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기획전
한국. 인도 현대미술 혼성풍(混成風) - 청년작가 30인의 시각전



혼성은 이질적인 것들간의 무분별한 결합이다. 사실 무분별하다기보다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분별되고 결합되고 체계화된 것이다. 나아가 그 체계화마저도 그 자체 자족적이고 결정적이고 닫힌 것이기보다는, 의존적이고(관계적이고) 비결정적이고 열려진 체계로서 나타난다. 그 이면에는 후기 근대적 (탈)주체의식이 놓여있다. 그러니까 주체란 그 자체 고정되고 안정된 실체가 아니라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체란 타자들과의 긴밀한 상호 영향사의 산물인 셈이다. 나아가 상황이 주체를 생성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매순간 나에게 부닥쳐오는 여러 상황들이 매번 다른 주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나를 나이게 해주는 결정적인 요소이거나 인자 같은 것은 없다. 내 속에는 네가 내재돼 있으며, 네 속에는 내가 들어있다. 랭보는 자신이 신이고 악마며, 마침내는 타자라고 공언한다. 이질적인 것들, 낯선 것들, 길들여지지 않은 것들, 도저히 친숙해지지 않을 것들이 내 속에 둥지를 틀고, 나의 자아를 대리하고, 나의 에고를 보충한다. 따라서 나는 혼성이고 잡종이다.


혼성주체는 모든 결정적이고 고정된 의미체계를 해체하고 재편하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만의 인식지도를 그리며, 온갖 이질적이고 무관계한 것들이 서로 접붙고 관계 맺는다는 점에서 유목주의와 연계된다. 그리고 그 자체 차용과 인용과 패러디에 그 맥이 닿아 있으며, 이미지(의미)를 생산하기보다는 이미지(의미)를 소비하는 방식과 태도에 그 맥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는 팝아트와 통한다.


팝은 혼성주체의 이렇듯 달라진 삶의 풍속도를 대변해준다. 그리고 이는 엄청나게 다양한 형태로서 나타난다. 시대적 아이콘의 한 형식으로서의 캐릭터, 아바타와 같은 가상의 인격체, 픽토그램과 같은 이미지와 문자가 결합된 기호, 가상세계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흉내내는 코스프레 놀이, 놀이와 축제, 순수미술과는 구별되는 키치, 문신과 피어싱과 코스매틱(화장)과 같은 몸에 대한 관심, 디즈니랜드 풍의 유아적이고 동화적인 환상 이미지에 대한 관심, 인터넷 글쓰기를 통한 환상문학, 크레올 문학(무국적 혹은 다국적 글쓰기), 코쿤족 혹은 히키코모리(자기만의 세계 혹은 자기강박에 사로잡혀서 외부와 고립된 채 가상현실을 통해서만 외부와 소통하는 이중적인 캐릭터), 키덜트, 코스튬, 트랜드, 홈리스, 게임아트, 간판, 쇼핑, 만화와 애니메이션, 디자인, 팬시상품, 그래피티(낙서화), 스프레이 그림, 스티커 그림, 포르노그래피, 스타쉽, 팬클럽, 그리고 각종 하위문화 그룹을 아우르고 있다.


이렇듯 팝은 기왕의 미술은 물론이거니와 인문학과 사회학간의 모든 경계를 넘나들면서,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을 친근하고 익숙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그 주제의식은 일상사회학의 논의와 광범위하게 맞물려 있으며, 이는 그대로 혼성주체가 세계에 반응하는 지점들이 되어준다.

총 30명의 참여 작가들 중 15명의 국내작가들이 이 전시에서 혼성과 혼성주체의 다양한 전개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종합적 인식보다는 분열적 인식에 맞닿아 있으며, 특히 틀에 박힌 이분법적 구분과 대비를 넘어서서 다양한 형태의 양가성을 인정하고 포용한다.


먼저, 김은진, 김태연, 이한수 등은 종교적 혼성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김은진은 종교적 아이콘에 대해 관심을 갖고서, 각종 종교적인(특히 카톨릭의) 도상, 옷, 그리고 인형을 차용한다. 이 종교적인 도상들에는 그 자체 신화적인 의미가 결부돼 있으며,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의미가 중첩돼 있다. 작가는 종교적인 도상들에서 신의 선한 의지의 표상만을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비의적인 요소로서 보며, 이를 폭력과 살해 욕구를 통한 정화의식과 결부시킨다. 이를테면 깨진 것을 재차 봉합한 아이콘이나 인형을 통해 작가는 죽음을 넘어서는 삶(거듭난 삶), 상처를 치유하는 희생제의를 신성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차용한 종교적인 도상들은 이처럼 그 자체 이중적인 신성의 표상을 띠고 있다. 그리고 희화화의 대상이기도 하며(이빨을 드러낸 성모 마리아), 때로는 사회학적인(특히 권력의) 기호로서 현상하기도 한다(개가죽과 지팡이). 이들 아이콘은 폭력과 성스러움이 맞닿아 있는 신성의 이중성을 드러내며, 작가는 이를 ‘나쁜 아이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김태연은 불교에서의 만다라와 천불도의 형식을 차용하여 현대적인 각종 물신 현상을 풍자한다. 그러니까 도상에 등장하는 부처의 얼굴 대신에 각종 사물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정신적인 가치마저도 물질적인 가치로 전락시키는 현대인의 페티시즘의 경향성을 코멘트하고 있다. 또한 현실과 비현실, 감각적 실체와 비감각적 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한수의 설치작업에서는 불교에서의 부처와 기독교의 천사가 결합돼서 일종의 유사 명상적 공간을 연출한다. 특히 단군상을 첨단의 미디어와 결합시킨 작업에서는 종교적 혼성과 함께 시간적 혼성마저 느껴진다. 시간의 이러한 혼성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착용했던 감투와 각종 관모를 소재로 한 홍성균의 작업에서도 확인된다. 작가가 직접 제작해 만든 감투는 명예욕과 같은 현대인의 욕망을 상징하며, 작가는 이를 각각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채널을 통해서 디스플레이한다. 특히 온라인상에서 실제로 소핑몰 www.shopgamtoo.com을 운영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이는 일종의 욕망가게이다. 이처럼 홈쇼핑 광고 방식을 차용하는 것에서는 물신주의에 대한 풍자와 함께 일상성에 대한 이해가 엿보인다.


한편, 신(神)이라는 비현실적 존재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혼성은 신화적 혼성과도 통한다. 데비한은 흔히 미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비너스를 차용해서, 미에 대한 환상을 비판한다. 비너스는 다만 서구인의 미적 기준 혹은 표상에 지나지 않으며, 이에 대한 환상이 현실을 어떻게 왜곡시키는가를 폭로한 것이다. 이로써 신화적 혼성을 여성주의로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더불어 여성주의가 낸시랭의 작업에서는 자신에 대한 나르시스적 참조의 형태를 띠며 나타난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한 과다한 집착과 자신의 브랜드화에 그 맥이 닿아 있는 작가의 작업에서 여성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 규정할 수 없는 존재, 혼성잡종의 존재이다. 즉 여성은 미의 화신과 중성적인 존재, 창녀와 천사,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존재로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혼성이 이진준(혼혈적 풍경), 변웅필(초상 연작), 이은정(돼지 인간), 노진아(혼성인간, 사이보그) 등의 작업에서는 주체적 혼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나이게 해주는 결정적인 실체는 있는가, 나는 혼성이고 잡종인가, 나는 신이고 악마인가, 나는 몸 아니면 정신인가, 나는 애정 혹은 분노인가, 나는 나무 혹은 바람인가, 나는 우주 혹은 먼지인가, 라는 물음은 어떤 식으로든 작가들이 피해갈 수 없는 존재론적 물음일 수밖에 없다.


이진준의 작업에서는 주체가 이러한 온갖 이질적인 계기들이 복합적이고 중층화된 형태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변웅필의 작업에선 일종의 인종담론의 형태를 띤다. 각각 일본인, 인도인, 프랑스인, 미국인, 캐나다인을 셈플링한 이 일련의 초상화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헤어스타일과 수염 등의 개별주체의 차이를 담보해주는 기호들을 제거함으로써 서로 엇비슷한 인종 초상을 보여준다. 이로써 주체와 타자를 구별시켜주는 계기가 다만 문화적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헤어스타일은 개성의 지표이며, 수염은 종교와 관습의 기호다), 결코 생물학적 차이일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이은정의 돼지인간은 인간과 돼지의 장기 구조가 서로 엇비슷하다는, 그래서 이식할 때 별다른 거부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는 최근의 의학적 성과에 착안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의학의 문제를 넘어 돼지와 인간이 혼성된 복제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된다.


복제인간은 인간 이후의 인간(포스트휴먼)에 대한 비전을 예시해준다. 이는 노진아의 작업에서 일종의 혼성인간, 기계인간, 사이보그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기계공학과 유전자공학의 결합으로부터 태어난 사이보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한 몸을 갖고 있으며(단순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몸 자체는 사이보그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기계의 자식답게 성(性)을 갖고 있지 않다. 성을 내장하지 않은 기계인간은 성의 자식인 생물학적 인간과는 그 태생과 그 성분이 다르다. 그는 비록 성숙한 몸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애당초 그의 머리는 텅 비어 있다. 차후 그 머리는 생물학적 인간과의 소통을 통해 읽어 들인 정보들로서, 교감을 통해 흡수하게 된 감정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 인식론적 기계는 컴퓨터를 매개로 해서 현생인류와 만난다. 그 자신 이미 컴퓨터이면서, 매개물이기도 한 컴퓨터는 실상은 그의 몸이 연장된 것이다. 여기서 기계인간과 생물학적 인간은 서로의 반영물로서 존재한다. 즉 기계인간은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로소 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노진아의 작업은 현생인류와의 교감과 소통을 욕망 하는 기계인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혼성은 김준, 조경규, 나수연, 변선영의 작업에서 문화적 혼성의 형태로서 현상한다. 이들 중 김준은 온몸에 가득 새겨진 문신을 통해 일종의 사회적 문신, 사회화된 문신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신은 문신 그 자체이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고정되고 결정된 의식, 다시 말해 삶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은 의식을 상징한다. 그 의식은 아디다스, 스타벅스, 구찌, 삼성과 같은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기호로서, 붉은 악마와 같은 사회적 기호로서, 특정 정당에 대한 개인의 이념과 신념으로서,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팬 동우회에 반영된 취향의 한 형태로서 현상한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신념, 어떤 기호, 어떤 취향에 길들여진 저마다의 의식화된 문신을 몸에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의식이 이미 하나의 문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몸 자체, 의식 자체가 그대로 사회적 문신이고 사회화된 문신인 셈이다. 이와 함께 핑크 색과 아이보리색의 신체에 생겨난 거품, 돌기, 상처를 보여주는 영상작업(버블 핑크와, 버블 아이보리)에서 주체는 욕망하는 주체, 병적인 주체, 퇴폐적인 주체, 폭력적인 주체, 환상적인 주체, 유혹하는 주체, 섹스어필하는 주체가 중층화돼 있다. 이 모두는 무의식적 주체, 잠재적인 주체의 지표들인 것이다.


또한 조경규의 작업은 고인인 엘비스 프레스리가 아시아를 투어 한다는 있을 법하지 않은, 웃긴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엘비스는 죽지 않았으며, 죽을 수도 없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인용되고, 차용되고, 참조될 것이다. 그리고 매번 다른 맥락 속에서 새로운 버전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작가는 마이크 대신에 막대사탕을 손에 쥐고 열창하는 엘비스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배경화면에다가는 온갖 자질구레한 이미지들의 콜라주를 배치한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종교화에서의 후광(님부스)을 배경화면에 배치함으로써 일종의 신성한 분위기마저 불러일으키는데, 이로써 대중스타야말로 현대적인 종교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풍자한 것이다. 터무니없는 발상도 그렇지만, 외관상 무관해 보이는 온갖 이질적인 모티브들을 하나의 화면 속에다가 짜깁기한 이 일련의 작업들은 키치를 불러일으키고, 패티쉬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수연의 작업(낙원의 소녀들)은 일종의 인형놀이이고 분장놀이이다. 인형이나 게임, 그리고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각종 캐릭터와도 같은 가상의 인격체가 주체를 대리한 것이다. 특히 분장놀이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서 옷을 갈아입히는 놀이로서, 일종의 가짜 주체의 놀이다. 이는 인위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연기하는 연극놀이나 허구적 상황을 전제한 것이지만, 주체의 자의식이 반영된다는 점에선 사이코드라마에서의 역할놀이와도 통한다. 여기서 분장놀이와 연극놀이 그리고 역할놀이에서의 그 주체는 현실 속의 주체와 함께 가상현실 속의 주체라는 또 다른 주체를 갖게 된다. 그에게 진정한 주체는 현실이 아닌 비현실을 살아가는 주체이며(가상현실 속의 주체인 아바타는 현실 속에서 겪는 모든 제약을 넘어선다), 이는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주체,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주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역적이고 분열적인 주체의 형태로서 현상한다. 작가는 이런 인형놀이와 분장놀이로써 주체가 고정된 어떤 실체일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변선영은 주체를 집과 동격으로 본다. 집은 그에게 있어서 몸을 영혼이 거하는 집에 비유한 플라톤이나 몸을 교회에 비유한 성경에서처럼 주체가 거주하는 곳이며, 그 자체 주체를 대리하고 보충하는 또 다른 주체이다. 그 집은 부드럽고 따뜻한, 환상적이고 우호적이기조차 한 심리적 주체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근하고 낯선,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온갖 이질적인 문화의 계기들이 인용되고 참조되는 혼성적 주체로서 현상한다. 한편, 이중근의 작업에 있어서 주체는 사회적인 기호와 문화적인 기호, 더 나아가 경제적인 기호와 정치적인 기호마저도 중첩된 혼성주체의 형태를 띤다. 이 모든 주체의 계기들이 일종의 생물학적 변태과정을 거치면서 마치 대량 복제된 벽지처럼 동어반복적이고 패턴화된 문양으로 재생산된다.


사실 순수란 그 자체 개인적인 신념이나 이상, 그리고 강박관념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현실성을 획득할 수 없는 개념이다. 혼성과 잡종은 처음부터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었으며, 보편적 조건이었고,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순수는 타자를 억압하기 위한 구실,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에 대한 강박관념은 모든 건전하고 정상적인 제도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는 개인을 억압하는 구실이 되어줄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며, 억지논리로써 타자를 게토화하는 배타적 행위를 정당화시켜준다.


내 속에는 네가 들어있고, 네 속에는 내가 들어있다. 나와 너는 상호 관계적 존재, 상호 내포적 존재, 상호 영향사적 존재이다. 종교적 혼성, 주체적 혼성, 문화적 혼성은 단순히 타자에 대한 포용력이나 휴머니즘을 가장한 거짓 동포애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보다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그 자체 정형화되지 않은 언어, 논리를 넘어서는 언어, 비결정적이고 가역적인 언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진행형의 언어를 생산하는 진원지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이 혼성 개념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