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 전(10.12--10.26, 세오갤러리)

[Memory of Still life]라는 제목이 붙은 이지은의 작품들은 반투명 비닐 PVC를 쌓아 도자기 형태로 비워놓은 입면들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실루엣의 구축적 작품과 색색의 비단 띠를 붙여 만든 화려한 구성 작품으로, 이들은 입체와 평면의 양극을 이룬다. 그 중간 쯤에 색채의 층과 두께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부조적인 작품이 위치한다. 조각과 회화 사이에 존재하는 그것은 주전자, 컵, 병같은 일상적 사물의 실루엣과 부피를 따라 형성되는 네가티브 볼륨을 이룬다. 지층의 단면같이 노출된 절개면에는 사물의 깔끔한 외곽선을 따라 파여진 빈 공간이 드러나 있다. 네가티브 이미지는 형태들이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집적체 위에 새겨진다. 띠를 이루는 색색의 재료들은 엄밀한 규칙과 통일감으로 장식적인 효과를 자아내며, 차곡차곡 축적된 구조물 내부에서 형성되는 빈 공간은 건축적 특성도 띄고 있다. 착시 현상에 의해 음각은 양각으로 반전되어 보이기도 한다. 사물이 비워진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시간성이다.

경계가 명료한 색색의 단면은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흔적을 각인한다. 마치 냇물이 흐르듯, 음악이 흐르듯 굽이치게 설치된 또다른 작품은 그 선조적 흐름으로 시간성을 한번 더 강조한다. 자연에서는 지층이나 나이테 등으로 나타나는 시간의 단면이 바코드같은 문명의 기표로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정교하게 짜맞춰 쌓아올린 구축적 질서를 통해 현대적 사물의 방식을 표현한다. 마치 선물세트의 빈 틀거리같기도 하고 어떤 상품을 만들어내는 주형같이 면밀히 계산된 조립품의 양상을 띄는 그것은, 일관성있는 기술적인 모델로부터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대적 사물의 체계와 유사하다. 실체가 아니라, 부재의 형태로 드러나는 그것은 소비나 생산의 코드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품의 모델처럼 기능상 폐쇄적인 체계로 구성된 것, 즉 추상에 가깝다. 한 시대의 생산과 소비의 질서에 의해 부침하는 사물은 시간이 흔적이 새겨진다. 작품 제목에 있는‘기억’이라는 단어는 현대적인 사물도 오래된 예술품이나 자연처럼 시간의 흔적과 두께,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발현되는 분위기(aura)를 가질 수 있음을 예시한다.

-월간 퍼블릭 아트 200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