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조각가 김무기의 작품에서 나무는 그의 작업 및 전시 경력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뿌리, 줄기, 가지로 구별되는 나무와 비교해 보면 줄기쯤에 해당되는--을 차지하는 주제이다. 나무 시리즈는 2000년대 초부터 주요 전시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최근의 전시에서도 진행되고 있는 작업이지만, 일관되고 응집된 주제를 이루고 있으므로,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라는 주제가 최초로 집약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일민미술관에서의 전시인 [세상의 나무](2002년)이며, 2004년 아트포럼 뉴게이트에서 있었던 [중얼거리는 나무], 그리고 2006년에 아트사이드에서 열린 [말하는 나무]에 이른다. 이 글은 최근 몇 년 동안에 있었던 세번의 개인전에 나타난 나무 시리즈를 중심으로 김무기의 조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김무기의 나무 시리즈에 결정적인 영감을 준 것은 1991년에 운주사에서 본 정자나무였다. 사당 입구에 서있는 수령 500년이 넘은 나무는 물리적으로 강력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작가는 자신 이전에도 있었고 자신 이후에도 남아있을 그 광대한 시간성에 압도된다. 나무의 경이로운 생명력은 그 앞에 선 인간에게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평온한 안정성을 넘어 신령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기는 나무는 문명의 부박함 및 인간적 삶의 불안정성과 대조를 이룬다. 그곳에서 찍어온 사진은 작업실에 붙여놓고 무의식 속에 묻어놓고 있다가, 10여년이 지난 후에 그 나무에서 느껴진 에너지를 작품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는 파주에 있는 작업실 마당 한가운데 나무를 심어놓고 늘상 나무와 소통하고자 한다.

스테인레스 철이라는 금속성 재료로 재구성한 김무기의 나무는 나무 특유의 자연스럽고 따뜻한 느낌 대신에, 인공성과 차가움이 두드러진다. 그는 관념론이나 지적 사기로 귀결되기 십상인 ‘자연’과 ‘무위’ 대신에, 엄격한 형식미와 중노동을 선택했다. 몸통과 가지를 일일이 용접하여 붙이는 강도높은 노동을 통해 자연의 나무는 인공적인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다. 금속성 재료는 나무의 속성 중 하나인 지속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살아있는 유기체를 광물질로 고정시킨 것과는 거리가 있다. 설치와 조명에 의해 질감이 살아나도록 복잡하게 용접한 가지 부분과 가지들 안에 설치한 영상물이 잠재적, 또는 명시적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도금 상태나 조명에 따라 금빛과 은빛이 감도는 금속나무들은 태양과 달빛 아래 빛나는 듯한 나무를 표현하며, 태양과 함께 공간성이나 지식을, 달과 함께 시간성이나 생명이 강조된다. 나무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을 통해 나무의 다양한 측면이 포착되어있지만, 그것이 나무에 대한 자연과학적, 형태적 탐구같은 것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중얼거리는...’, ‘말하는...’이라는 작품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김무기는 기념비적인 형태 못지않게 나무가 가지는 시간성과 서사narrative의 측면을 강조한다. 어디까지나 나무와 인간, 더 나아가 자신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열매처럼 매달린 작은 LCD 모니터에서 나오는 영상은 관객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오고, 마주선 거대한 형태에 활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영상의 내용은 나무의 존재 만큼이나 쿨cool하다.

그의 작품은 인간을 강조한 나머지 단순히 인간의 대역을 맡은 나무의 상투적 묘사로부터 벗어나는, 존재의 낯선 면모가 드러나 있다. 우선 금속으로 된 유기적 형태가 그러하고, 영상을 비롯하여 나무에 부가되어 있는 여러 형태들도 인간의 세계와 관련된 것들이면서도 기계의 눈으로 포착된 장면들이다. 대개 주변의 숲에서 카메라를 들고 걷거나 몸이 움직이는데로 촬영한 것이다. 속도만 조정하고 편집을 최소화한 화면은, 행동하면서 찍은 영상의 흔들림이 그대로 남아있곤 한다. 그것은 인간의 눈을 중심으로 채집 및 구성된 것이기 보다는, 폐쇄회로 영상처럼 다소간 무작위적이다.

놀고 먹고 자는 모습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도 담겨있다. 여기에는 인간적이거나 신화적인 이야기의 특징인 드라마틱한 사건보다는, 쳇바퀴 돌듯 하는 삶, 기계적이고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지만, 세대를 거듭하여 반복되는 보편적 삶이 영상에 담겨있거나 금속판으로 오린 기호화된 형태로 배치되어있다. 무심하게 지나가는 수많은 기록의 목록에는 박물관이나 모니터가 걸려있는 바로 그 작품도 있는데, 예술작품 역시 세계의 보편적인 삶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무는 자신을 둘러싼 크고 작은 역사적, 생태적 환경을 자신의 몸통 안에 소리없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2. 세상의 나무; 2002-2003년
2002년에 열린 일민미술관에서의 전시 [세상의 나무]는 기념비적인 형태의 금속 나무형태를 선보였다. 높이가 4미터가 되는 작품 [그들의 정원]은 스테인레스 철사를 용접하여 육중하고 볼록한 줄기 위로 뻗은 나뭇가지 안에 있는 5대의 모니터에서는 작업실 주변의 숲 풍경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들의 중얼거림]은 비스듬히 누워있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큰 스케일의 작품이다. 그것은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숲길을 걷는 산책자의 시점이 영상으로 나오는 모니터들이 달린 작품으로, 실제의 나무를 깍아서 알루미늄으로 캐스팅한 것이다. 관람객의 키를 훌쩍 넘는 기념비적인 크기는 실제의 축소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작품의 특성을 거슬러, 큰 나무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을 전달하려 한다. 나무는 대지 깊숙히 육중한 몸체를 뿌리박고 창공의 바람 속에서 살랑거리는 듯한 빛나는 잔가지들로 되어있다.

특히 배가 불룩한 바오밥 나무처럼 생긴 [그들의 정원]은 신령스러운 기운이 담긴 고목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관객에게 자연 및 우주를 압축한 상징처럼 다가온다. 자크 브로스는 [나무의 신화]에서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총체를 단일한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시키는데 있어 나무만큼 훌륭한 상징은 없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신화나 자연과학적 사고에 있어 자연은 식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신화학자 엘라이데 역시 주기적으로 재생하는 나무가 생명의 질서 속에 내포된 성스러운 힘을 표명한다고 말한다. 나무라는 실재는 자신과 동일하게 무한히 지속해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기적이고 순환적인 형태로 생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는 살아있는 현실, 주기적으로 재생되는 삶의 표명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김무기의 나무는 고대부터 숭배되었던 우주목(宇宙木)의 면모가 있다. 우주목은 ‘자연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이며, 물질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축으로 세계의 중심 기둥’(자크 브로스)이다. 나무들은 삼세계, 즉 바다 깊은 곳과 땅의 표면과 하늘을 서로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특권을 부여받았고, 그래서 특히 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존재로 여겨졌다. 나무는 하늘과 가장 가깝게 닿아있는 생물체로 땅과 하늘을 서로 연결시켜 신들이 다니는 통로 역할을 했다. 샤먼의 나무, 야곱의 사다리,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예수를 메달은 십자가 등은 나무가 깨우침과 신성함이라는 상징성과 깊이 관련되었음을 알려준다. 작품 [그들의 정원]은 인류가 기원한 아프리카에서 신성시되는 나무--생텍쥐뻬리의 [어린왕자]에도 나오는--처럼 생겼는데, 그것은 마치 세계의 중심에 서있는 듯한 위용을 지닌다. 그것은 ‘우주는 한그루의 나무로 상징되며, 신성은 수목의 형태로 표명된다’(엘리아데)는 것을 보여준다.

가지 속에서 움직이는 영상들은 나무가 끊임없이 재생하는 살아있는 우주를 구현함을 예시한다. 김무기의 금속성 나무는 정적인 속성을 벗고 동적인 생명을 획득한다. 여기에서 나무는 ‘세계상인 동시에 우주축이며 세가지 세계를 연결해서 그 사이의 교류가 가능하게’(진 쿠퍼) 한다. 나무는 지하, 지상, 천상 세계 등 여러 공간을 주파하는 수직적 역동성으로, 세상의 축과 같은 존재가 된다. 또한 나무는 빛과 공기, 물을 결합시킨다. 그것은 구분되는 세계 간의 소통의 축이 되는데, 2006년의 작업에서는 나무가 지구의 형태와 교차되면서 수평적인 층위로 소통의 축이 확대되기도 한다. 나무의 수직적인 축이 비상, 초월, 해방 등을 상징한다면, 수평적 축은 글로벌리즘으로 압축되는 현대 인간 세계로의 지평의 확대를 상징한다.


3. 중얼거리는 나무; 2004년
2004년 아트포럼 뉴게이트에서의 전시에서 선보인 [중얼거리는 나무]에서 나무는 신화적 상징성을 벗고, 인간의 세계에 보다 근접한다. 이전 작품에서 나무가 마치 살아있는 화석 내지 ‘식물성 고인돌’같은 육중한 형상을 가졌다면, 2004년의 작품은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엮여서 인간의 형상을 이루는 듯 날렵한 형태이다. 줄기는 보다 가늘어지고, 중심은 텅 비어있으며, 잎들은 마치 체모처럼 부숭부숭 나 있다. 대지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듯한 기념비성보다는 현대인간처럼 뿌리가 뽑힌 채 부유하는 형상이다. 공중에 메다는 등 설치적 요소를 극대한 [중얼거리는 나무]시리즈는 유령처럼 떠도는 모습 외에, 머리 부분과 가슴부분에 모니터를 박아--[사유]는 천정에 거꾸로 메달린 형태인데, 머리부분에 작은 LCD 모니터가 있으며, [숲속을 걷다] 가슴에 모니터를 품고 있다--인간의 지능과 마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에서 우주목은 우주뿐 아니라, 세계 속의 인간의 조건까지 표현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그 뿌리는 하늘에 뻗어있고, 가지는 땅을 향해 있는 거꾸로 선 식물이라고 말했는데, 김무기의 작품에서 나오는 거꾸로 선 나무는 바로 인간 그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형태 뿐 아니라, 인간의 상상이 결집된 정신적인 현실이다. 인간과 나무는 비슷한 형태를 가진다. 우선 선 채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나뭇가지는 동물의 사지나 내부기관인 폐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무심하게 인간사를 지켜볼 뿐인 나무라는 존재와 주어진 짧은 세월 속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인간적 삶과는 거리가 있다. 나무와 인간과의 감상적인 동일화를 거부하기 위해 김무기는 육중한 부피를 비워내고 있다. 그의 나무는 중얼거리고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말보다는 침묵에 가깝다. 나무의 침묵은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잊고자 하는 자에게 교훈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은 곧 인간이 중심이 된 문명의 소음으로 뒤덮이게 되며, 그것이 인간을 더욱 텅 비게 만든다. 신화의 시대가 가고 인간중심주의가 도래하면서 자연은 그 본래의 가치를 상실했다. 뒤마는 최초에 힘과 성장을 의미하는 식물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급속하게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한때는 자연 속에 모든 기호가 함축되어 있었다. 즉 자연 그자체가 내적인 힘에 의해 솟아나는 하나의 의미를 상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연의 정적인 구조와 영원성 보다는 시간성이 중시된다. 김무기의 작품에서도 시간성을 상징하는 영상물은 이전처럼 나뭇가지에 숨겨져 있지 않고 정면에 배치된다. 그러나 그것은 꽉 찬 현존보다는 뻥뚫린 가슴이나 머리처럼 허무하다. 계절의 반복된 주기 속에 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나무와 달리, 인간의 일회적이며 선적인 시간성은 초라하기만 하다.

수백년의 거친 껍질로부터 수액으로 통통한 어린 잎새들이 솟아오르게 하는 나무가 시간의 시험 앞에 승리자로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인간과 차이가 있다. 이 시기의 김무기의 작품을 나무의 상징주의와 비교하자면, 생명의 나무로부터 지식의 나무로 강조점이 이동된다. 그것은 나무가 중심이 되는 상징적 우주에 속한 황금시대로부터의 거리를 알리는 징후이다. 나무는 인간에게 최초로 먹을 것을 주었다. 자크 브로스는 나무 열매와 숲의 도토리가 부족해지기 시작하면서 농업이 탄생했다고 인용한다. 황금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시작된 쇠퇴는 인간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제는 성서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생명의 나무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성서였기 때문이다. 뒤마에 의하면 나무를 매개로 하여 주기적 차원을 가치있게 여겼던 고대의 종교관이 종말을 강조하는 직선적 시간관으로 이동한다.

선악의 인식을 일깨운 나무의 과실을 맛보았던 사건 이후로,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되어 생명의 나무에 접근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믿는자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의 종말이다. 십자가는 세상의 시간을 저편의 존재를 행해 열어놓는다. 자크 브로스도 교회가 승리를 거둔 이후에 사람들로부터 숭배받는 나무는 오로지 하나만 존재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구세주 그리스도가 죽음을 당한 십자가이다. 상보성과 다양성에 기반을 둔 복잡하고 세분화된 우주의 체계의 뒤를 이어, 독단적이고 비관용적이며 이원론적인 일신론이 등장한 것이다. 선과 악의 구별이라는 미명하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신화학자들은 생명의 나무가 낙원의 중심에 있으며 재생, 원초의 완전성으로의 회귀를 나타낸다고 지적한다.

생명의 나무는 우주 축이며 선악을 초월한 일원적인 존재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지식의 나무는 선악의 인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이원적인 존재이다. 많은 전통문화에서 지식의 나무는 최초의 인간 및 낙원 상실과 관계한다. 선과 악의 구별하는 지식의 나무는 인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원론에 근간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근대 자본주의 세계관과 연결되면서 현대로 이어지게 된다. 기독교적 시간관을 계승한 현대사회는 종말 또는 유토피아를 향해 일직선적 시간 속에서 ‘진보’를 거듭했으며, 그만큼 원초적인 낙원으로부터는 멀어졌던 것이다. 세계의 축으로서 순환적 시간관을 가진 나무가 직선적 시간의 전망 속에 배치되면서 바뀐 인간의 운명, 즉 기존의 바탕으로부터는 뿌리 뽑혔지만, 새로운 정박지를 찾지 못해 떠도는 인간상이 이 시기의 김무기의 작품에 나타난다.




4. 말하는 나무; 2006년
2006년 아트사이드에서 열린 [말하는 나무]는 보다 인간에게 가까워진다. 자연의 모호한 웅성거림이 아니라, 언어라는 인간적 요소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인간은 2004년 보다는 안정감있게 정박해 있다. 나무-인간-세계는 기념비성을 다시 획득한다. 물론 그것은 신화의 시대인 우주목으로의 회귀는 아니고, 글로벌리즘이라는 유추가 가미된 세계수의 이미지로 거듭난다. 나무는 ‘나’를 의미하는 의미심장한 기호인 ‘i’자 형태나 지구 형태와 더욱 가까워진다. 작품 [세상의 나무-2]는 목이 길고 머리털이 난 거인의 뒤통수같은 느낌을 주며, 검은 대리석의 다면체로 이루어진 둥근 부피가 머리통, 나무, 지구를 동시에 표현하는 듯한 [말하는 나무-세계2]에도 강한 응집력이 존재한다.

[말하는 나무-세계] 시리즈는 나무 기둥 위로 솟은 인간은 나무와 일체화된 자신을 보여준다. 번쩍번쩍하는 지구적 삶과 구상적인 차원에서 나무와 일체화된 자소상에서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중심을 굳건히 잡으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인간의 세계는 나무로 상징되는 세계를 추월한다. 5미터에 가까운 인간상은 마치 바벨탑과 같아서, 이전시대에 지상에서 가장 큰 존재였을 나무를 압도하고 있다. PVC로 주조된 후 금속성 도료가 칠해진 [말하는 나무-세계7]은 마주한 나무를 흡수하는 듯한 두상으로 같은 주제를 구상적으로 변주한다. 스테인레스 스틸 판으로 구성한 [거인] 안에는 작은 모니터들과 금속판을 오려내어 만든 이미지들이 끼워져 있다. 인간, 나무 또는 지구처럼 구성된 기념비 안에는 작가의 딸과 아들의 영상과 작업실 주변의 자연 풍경들이 담긴 작은 영상이 흘러나온다.

[말하는 나무-세계]는 나무, 인간, 지구모양이 겹쳐 보이는 구조적 형상에 기호가 새겨진 금속판과 모니터들이 끼워져 있다. [말하는 나무-세계1]는 줄기 또는 뿌리 중심부로부터 빛이 올라와 천정에 밝은 실루엣이 비치는 작품인데, 쭈그리고 있거나 걸어다니는 인간, 동물, 글자, 상징 등 기호적 형태로 단순화된 이미지가 박혀있다. [말하는 나무] 시리즈에서 자연과 문명은 저 깊은 차원에서 닮아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나무라는 자연은 인공적인 구조물과 보다 잘 조응한다. 이전 시대에도 나무는 신전같은 건축물과 비교되곤 하였다.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들]에서 ‘자연은 살아있는 기둥들이 이따금 알 수 없는 말들을 웅얼거리는 사원’이라고 노래한 바 있다.

나무들은 신전의 열주처럼 늘어서고 가지들은 초록색 궁륭이 되어 세상의 공간 속에서 다른 곳으로 향한 길을 열어놓는다. 이처럼 숲은 신전처럼 인식되었고, 신성한 것이 되기 위해서 세상과 동떨어진 자연적 장소여야 했다. 뒤마에 의하면 숲은 근본적인 양면성을 지닌다. 그것은 성스러우면서도 속되고, 매혹적이면서도 불쾌하며, 숭고하면서도 야만적이다. 자연주의자들은 전자의 측면을, 진보주의자들은 후자의 측면을 강조한다. 가령 자연주의자인 루소는 자연의 상태를 숲이라는 모형 위에서 사색하였는데, 여기에서 나무들은 서로가 격리되어 있으며, 각자 생존하기 위해 땅에 뿌리를 박는다. 나무는 사교적이지 못하고 투박한 사람처럼 살아간다. 각자 존재할 뿐인 나무의 방식은 모든 역사적 가능성에 족쇄를 채우는 비관여의 상태에 이른다.

자연주의자에게 숲은 역사 이전의 상태를 드러낸다. 반면 진보주의자들에게 숲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야만상태로, 미신과 공포, 혼란과 위험을 낳는다. 최근의 작품인 [말하는 나무]는 자연 그자체보다는 언어 및 이성적 상태에 보다 기울어있다. 물론 레이저로 깔끔하게 절단된 기호들과 영상이 있기 전에도 나무는 문명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나무는 그 속껍질에서 종이에 이르기까지 자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자신 속에 글씨를 기억하고 간직해왔다. 뒤마는 나무가 전달의 매개자로 저장의 울타리로, 기록의 표면으로 경이로운 변신을 거쳐왔다고 지적한다. 나무는 전달, 이송, 기억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말하는 나무-세계]는 세계수 안에서 포함된 인간 문명의 단편들이 끝없이 명멸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무는 보다 구체적인 문명, 가령 교육, 정치 등과도 유추될 수 있다.

가령 나무는 교육의 역할, 즉 인간이나 문명처럼 싹이 터서 개화하는 종자의 개념을 내포한다. 씨앗 속에 이미 계획된 과정을 배려하고 자극할 따름이다. 또한 나무는 5월제의 기원이 되었듯이 ‘집단적인 행복추구’(엘리아데)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나무는 명확히 보이지는 않으나 감지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성장과 안정의 모델을 제공했던 것이다. 작가 개인에게 나무는 열매라는 결과물보다는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곳으로부터 에너지를 길어올리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에 주목하게 한다. 김무기의 나무 연작들은 자연이 자신의 법칙에 따르듯, 작가는 자신의 엄밀한 규칙에 따르면서 생산하고 소통하는 삶, 쉬워보이면서도 쉽지않은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