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의 기하학적 구조인 그리드는 자아를 표상하는 패턴이 되어 조명에 의해 분산되거나 집중된다. 조명이 관통하는 반투명의 부조적 인체는 무한한 반사면의 유희를 보여준다. 벽에 반영된 그물망들이 본체보다 대상을 더욱 현실감있게 그려내기도 하면서, 환영과 대상 사이의 간격을 소멸시킨다. 2000년대 초기의 작품인, 달리는 말들은 그리드 망이 풀려서 꼬리와 갈기가 된다. 코드인 망이 실재가 되고, 실재가 망이 되는 상호순환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실제와 허구, 안과 밖의 구별은 커뮤니케이션 코드가 자아내는 효과 속에서 사라지고 있으며, 몸에 대한 감각 역시 희미한 조명발 아래서 흔들거린다. 여기에서 인간은 마크 포스터가 묘사한 정보양식 속의 인간처럼, 어떤 정박점도 식별가능한 중심도 명백한 경계도 갖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어떤 시기에 전형적이었던 인간상이 사라지는 징후이다.

박성태의 근작은 사이버 공간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표현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주제는 요즘 작품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가진 이전의 작품에서도 감지된다. 가령 1997년에서 2000년대 사이의 작품에서, 그는 토기 속에 담긴 액체나 흙 속에서 익사하거나 파묻히는 듯한 아이를 표현했는데, 이는 옹관묘나 출토지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죽음을 연상시킨다. 2000년대 이후의 철망 설치물에서도 길고 좁은 원통 안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아이들을 표현한 바 있다. 90년대 말 도자기 접시에 산화철로 그린 초상들이나 망친 도자기에 그려진 아이들, 불에 태워진 듯한 형상들 역시 죽음의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옛 작품에서 수많은 얼굴이나 가면들 역시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같은 양상을 지닌다. 그것은 얼마 전 우리의 근대사에서도 일어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집단 학살극에 대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죽음은 집단적이고 익명적이다.
요즘은 설치 작품에 주력하고 있지만, 회화와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의 초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들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지속되는 주제가 감지된다. 가령 화선지에 수묵담채로 그린 나목들이나 닥나무로 만든 노가리 등은 죽음에 대한 비극적이거나 풍자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며, 1980년대에 수묵으로 그린 신랄한 표정의 인간상 역시 낙관적이라 할 수 없는 세계관이 내비친다. 여러 매체를 통과하면서도 지속되는 인간이라는 형상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고통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밝은 면, 가령 계몽주의 시대 이래의 자유와 초월로서의 인간적 주체는 사정없이 뭉개진다. 이러한 경향은 초기의 어두운 표현주의적 경향에서 불확실성을 게임 규칙으로 삼는 새로운 생태계에 대한 관심으로 이전되고 있다. 망으로 조직된 인간은 배후의 규칙적인 그리드 구조와 동질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체계의 산물로서의 인간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환경과 인간은 구조적 동일성을 가지면서 투명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조명장치의 도움을 받은 극적인 환상은 빈틈없이 구조화된 체계의 허무함을 예시한다. 모든 체계화는 불확실성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체계화가 진행될수록 불확실성은 커지기 마련이다. 체계의 합리화는 오히려 체계를 해체시키는 것이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불가능한 교환]에서 현대세계의 불확실성은 세계가 어디에서도 자신의 등가물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의 현상은 어떤 궁극적인 합목적성과도 교환될 수 없다. 그러나 정보과학을 매개로 한 전면적인 체계화는 완전한 정보에 대한 환각, 요컨대 모든 물질이 에너지가 되고, 모든 에너지가 정보가 되고, 언어 속의 모든 것이 기표가 되고, 모든 유전자가 조작가능한 것이 되고, 모든 것이 자아의 의식에 접근하기를 바라는 환각을 유포한다.
완전한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는 통합과 균일화는 동시에 분리를 가속화시킨다. 코드를 통한 통합은 소외와 차별, 그리고 항시적인 전쟁 상태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박성태의 작품에는 전면적인 코드화 및 체계화 뒤에 숨은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있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죽어갈 뿐 아니라, 죽음자체가 사라져간다. 또한 그의 작품은 고화질의 매체 속에서 사라지는 실체와 육체를 보여준다. 가상화된 스크린처럼 연출된 작품에서 실재는 흔적으로 존재한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가상현실은 세계를 인위적인 복제물과 교환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전면적인 체계화는 타자를 축출함으로서 완전한 동일성의 논리에 함몰된다. 그의 작품에서 현대인은 완전한 주체, 타자없는 주체가 되며, 그것에 의해 실현된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그리드로 대변되는 엄격한 좌표체계의 산물인 몸, 그리드 구조 위에 떠 있는 조각난 신체들은 가상현실에 의해 식민화된 육체의 운명을 그린다.
가령 박성태의 작품에서 인간상은 그리드로 이루어진 거미줄에 사로잡힌 희생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몸은 체계화 동일화되는만큼 죽음의 이미지를 걷어낼 것이다. 그곳에는 이미 죽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적 체계, 즉 끊임없는 동질적 세계를 구성하는 복제는 몸이라는 실체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육체는 보드리야르가 묘사하듯, 관능적이고 성적인 불확실성으로부터 해방된 육체, 유기적 감수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촉각으로 알 수 있는 얇은 막과 피부처럼, 스크린으로부터 만들어진 깊이없는 가상적 육체이다. 성급한 기술지상주의자들은 정보와 물질을 혼동하고, 기계적 지능이 모든 물리적 기반과 모든 감각적인 지시대상에서 분리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체계의 덫에 걸려 고통과 쾌락으로 몸부림치는 듯한 박성태의 작품은 체계가 식민화할 수 없는 최후의 나머지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 미술과 비평, 2006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