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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조각은 기념비적인 것으로 존재해왔다. 3차원 상에서의 공간 점유와 관련하여 조각에서의 단단함은 충분조건까지는 아니어도 필요조건이 된다. 그러나 조각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단단함은 어느 순간 부드러워졌다. 이 전시는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주요한 현대 조각 작품들을 조명한다. 물론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문화의 변화와 관련되는 문제이다. 직관적으로, 노동(생산)은 단단하고, 휴식(소비)은 부드럽다. 미술의 형식적인 맥락에 국한시켜본다면, 미니멀리즘의 물마루를 넘어서면서부터 전개된 일련의 과정들과 연관된다. 미학적으로는 모더니즘 이후에 전개된 모든 유동적이고 이완된 국면을 포괄한다. 따라서 이 전시는 단지 부드러운 재료같은 소재적 차원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 아니다. 가령 단단한 쇠나 기하학적 구조를 통해서도 부드러운 조각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단단함/부드러움의 대조항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미술 뿐 아니라 광범위한 문화적 맥락에서 ‘부드러움’의 도래는 우선적으로 인간의 위상 변화와 관련이 있다. 특히 조각적인 질서의 근본을 이루던 인간 주체의 해체와 관련된다. 인간을 바탕으로 한 구조적 질서의 어떤 고리들이 풀어지면서 조각의 구조가 이완되고 흩어져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 전시의 미학적 코드로서의 ‘부드러움’은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왔으며 해체되었는지의 문제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일련의 개념들--주름, 관계적 구조, 열림, 경계넘기 등--은 인간의 해체에서 비롯된 파생적인 의미와 관련된다. 이 전시에 참여한 14명의 작가의 작품에서 부드러움은 대략 다섯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① 인간의 사라짐, 또는 외연의 확대; 신미경, 김윤수. ② 주름진 표면으로서의 신체; 김준, 김희경. ③ 관계적 구조; 김주현, 김시연, 황혜선, 정광호. ④ 열림; 김종구, 정재철, 목진요. ⑤ 경계를 넘어서; 이용백, 김홍석, 우순옥.


1. 인간의 사라짐, 또는 외연의 확대; 신미경, 김윤수
미셸 푸코는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그의 ‘고고학적’ 방법론은 현대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말과 사물]에서 앎의 대상이 신이었던 르네상스, 자연이었던 고전주의, 인간과 역사였던 근대, 그리고 언어였던 현대로 나누었다. 앎의 대상이 신이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의 재현의 일종의 신인(神人)으로서, 신적 질서의 구현으로 나타났다. 기나긴 종교의 시대 속에서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라 神人으로서, 신적 질서를 구현하였고, 이것은 누드나 건축적 구조 속에 보편 질서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오랫동안 미술의 근간을 이루었던 재현은 인간적 의미 및 유기적 통일성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상징체계로 존재해 왔다.

형식적으로는 유기적 재현의 바탕인 관계적 구성, 조각의 경우 지상 위에 선 수직적 구조에서 연상되는 인간적 형태Anthropomorphism를 말한다. 미술사에서 유사 과학적 실험을 매개로 탈인간주의의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러시아 구성주의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타라부킨은 예술품은 매체인 재료(색, 소리, 낱말)와 구성이라는 두가지 전제로부터 나온다는 것, 재료는 구성을 통해서 일관된 전체로 조직되고, 예술적 논리와 의미를 얻게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벤자민 부클로에 의하면, 구성주의자들은 1910년대 모스크바 언어학계와 궤를 같이 하면서 회화와 조각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문법을 개발했다. 그들은 재료의 특성과 과정의 특성을 나누어 정의함으로서 기능적, 분석적으로 시각적 기호의 생산장치(생산절차와 도구)를 제창하였다. 구성주의자들은 기호의 지표적indexical 지위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의미와 읽기라는 제 2의 차원을 거부했다. 즉 구성주의자는 재현과정을 순전히 지표적 기호로 환원하여 재료는 매개없이 자신을 직접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을 회화와 조각의 공간으로부터 실제의 공간으로 옮겨왔다.

신미경은 문화사에 기록된 유명한 조상들이나 기물을 비누로 조각한다. 비누는 사용되고 녹아 없어지며, 물리적인 자극에도 취약한 재료이다. 그녀의 작품은 고풍스런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전시된 장소는 유물의 퀴퀴한 냄새나 부식을 막기위한 약제의 냄새가 아니라, 비누 향기로 가득하다. 바디샵 앞을 지나갈 때 거기에서 풍겨나오는 독한 향기와 유사하다. 그것은 대리석이나 금속으로 이루어졌을 원본과 달리, 다시금 매끄러운 피부와 뽀얀 살을 덧입은 듯하다. 영원히 기억되어야할 기념비적인 고풍스러움은 비누로 상징되는 일시적이고 소비적인 물건과 대치된다. 각 시대를 대표하며 서있는 듯한 박물관의 상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색하다. 원본의 형태를 크게 왜곡하지 않은 비누조상은 이제 인간이 영원한 조상으로 기념될 수 없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비누라는 재료를 통해, 숭배되고 탐미되는 것이 소모되는 과정을 가속화시키고, 이러한 과정을 작업내용에 노출시킴으로서, 인간 및 인간을 기본으로 한 기념비 문화의 종말을 예시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Translation - budda]는 비누로 만든 보살상을 만들어 화장실에 놓아둔 후, 대중들의 사용에 의해 닳은 상태를 수거하여 전시하였다. 일상적인 물건이든 문화재든 어떤 사물이 소비되는 과정이 비누라는 재료를 통해 더욱 가속화된다. 그것은 시간의 흔적이 각인된 채 미술관에 안치됨으로서 끝난다. 인간 뿐 아니라, 의미 역시 유동적이다. 작품 [Translation - chinese vase]은 문화 간에 이루어지는 번역과 해석의 문제를 다룬다. 작가는 유물급인 중국 도자기를 캐스팅해서, 그 위에 핸드 페인팅으로 전통적인 청자 안료나 철화안료로 그렸다. 도자기를 비누로 재현한 그것은 겉보기의 유사함과 전혀 다른 내용물을 지니고 있다.

김윤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실제 인물들 100여명의 발자국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 [바람의 砂原](2004--2006년)에서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지만, 동시에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것이다. 각자의 발 모양을 따라 비닐을 연차적으로 오려내어 쌓아가는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반투명의 부드러운 덩어리들은 사막의 모래바람에 사라져 버리는 발자국같은 느낌을 준다. 각자의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알 입자같은 존재가 되어 하얀 공백의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첫 발자국은 원본과 유사하지만, 조금씩 차이를 두는 반복적인 재현은 원형과는 다른 의미를 발생시킨다. 차이를 둔 반복은 원형 및 원형에 바탕을 두는 재현의 의미를 탈각시킨다.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적인 동일성은 차이와 반복의 세계로 해소되고 있다. 또한 수평으로 깔리는 작품 스타일은 대지 위에 우뚝 선 인간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반(反)기념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험실같은 밝은 백색광 아래 일정한 간격으로 띄엄띄엄 있는 발자국들의 구조적 배치는 인간이라는 중심이 해체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죽 펼쳐진 수평성은 전통적으로 인체형상을 기본으로 하여 양감을 강조하는 기둥식monolithic 방법의 해체와 연관된다. 인간주의의 유산인 이원론을 상기시키는 마주 선 이미지와의 대결을 피하고 그 내부로 들어가 배회하게 하는 것이다.

장 삐아제에 의하면 인간적 주체에 의존하는 인간중심의 인식론을 근본부터 수정한 것은 구조중심의 인식론이다. 이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탈중심화의 전략이며, 전통적 주체는 사라지고 구조의 구성과정 속에 존재할 뿐이다. 현대미술의 변화는 사고의 지반으로서 인간의 해체와 관련된다. 비평가 D.맥도넬은, 담론을 의미의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 구성물이라고 볼 때, 구조주의자는 예술작품을 우리가 예술이라고 알고 배우는 자의적인 관습이나 구조의 묶음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하며, 포스트구조주의자는 예술작품을 무의식적 욕망의 살포로, 기존의 자의적인 관습을 전복하는 특권화 된 장소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이런 개념들은 작품이 직접적인 인간경험을 표현하거나 반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애초부터 주체성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는 투명하지 않고 개인과 사물들의 세계를 구성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상식으로서의 휴머니즘을 공격하며, 그것이 경험주의와 관념주의를 바탕으로 모방과 표현을 강조한다고 본다. 현대미술은 단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등가물로서 ‘되어가는 과정’ 그자체가 된 것이다.





2. 주름진 표면으로서의 신체 ; 김준, 김희경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몸은 부분과 전체의 조화에 의존하는 유기적 질서나, ‘인간’이란 말에 내포된 중심적 상징체계를 비껴간다. 몸의 경계 및 내부와 외부의 관계는 변형되고, 몸의 외연은 확대되거나 해체되었다. 이 전시에서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작가가 김준과 김희경이다. 김준은 3d max로 만든 애니메이션 작품 [prajna(반야심경)]과 [violet](2004년)에서 극과 극의 이미지를 충돌시킨다. 고정된 카메라 앵글로 잡힌 부처와 보랏빛 커튼 뒤의 미소녀는 탈속과 세속의 이미지를 넘나든다. 두 작품 모두 작가의 스킨 이미지를 소스로 만든 것이다. 그의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되는 피부는 서로 대조되는 범주들이 공존하는 위반의 장이 된다. 가령 그의 작품에서 피부는 하나의 자족적인 유기체를 완벽하게 포장하여 내부와 외부를 구분짓는 단단한 경계막같은 것이 아니다. 김준의 작품에서 살은 나사형 송곳으로 뚫리고 관통되며, 들끓는 화산처럼 불과 액체를 뿜어댄다. 피부 표면 위에 새겨진 상처이자 무늬들은 유기체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침식하는 수상쩍고 불경스러운 통로이다.

김준의 작품에서 몸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가 하나의 연결된 표면으로, 무엇인가가 각인되기 위한 바탕이 된다. 여기에서 몸은 정신적 내부의 외적 표현이 아니라, 각인되고 쓰여지는 순수한 표면이다. 몸은 복합적이고 비결정적인 텍스트가 된다. 엘리자베스 그로츠에 의하면, 몸의 텍스트화가 가리키는 것은 사회적 가치와 요청이 주입되는 것이기 보다는, 주체의 몸에 새겨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김준의 작품에서 문신의 모티브는 처벌과 사회화와 연관되는데, 그것은 사회적인 것을 육체적인 것으로 코드화하는 형식이다.

김희경은 바느질과 뜨개질로 완성한 유기체 형상의 오브제를 통해 신체 내부의 정형을 떠내거나 신체 내부와 외부를 뒤집는다. 마치 고무장갑이나 양말을 뒤집듯이, 안팎이 역전된 형태가 유기체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적인 것들을 형태화한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의 몸을 상상할 때 소화,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은 외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고 말한다. 빈 공간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그 기관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거의 모든 결과물은 결국 몸 밖으로 스스로 나오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부라기 보다는 안쪽이다. 들뢰즈는 안은 바깥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정확히 바깥의 안쪽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안/팎의 고정된 고정된 경계가 아니라, 연동 운동에 의해 안을 구성하는 주름과 습곡들에 의해 자극받는 움직이는 물질이다.

핑크색 천으로 만들어진 [자라나기](2006년)는 안에 솜이 들어있는 천으로 바느질하여 완성한 작품으로, 작은 유기질 덩어리로부터 돌기들이 자라나는 듯한 오브제이다. [생겨남](2006년)은 면사와 천을 재료로 뜨개질과 바느질로 만든 작품인데, 벽에 걸어 설치된 그것은 떡가래처럼 길게 드리워진 구조물로, 주름진 내장 기관이자 건물의 배관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김준과 김희경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몸을 포함한 사물의 유체성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하나의 물체는 어느정도의 견고성 뿐만 아니라, 어느정도의 유체성을 지니고 있다. 또는 물체는 본질적으로 탄력적이며, 동시에 물체의 탄력적인 힘은 그 물질 위에서 작동하는 압축적인 힘이 표현된 덩어리 또는 집적물이다.

현대미술가들은 몸의 유기적 관계를 해체하고 안팎이 연결된 띠같은 표면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몸은 하나의 표면과 관계하는 무한한 변곡을 가진다. 공간은 가능한 빈곳을 적게 하면서, 가능한 한 형태를 가장 많게 하면서 채워진다. 한정된 공간에서 표면을 확장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은 접기와 주름잡기이다. 김준의 문신의 모티브나 김희경의 천과 바느질을 이용한 부드러운 구조물이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부터 무한히 많은 존재들이 태어나는 방식이다. 이들의 작품에서 몸은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무한히 나아가는 주름의 계열에 의해 변화한다. 이를통해 이질적이고 다양한 몸이 탄생한다. 그것은 체계에 복속될 뿐인 일관성 있는 주체를 넘어선 또 다른 영토로서의 몸이다. 외부로부터 주름잡혀지는 비유기체적 물질과 내생적인 주름에 의해 정의되는 유기체 간에는 강력한 친화성이 존재한다.


3. 관계적 구조 ; 김주현, 김시연, 황혜선, 정광호
김주현, 김시연, 황혜선, 정광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부드러움은, 본원적 의식과 물질을 거부하는 구조와 관계성이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구조적 감각이 지배적이지만, 가설적이며 이론적 틀거리 일뿐인 구조는 그자체로 존재화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은 엄격한 형식의 적용 속에서도 반복과 차이, 변화, 미결정성으로 흘러가는 특징이 있다. 우선 김주현과 김시연의 작품은 기하학적 구조물이라는 외관적 공통점이 있다. 김주현은 스스로 고안한 원칙과 그것의 정밀한 실행을 통해 스스로 확장해 나가는 듯한 구조물을 만든다. 나무막대나 금속같은 재료에 일련의 규칙이 관철됨으로서 규칙은 조각화되거나 물체화된다. 규칙과 그것의 결과물의 관계는 직접적이어서, 일련의 규칙 자체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게임원리, 즉 자신이 만들어낸 규칙에 충실하게 임함으로서 엄밀한 자연법칙과 견준다. 그녀에게 작업이란 세계의 원리를 파악하여 모사적으로 창조하는 것에 해당된다. 그러나 쌓기나 연결하기 같은 단순한 원리는, 노동이라는 반복적 실행의 매개를 통해 점차 복잡한 구조가 된다. 증식, 또는 복잡해짐을 통해 구조는 폐쇄성을 벗어나, 자연과도 같은 또 하나의 흐름으로 변모한다. 촘촘히 쌓여진 집적물의 좌우 양 날개가 중력을 받아 아래로 쳐진 형태의 작품이나, 수직 수평을 축으로 하는 엄격한 기하학적 좌표계에서 약간 벗어나 보이는 입체구조물에 새겨 있는 것은 시간성의 개입에 의하여 변형된 공간이다.

김시연의 작품 [눈물]은 소금에 적절한 수분을 주어 자연 건조한 기하학적 구조물이다. 바닥에 깔린 소금 구조물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집안에서 흐르는 무의식적 감정의 기류라 할만한 것이 압축된 결정체이다. 그녀의 작품은 정형화된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지만, 그 바탕에 추상적 기하학이 전제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그 장소에 사는 인간의 무의식과 감정이 깔려있다. 소금가루를 그러모아 바닥에 세워놓은 일정한 형태들은 투명하고 추상적인 공간성에 호소하기 보다는, 집같은 구체적인 공간, 삶의 불투명한 밑자리에서 솟아오른 듯하다. 그것은 추상적인 좌표체계에 의해 정립된 형태라기 보다는, 형태의 모태이자 불안스러운 타자의 흔적들인 것이다. 김주현과 김시연의 작품에서 기하학적 형상은 세계의 절대적 동일성과 완결성을 확인하는 공리의 표현이 아니라, 개방성을 지향한다. 그것은 틀과 부동성, 구축, 요컨대 자기동일적인 실체의 건설을 넘어서 발생이나 소멸로 향한다.

이러한 구조들에는 자체완결성보다는 차이의 흔적이 내재되어 있다. 들뢰즈는 꽉 채워진 현존이 아니라, 새어나가는 어떤 것, 단단하게 닫혀 하나의 핵으로 집결되지 못한 채 밖을 향해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열리고 분지하는 것의 긍정성을 언급한다. 예술이란 명확히 한정지어진 것의 자족성이 아니라, 과도함과 넘쳐남과 관련된다. 여기에 부드러움의 힘이 있는 것이다. 황혜선과 정광호의 작품은 미세한 차이의 세계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작품을 통해 통합적이고 무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세계에 차이를 부여한다. 마이클 라이언은 해체주의를 해설한 책에서, 현대의 철학은 세계의 직접적 소여, 가령 실증주의적으로 가정된 물질의 자명성이나 사실성을 뒤흔든다고 말한다. 현대적 예술작품에서도 사물은 고유한 단일성이 아니라, 중개의 그물망에 의해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사물은 언제나 스스로를 넘어 다른 어떤 것과 관련되어 있다. 직접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직접성에 선행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차이화, 연기, 그리고 언제나 그 외의 어떤 것, 또는 타자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작가들은 균열과 차이, 모순을 드러냄으로서 현존하는 명백한 사실이 얼마나 매개되고 파생된 것인가를 보여준다.

황혜선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에서 조각이 놓여있는 미술관의 중정(中庭)을 사이에 두고 흰색 라인 테이프로 일련의 풍경을 드로잉 한다. 라인 테이프로 만들어진 형태는 유리벽과 유리벽 사이에 낀 장면을 포함함으로서, 상호 이질적인 차원들이 중첩된다. 입구의 유리벽과 중정 저편의 유리벽 사이에는 높이와 거리의 차이가 있지만, 라인테이프로 재구성된 풍경의 원근법은 상당히 교란된 상태이다. 드로잉의 소재는 대개는 가방, 안경, 구두같은 극히 일상적인 사물들인데, 그것들은 일상 속에서 존재하듯, 자명한 자기동일성을 가지지 않는다. 가장 일상적인 사물조차도 그것이 나타나는 바탕과의 미세한 차이와 흔적에 의해 그 형태가 드러난다. 설치작품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강화유리에 실크스크린으로 완성된 것으로, 베일처럼 드리워진 유리막에 그려진 겹쳐진 이미지들이 중층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그 위에 그려진 이미지들에는 비밀스러운 것이 없다. 자동차, 옷 같은 도시적 모티브들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모티브들은 미세한 관계망들에 의해 구체화된다. 작품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제목부터 전형적인 미로를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공간은 궁극적인 요인이나 목적이 없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수많은 계열성으로 뻗어나간다.

정광호는 구리선을 용접하여 나뭇잎이나 물고기, 항아리 등을 엮어낸다. 자연물이든 인공물이든 그것의 물리적 실체를 형성하고 지탱하는 것은 그것들 안의 공백과 균열이다. 그의 작품에서 사물은 언어적 과정처럼 차이적 관계 및 참조관계의 그물망을 이룬다. 이파리나 도자기는 그자체의 실체, 즉 항상 단일하고 고유한 동일성의 범주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끝없이 자기가 아닌 어떤 것, 다른 차이적 흔적들과 참조관계를 맺는 흔적들의 직조물’(데리다)이다. 여기엔 의미나 사물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복합적인 차이작용의 결과로서 생산된다. 이러한 사물들은 기호를 닮았다. 하나의 기호는 항상 그밖에 다른 것의 기호이며,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물망처럼 얽힌 구리선들은 차이적 관계 속에서 일정한 사물의 형태이라는 동일성의 의미를 얻는다.

그의 작품에서 틈과 균열은 근원적 이타성alterity이 된다.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사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하나의 관계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기호의 체계는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그 요소들의 충만함에 의해 구성되지는 않는다고 말하였다. 각 구성요소들은 동일체인 것만큼이나 또한 타자이기도 하다. 구성요소들의 동일성은 타자성otherness에 의해 가능하다. 해체주의적 사고에 의하면 자기동일성이 아닌, 차이적 관계로 이루어진 사물들의 존재방식은 동일성이 결핍되었기에 끝없는 보충을 요구한다.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반복하는 가운데 변화해 나가는 운동을 뜻한다. 차이작용은 해체적인 분열과 불연속적인 확장의 과정이다. 명확한 존재감은 흐려지고 흔적만이 남는다. 데리다는 이타성의 차이적 관계를 흔적이라고 부른다. 세계는 흔적들의 조직이다. 다른 것들과의 관계 체계로만 떠오를 뿐인 희미한 사물의 흔적들은 자연적이고 고유하며 본질적인 것, 즉 동일성에 대한 비판이다.





4. 열림; 김종구, 정재철, 목진요
김종구, 정재철, 목진요의 작품은 열린 형식이 특징적이다. 이들의 작품은 차원의 이동, 전용, 상호작용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애매함과 다의성, 불연속성, 다형적 요소들의 불확정적인 관계를 낳는다. 이러한 작품은, 열린 예술 작품, 즉 ‘관점을 이동하면서 구조를 재배열할수 있도록 해주는 일정한 구조적 속성을 가진 작품’(에코)이다. 여기에는 의사소통의 방식에 있어서 토대가 되는 언어적인 방식이 깔려있다. 쇳가루로 쓴 글자(김종구), 글자가 쓰여진 현수막(정재철), 연결망을 이루는 신호체계(목진요) 등이 그것이다. 에코는 [열린 예술작품]에서 몇몇 형태의 의사소통은 의미, 질서, 명확성을 요구하지만, 이와 다른 형태들은 독자들에게 순수한 정보, 다양한 의미를 아무런 제한없이 풍부하게 전달한다고 지적한다.

후자의 경우, 예술적 의사소통과 미학적 효과의 특징인데, 이는 좀 더 유연한 형식, 즉 가능성의 장으로서의 형식을 추구한다. 그것은 작가에 의해서 명확히 확정된 절차나 완결된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용자가 여러방식으로 작품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다양한 요소를 배치하기 때문에 열려있다. 대상자체가 끊임없이 유동하여, 작품과 관객의 관계는 매번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다. 김종구의 작품은 쇳가루를 뿌려 만든 글자들이 차원의 이동을 통해 풍경으로 변형된다. 수평면에 펼쳐진 쇳가루가 수직적인 평면에 투사되는 순간, 언어, 또는 이미지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은 연이은 봉우리들이 중첩된 기념비적이고 물질적인 두께를 획득한다. 언어적 기호는 자연처럼 물질화되고, 이러한 기호의 장을 거니는 관객의 자취는 거인족의 발걸음이 되어 세계에 새겨진 서명을 읽는다. 그의 작품에서 세계와 언어는 상호교환되는 유연한 것이 된다.

정재철의 작품에서도 일종의 기호의 사물화가 일어난다. 그는 2004년부터 진행된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에서 수거한 폐 현수막들이 또 다른 사물로 전용되는 상황을 표현하였다. 실크로드에 인접한 국가인 중국, 파키스탄, 인도, 네팔 등지의 주민에게 전달한 현수막들은 이불, 천막 등 다양한 맥락으로 사용된다. 동서를 연결짓는 고대 무역로를 통해 문화의 전달 및 교류 상에서 변형되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없는 사실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현수막은 선전 및 전달의 차원에서, 한 문화의 언어적 기호의 결집체라고 할 수 있는데, 실크로드 5개국 현지인들이 나름대로 활용한 현수막들은 기호의 유목, 즉 자의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종구와 정재철의 작품에서 기호는 질서잡힌 체계를 이루면서 어떤 명료하고 투명한 중심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형된다. 기표와 기의는 일대일 대응이 아니라, 그물망이나 뿌리줄기같은 관계로 이루어진다. 의미는 내적이며 객관적인 속성을 가지기 보다는, 관객과의 상호작용의 결과에 의해 가변적이다.

목진요의 작품은 기술적 장치를 통해 보다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꾀한다. 작품 [MusicBox Mini]은 LED와 빛에 반응하는 센서로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뮤직박스로, 목제 원통과 입력장치로 쓰이는 컴퓨터 스크린, 그리고 원통을 돌리는 크랭크 핸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용자가 PDP 스크린에 그린것과 동일한 패턴의 LED들이 뮤직박스 원통 위에 켜지고, 설치된 크랭크를 돌리면 원통의 LED로부터 빛을 감지한 센서들이 주어진 소리를 낸다. 관객의 촉각적 자극에 반응하는 LED 전구들은 빛의 패턴을 만들고, 그것에 따른 일련의 멜로디가 생성된다. 그것은 구식의 뮤직박스처럼, 일종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시적인 사물이지만, 관객의 상호작용에 의해 여러 감각으로 퍼져나가는 공(共)감각적 효과가 있다.

시계 태엽장치와 유사한 구식의 뮤직박스는 전자적 신호라는 매개를 통해 형태에서 소리로 연결되는 21세기형 뮤직박스로 업그레이드 되며, 인간의 기억과 무의식을 입체적으로 일깨운다. 이 뮤직박스는 각자가 떠나는 마음의 여행을 촉발하는 우연적 계기가 된다. 인간의 여러 감각 기관에 동시에 호소하는 복합감각적인 유희는 원인과 결과가 엄격하게 일직선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기 보다는, 하나의 장(場)이 된다. 장의 성격을 띄는 작품은, 에코가 지적하듯, 다양한 힘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여 사건이 벌어지며, 가능한 여러 사건이 조합되어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5. 경계를 넘어서; 이용백, 김홍석, 우순옥
김홍석, 이용백, 우순옥은 구분되고 경계지어진 것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김홍석은 두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16분 분량의 영상 [The Wild Korea]은 2005년 12월 개봉한 ‘베리코리안콤푸렉스(verykoreancomplex)’라는 영화의 7번째 작업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개인이 총기를 소지할 수 있다는 법안이 통과됨으로서 벌어진 한 가상의 사건을 인터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인터뷰의 피대담인은 이미 총기사고로 사망한 점이라든가, 피대담인의 직업이 실제 배우라는 점 등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된 이 영상물이 실재와 허구를 넘나드는 요소로 채워져 있음을 암시한다. 작가는 이를통해 이것 아니면 저것 이라는 공식의 모순을 나타내고자 했다. 2004년 작 [G5]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의 국가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5명의 한국인에게 부르게 하였다. 그들은 자못 진지하게 부르지만, 거기에는 어떤 국가가 불리워지는 내적인 필연성이나 극적인 맥락, 상징성이 제거되어 있다. 초강대국들의 모임을 상징하는 작품제목은 오늘날 하나의 시장으로 세계를 통일하려는 글로벌리즘과 세계 시장에 성공적으로 포함되기 위해서만 필요할 뿐인 국가주의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보편성과 개별성이라는 기존의 짝패는 더 이상 진실한 것이 못된다.

김홍석의 작품은 진정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위계질서 없이 차이를 보존하는 사회’(데리다)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현실을 다룬 풍자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차이를 억누르고 강력한 문화적 우세종이 된 무엇인가를 언급한다. 문화적 우세종이 가능한 바탕은 기술과 시장을 매개로한 세계의 전면적인 체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날이 확대되어가는 이러한 동질적인 질서는 역설적으로 불확실성을 확대시킨다. 보드리야르는 [불가능한 교환]에서 예전에 보편적인 것의 이상적 은유였던 선, 다시말해 기술의 영향 아래서 세계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 냉혹한 실재가 되었다고 하면서, 선은 스스로 파괴된다고 진단한다. 즉 체계의 합리화는 체계를 해체시킨다. 선의 보편성은 악의 투명성이 된다. 그것은 체계적인 통합에 대한 가정이며, 우리는 이 유일한 원칙에 대하여 완전한 계약을 맺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상호작용과 뒤섞임 속에서 모든 것이 충만하고 포화되고 완전하기를 바라는 환각, 모든 부정성을 소멸시키는 환각이다. 체계는 한점에 시간을 모으고 한순간에 공간을 모으고자 하지만, 가속도는 모든 입장을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이용백은 [angel soldier]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군인, 그리고 현실공간과 사이버스페이스를 왕래하는 직업을 은유하는 천사의 공통적 속성에 주목한다. 전사와 천사는 끊임없이 변동하는 접경지대에서 활동하는 존재들이다. 거대한 디지털 프린트 속의 매복 군인들은 꽃으로 뒤범벅된 배경과 구분하기 힘들다. 그것은 주변 환경을 모방하는 곤충의 의태(擬態)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인류학자 카이유와는 [모방과 전설적인 정신쇠약]에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방현상에 나타난 공간성을 탐구 한 바 있다. 이용백의 작품 속 전사들은 주변환경을 흉내내는데, 그것은 유기체와 그를 둘러싼 환경 사이에 일어나는 혼돈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혼돈은 생존이 아니라, 죽음과 더욱 연관된다. 카이유와에 의하면 대부분의 포식동물들은 시각보다는 후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모방은 적응과는 무관하다. 카이유와는 모방이 자기보호나 종족의 생존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없는 사치, 혹은 잉여라고 간주한다. 그것은 치명적인 유혹 내지 정신병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용백의 작품 속 유기체는 더 이상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카이유와에 의하면 주체로서의 위치를 차지해야 하기 위해 주체는 육신이 차지하는 공간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몸으로 인해 주체성이 닻을 내리는 정박지점은 일관된 정체성의 조건이며, 주체가 세계에 대해 관점을 갖게되는 조건이자, 시각을 위한 원천이 된다. 이용백의 작품에서 주체는 공간에 의해 포획되고 공간에 의해 대체되는데, 그로인해 타자의 위치와 자신의 위치 사이에 경계가 흐려진다. 꽃들로 가득한 공간은 주체를 집어삼키는 힘처럼 보인다. 공간은 그들을 추적하고 그들을 에워싸고 그들을 먹어치운다. 병사들은 스스로가 공간이 된다. 그들은 ‘발작적인 홀림의 공간’(카이유와) 속에 있다. 그것은 카이유와가 ‘공간과의 융합에 의한 탈인격화’라고 묘사한 것을 나타낸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카이유와가 제시한 정신병적 공간개념을, 환경과 일체화된 주체들이 특정한 시점을 차지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체념하고, 자신이 보는 시점의 우월성을 타자의 응시에 양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용백의 작품은 현실과 가상세계의 구분의 혼동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유혹의 힘에 투항하는 것임을 예시한다.

우순옥의 작품에서 경계의 가로지름은 김홍석과 이용백 식의 신랄한 풍자나 경고보다는 숭고함과 관련된다. 작품이 인공성 보다는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탓이다. 장면의 수평적 중심축 바깥으로 뻗은 숲의 실루엣은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먹물을 가득 머금은 굵은 붓으로 빠르게 그어 생겨난 얼룩처럼 보인다. 강물에 반사되어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진 공간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며,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 듯하다. 영화는 이러한 시공간 속에서 행해진 미소한 움직임, 창공 위의 별빛처럼 작은 점으로 축소된 인간들의 자기 고백적 언어들로 채워졌다. 작품 [꽃!](2006년)은 35mm 컬러 필름으로 찍은 8분 분량의 영화이다. 촬영장소는 영암구림마을의 한 강가로, ‘오랜 시간의 겹이 느껴지는 아득하고 따뜻한 이미지의 자연스런 장소’이며, 낮과 저녁사이 경계의 시간에 행해졌다. 화면 상에서 깨알처럼 보일 뿐인 8명의 화자가 ‘좋은 냄새는?’, ‘그리운 장소는?’, ‘슬프게 하는 것은?’같은 뜬금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사전 언급이나 리허설도 없이 1분 내에 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공평하게 주어진 1분이라는 시간은 화자들에게 강제된 유일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지상에 와서 짧게 머물렀다가 가야할 유한한 존재로서의 운명을 상기시킨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화자인 작가는 ‘꽃!... 신비로움!....고요함!....어두움!.....진실함!...따뜻함!...빛!....’이라고 말한다. 관객은 롱샷으로 잡혀져 있으며,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으로 명멸하는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지만, 배경으로 깔리는 바하나 존 케이지의 음악에 함께 편집된 그들의 대답은 선문답의 그것이 종종 핵심을 찌르듯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힘을 가진다. 광대한 시공간 속에 일점으로 축소되었지만, 그들의 내면의 목소리는 온 우주를 채우는 듯하다. 각본없이 펼쳐진 우순옥의 작품에는 드라마틱한 면이 없다. 서정적인 배경과는 달리 매우 쿨하다. 관객에게 무심하게 던지는 듯한 화두도 특이하다.

우순옥의 작품은 분리된 틀을 전제하는 재현이 아니라, 틀이 사라지는 제시와 관련된다. 장 뤽 낭시는 [숭고에 대하여]에서 사유는 감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재현의 모티프에 의거해 체계화된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주체의 사유일 수 밖에 없는 사유의 내부에 대상의 심급을 구성하는 것이 재현이다. 재현은 적합성과 의미를 매개로 구성된다. 그러나 제시는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사건과 그 사건의 섬광에 관여한다. 그것은 한정된 경계를 넘어서 바깥으로 향하는 또 다른 종류의 유출, 즉 숭고이다. 칸트는 숭고를 설명하면서, 형태없는 대상이 나타나 그를 통해 무제한적인 것이 재현될 때 우리를 사로잡는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경계를 벗어나는 느낌이다. 여기에서 유한성의 표시일 뿐인 적절한 경계 및 구성은 붕괴된다. 부드러움은 체계와 구조를 비롯한 닫혀진 모든 것으로부터 미끄러지며 새어나오고 범람하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낯선 바깥을 향한 끝없는 흐름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