되는 이분법적인 구조(물질구조와 사유구조)가 원래는 하나였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설치미술
설치미술은 그 자체 독립된 장르라기보다는 기존의 장르들이 해체되고, 그렇게 해체된 장르들이 서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한 현상인 것이다. 이는 설치미술이 작가들의 개별적인 성향과 맞물려 있는 것이며, 그만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또한 설치미술은 동시대적 현상이며 현재진행형의 열려진 개념인 만큼 작가들의 폭도 넓은 편이다. 설치미술은 비디오와 컴퓨터 등의 각종 첨단매체와 결합하거나(영상설치미술), 자연을 배경으로 전개되거나(자연설치미술 혹은 생태미술), 도시를 배경으로 전개되거나(도시주의 혹은 상황주의미술), 행위와 개념 그리고 과정과 아카이브가 강조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개념주의미술). 미술관이라는 특정 공간에 한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이는 각종 재개발 프로젝트와 현장 작업에 바탕을 둔 장소 특정성 개념으로 나타난다), 전통적인 공간 개념에 시간 개념이 결합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상호작용 개념이 적용되기도 한다.
영상설치미술
영상설치미술은 단순히 영상만을 보여주기보다는(다큐멘터리와 싱글채널비디오), 영상과 오브제가 결합된 형태로서 나타난다(비디오조각). 대략 박현기, 육근병, 육태진, 김창겸, 정정주 등의 작업에서 그 예를 접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박현기는 한국 비디오아트의 실질적인 선구자로서 평가된다. 그의 첫 비디오아트는 1977년 대구의 K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15분짜리 기록비디오 작품으로서, 국내 최초의 비디오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수면에 비친 조명기구의 그림자를 기록한 비디오 작품으로서, 화면은 수면의 파동에 따라 형태가 일그러졌다가 다시 본래의 형상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이외에 그의 주요 작품을 보면 실제의 돌과, 그 돌을 기록한 모니터를 한 무더기로 쌓은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을 선보인 바 있으며, 또한 낙동강 변에서 기록한 비디오 작업에서는 물 속에 거울을 수직으로 세워 그 표면에 비친 물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거울과 물의 상호 반영성을 통해 실제와 이미지와의 경계가 지극히 애매한 것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 박현기 비디오 작품의 수작이랄 수 있는 만다라 연작(불상과 포르노그래피를 결합한)에서 작가는 인간 내면의 욕망을 통해 종교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확인해 볼 길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무덤을 연상시키는 봉분 형태의 구조물 속에다, 사람의 깜박거리는 눈 영상의 모니터를 내장한 육근병의 작업은 한눈에도 기념비적인 인상을 준다. 여기서 눈은 인간의 실존을 함축하고 있는 삶과 정신을 상징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을 시각적인 기호로 환원한 것이다. 그리고 봉분은 죽음과 자연 그리고 터(마당 혹은 장)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삶과 죽음, 정신과 자연이 교차하는 생명의 장을 함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이분법적인 것들을 봉합시켜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종의 주술적인 치유과정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의 그의 작업은 눈이 갖는 이러한 상징적 문법으로부터 점차 인류의 역사와 생존의 문제에 대해 논평하는 더 복합적이고 서사적인 문법으로 옮아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대개 터널 속을 걷거나, 길을 건너는 보행자로 나타난 육태진의 비디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착민과 비교되는 유목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대변해준다. 여기서 터널과 길은 삶의 알레고리에 다름없으며, 또한 터널과 길을 건너는 행위는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이로써 작가는 통과의례와 관련된 신화적 의미 즉 정화의식과 거듭남의 상징적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이러한 표면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인물들이 어떤 궁극적인 지향점(예컨대 목표 같은)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처럼 엉거주춤한 인상에서 동시대의 인간 실존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느껴진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라는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김창겸은 실물을 주물로 떠낸 석고 모형과, 똑같은 실물을 영상으로 담은 화면을 오버랩시킨다. 그리고는 작업에다 서사를 도입한다. 이를테면 공간에다가 석고로 만든 돌확을 설치하고, 여기에다 수면에 비친 하늘과 수면을 들여다보는 사람 형상의 영상을 투사한다. 그리고 일정한 시차를 두고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질 때 나는 자연음을 증폭시킨 소리를 중첩시킨다. 여기에다 말해봐, 기억해? 가버려, 떠나지 마, 그러나, 보고 싶었어, 정말이야? 등등의 사적인 말들을 부가한다. 이 말들 자체는 구체성을 갖는 것이지만, 정작 그 의미는 수면에 돌을 던질 때 나는 증폭음 속에 해체되어 흩어진다. 이렇게 작가는 불완전한 의미로 인해 진정한 소통이 단절된 인간의 실존을 다룬다. 그리고 이때 영상으로 나타난 수면은 일종의 자기 반성적인 매개체로서의 거울을 상징한다. 그 수면에서의 물결이 만들어내는 파문은 생생한가 하면 흐릿하다. 결코 온전한 형태로 복원해낼 수 없는 불완전한 기억과 함께, 그 기억을 갉아먹는 시간의 폭력이 느껴진다. 그의 작업은 사적이면서 시적이다.
정정주는 장소 특정적인 작업의 사례를 보여주는 작가이다. 전시 전에 실제로 전시가 이루어질 미술관의 공간 구조를 그대로 본뜬 합판이나 투명 아크릴 판 소재의 미니어처를 만든다. 그리고 미니어처 안쪽 천장에다가 회전하거나 움직이는 소형 카메라를 설치하고, 그 카메라가 포착한 영상을 미니어처 외부에 따로 설치된 스크린에 투사한다. 이때 관객은 사실은 정교하게 재현된 미니어처의 내부 공간 장면을 마치 실재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관객이 미니어처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그 속을 들여다볼 때 이를 카메라가 미니어처의 내부 장면과 함께 포착해 보여줌으로써 처음의 실재감은 의구심으로 변한다. 공간구조와 특히 실재 크기에 대한 선입견을 흔들어 놓는 이 작업은 사물에 대한 인식행위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자연설치미술 혹은 생태미술
자연설치미술은 그 속에 자연과 생태, 그리고 환경의 개념이 함축돼 있다. 이 개념들은 편의상으로만 구분할 수 있을 뿐, 사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어서 그 경계가 불투명하다. 또한 일각에서는 자연설치미술을 인간의 삶과는 동떨어진 자연에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시각이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삶은 상호 내포적인 관계에 있고, 또한 대부분의 현대인의 삶은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관이며, 따라서 자연설치미술에는 자연의 자족적인 존재(자연의 본성, 자연의 원형)와 함께 삶의 현장 속에서 삶의 일부로 편입된 변형되고 변질된 자연이 포함돼야 한다.
창작 현장에서 자연은 대지미술처럼 조형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는가 하면, 생태미술처럼 생리적인 개념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조형적인 수단으로서의 자연(관)과 생리적인 개념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관)은 서로 상당부분 겹쳐진다. 또한 대지미술은 조형성을 그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왕의 조각과 설치미술의 연장선에 위치해 있으며, 때로는 아이디어의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선 개념미술의 한 부류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장소특정성이 강조되기도 하고, 작업이 일시적으로만 존속됨으로 인해 기록에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이는 기록물과 작품이 동일시되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한편, 생태미술은 자연의 본성에 작업을 일치시키는 경향을 띤다. 이를테면 자연으로부터 취한 소재로써 자연의 습성을 좇아 형태를 만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썩어서 마침내는 소멸되고 마는 리사이클링의 형태를 띠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생태미술에서는 프로세스 아트와 생물학적인 변태,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작업의 실질적인 변화(예컨대 광물질 소재의 부식과 유기적인 소재의 부패 등의), 그리고 이에 따른 작업의 자연스런 소멸이 중시된다. 국내 최고의 야외설치미술운동 그룹인 야투를 전신으로 한 금강국제자연비엔날레, 그리고 겨울 대성리전의 바깥미술회 등의 그룹과 함께 김주연, 박혜수, 홍현숙, 신현중 등의 작업이 그 적절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설치미술은 김주연의 작업에서 일종의 살아 있는 미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숙 異熟>(2002)으로 명명된 작업에서 식물의 생장을 통해 생태계의 성장과 소멸에 이어진 일련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한편, 이를 여성의 성적 정체성에 결부시킨다. 그러니까 그 자체 여성성의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는 순백의 웨딩드레스의 표면에다 각종 식물들의 씨앗을 일정한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심어 그 생장하는 과정을 가시화한 것이다. 이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원래의 하얀 의상은 녹색으로, 그리고 점차 죽은 식물들로 인해 갈색으로 변화해간다. 씨앗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심어짐에 따라서 녹색의 표면과 갈색의 표면이 공존하는, 생장과 소멸이 공존하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예시한다. 여기서 드레스 자체는 여성의 몸이 연장된 것이며,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기 위한 대지를 대신한 것이며, 이로써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생명원리에 연루된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드레스는 생명을 위한 숙주, 자기희생을 통한 모성의 상징적 의미를 함축한 것이다.
자연설치미술이 박혜수의 작업에서는 인간의 시간과는 비교되는 자연의 시간을 기록하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횡단면으로 자른 나무둥치의 표면에 난 나이테의 문양을 따라서 돋보기로 선을 그리는 것이다. 산발적인 햇빛을 한 점에 모아들이는 돋보기로써 그린 그 그림은 실상은 햇빛이 그린 그림이며, 여기서 작가는 단지 자연의 본성이 드러나도록 돕는 조력자 혹은 매개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업을 위해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서 작가가 신체의 움직임을 맞춰야 하는데, 이때 그 결과로서의 나이테로 그려진 드로잉의 길이는 그대로 태양의 길이에 일치한다. 태양의 움직임을 쫓는 작가의 신체의 행위가 중요한 과정으로서 드러나고, 이는 그대로 결과와 함께 과정이 강조되는 프로세스 아트의 일면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작가는 이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낱낱이 기록한다. 순서대로 배열된 사진에는 자연스레 계절의 변화가 담겨 있으며, 그 자체 일종의 색 띠의 조형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연과 더불어 작가가 보낸 시간을 기록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사사로운 일기, 일지의 성격마저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홍현숙은 흙이 내재한 생명력을 일종의 사회학적 기호인 옷과 결합시킴으로써(옷의 층과 흙의 층을 마치 지층처럼 중첩시킨 작업) 자연의 잠재 에너지를 표출하거나 자연 에너지를 사회학적 맥락으로 전용한다. 그리고 양서류 동물인 도롱뇽을 소재로 하여 생명과 환경에 대해 발언하는 신현중의 작업 역시 이러한 생태 담론에 맞닿아 있다.
개념미술의 한 형태로서의 설치미술
홍명섭, 안규철, 박이소의 설치미술은 일종의 횡단적 연계성 개념(그 자체 비결정성을 향해 열려있는)을 수행하는 실천논리의 사례를 보여준다. 예컨대 홍명섭은 전시장 바닥에다 끈을 이용하여 가상의 원고지 형태를 재구성하고는(작가는 심지어는 계곡과 같은 의외의 장소에다가 이를 설치하기도 한다), 관객들로 하여금 그 격자무늬로 된 칸들 속을 거닐 수 있게끔 한다. 일종의 끈 드로잉인 셈이다. 여기서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가상의 빈 원고지는 말할 것도 없이 관객 각자가 메워나가야 할 백지 상태의 삶을 암시하며, 원고지를 구성하고 있는 연이어진 격자들은 삶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계기들을 암시한다.
그런가하면 안규철은 연이어진 문으로 연결된 49개의 방을 보여준다. 여기서 49개의 방은 작가의 개인적인 정황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사실상 그 방의 숫자엔 의미가 없다(이는 다만 무한정 연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해 줄 따름이다). 끊임없이 이어진 똑같으면서도 다른 방들이 삶의 서사를 상징하며, 그 방들만큼이나 많은 주체의 다중성과 우연성을 암시한다. 더불어서 바닥없이 매달린 방을 형상화한 작업에서 작가는 부유하는 주체, 특정의 정체성으로 결정되지 않은 주체, 가변적인 주체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밑바닥이 없는 방처럼 주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전제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대신 주체는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논리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에 대한 박이소의 관념은 결과로서의 조형적인 성과보다는 예술이 생산되는 과정, 예술이라는 관념 자체, 예술이 작동되는 방식, 그리고 정형화된 예술 관념이 간과하고 있는 여러 가능성에 맞춰져 있다. 합판, 콘크리트, 철근, 시멘트, 각목, 골판지 박스, 그리고 심지어는 은박지 등의, 거의 원자재에 가까운 재료를 써서 미처 마감되지 않은 비결정의 공간을 연출하는 작가의 작업은 모든 목적지향성을 임의적이거나 한시적인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그럼으로써 현대인의 유목적인 삶을, 그 불안정한 존재를 은유한다. 조형적인 선입견을 갖고 그의 작업을 보면, 미처 마무리가 안 된 일차적 재료의 설익은 구축이나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작가는 이런 비결정의 구조화를 통해 조형물과 예술에서의 목적지향성, 그리고 완결(완성)의 개념과는 다른 지점에서, 특히 모든 시스템화의 기획을 무효화하는 (우연성의) 놀이를 실천하는 것에서 예술의 존재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몸(김일용), 페미니즘(윤석남), 유목주의(김인경, 김주영, 정재철), 퀴어(오인환), 인형 혹은 사이보그(노진아) 등의 주요 개념 혹은 담론들이 조각의 의미지평을 확장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 계간조각 2006,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