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진. 자폐에 대한 자의식이 만든 인형들
임수진의 석사논문의 제목은 <자기표출의 자발적 제한에 관한 작업 연구>이다. 설핏 미술치료를 연구하는 미술교육학 전공자의 논문을 연상시키는 이 제목은 여타의 논문 제목들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구체적이고 전문적이다. 흔히 그렇듯이 석사논문이 작가 자신의 작품론임을 고려할 때, 이는 그대로 임수진의 작업을 지배하는 주제의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기를 표현해야 할 경우가 있고,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러한 자기표현욕구를 스스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때 나로 하여금 그 욕구를 제한토록 하는 것은 내적 동인이 아니라 외적 동인이다. 합리적인, 상식적인, 이성적인, 통념적인, 통속적인 윤리적 잣대가 선입견과 편견으로 구조화된 관습의 지평을 축조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개인을 단죄하는 일종의 공인된 사회적 폭력이 나의 욕망을 억압하고, 나의 의식을 옥죄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에는 억압된 욕망들과 일탈하고 싶은 욕망들이 들끓는 무의식이 상처(트라우마, 심리장애)가 돼 자리를 잡는다.
임수진에게서 그 심리장애는 자폐로 나타난다. 이것이 누군가 툭하고 건드리면 공처럼 안쪽으로 동그랗게 몸을 마는 <소파인간> 혹은 <자폐소파>로서, 누가 부르면 마치 계란 노른자처럼 하얀 이불 속에 폭 파묻혀 숨는 <노른자 인간>으로서,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절주절 곱씹다가 마침내는 그 말들과 생각들에 온통 얽히고설켜버린 <털실인간>으로서 나타난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깔고 앉는다고 생각하고(깔개인간), 자신의 몸 위로 밟고 지나간다고 생각한다(껌 인간 혹은 껌 딱지 인간). 그는 자기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외면하기 위해 머리를 땅 속에 파묻은 채 물구나무를 서는가 하면(타조인간), 마침내는 자신이 마치 비누처럼 닳아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비누인간). 그리고 그는 몸통으로부터 목을 길게 빼 올린 채 자신에게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 날 수도 있는 이 모든 일들을 골똘히 생각한다(반성하는 인간).
한편으론 공감이 가면서도 엉뚱하기도 한 이 모든 주체들은 임수진의 자폐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그 자기반성적인 자의식으로부터 태어난 자화상들이다. 그 자체론 결코 유쾌할 수만은 없는 자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작가는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자신의 심리적 자아를 사물처럼 대상화하는가 하면,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한갓 인형놀이로 전이시키기도 한다. 그 인형은 자폐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전개되는 양상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변형되고, 변질되고, 변태된다. 이는 마치 질 들뢰즈가 의식의 유목성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기관 없는 신체’를 연상시킨다. 즉 제도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은, 그래서 자유자재로 변형되고 변질되고 변태되는 의식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박용일. 어수선한 풍경,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풍경
<땅>, <잠자는 땅>, <풍경- 바람>, <어수선한 풍경>은 박용일이 10년 넘게 터 잡고 살아온 일산의 주변 풍경을 그린 그림들의 주제어들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그대로 일산이 개발돼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산을 포함한 고양시는 최근 십수 년 내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도로서 개발화가 진행된 도시이다. 오죽하면 그런 경우로서 세계 10대 도시에 꼽혔을 정도이다.
작가의 그림 속엔 그 낱낱의 과정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지만, 구체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흔히 그렇듯 개발과 투기로 얼룩진 땅이 그 벌건 속살을 드러내지도 않거니와, 새로운 주민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내몰리듯 자기의 땅을 떠나는 원주민의 분노를 찾아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름모를 들풀 몇 포기로 어설픈 생태 운운하면서 도사연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작가의 그림 속엔 이 모든 풍경의 계기들이 유기적으로 녹아들어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을 자기 내부로 불러들여 심미화한 일종의 실존적 풍경 또는 존재론적 풍경으로 부를 만하다. 이는 문명의 흔적이나 삶의 상처가 깡그리 지워진 국적불명의 풍경화가 대부분인 현재의 풍경화단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건축용 내장재인 테라코타에다 한지의 원료인 닥을 풀어 섞어 만든 자신만의 안료로 화면을 칠한 다음, 그 위에다 먹과 아크릴을 혼용해 그린 작가의 그림은 얼핏 보기에는 그저 무분별한 붓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큼직한 붓질이 정작 경작치도 않으면서 땅값을 올려 받기 위해 흉내로만 심어놓은 옥수숫대를 지우고, 황량한 들판 너머로 설핏 그 모습을 드러내는 회색빛 아파트를 뭉갠다. 지우고 뭉개는 붓질의 이면으로부터 몇몇 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옥수숫대와 아파트 그리고 들판이 그 경계를 잃고 혼미한 흔적만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땅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터로 변질되며, 황량한 들판은 어수선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어수선한 풍경은 말하자면 개발의 과정을 낱낱이 간직하고 있는 땅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이며, 마치 주름인 양 인공의 폭력이 겹쳐진 땅의 결을 되살려낸 것이다. 이로써 거의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킬 만큼 무분별한 붓질이 만들어낸 이 어수선한 풍경은 사실은 시대를 향한 작가의 현실인식이 반영된 사회학적 풍경이며, 더불어 그 현실에다가 자기의 내면을 투사한 존재론적 풍경인 것이다. 흑백의 모노톤으로 나타난 그 풍경의 빛깔은 콘크리트 구조물의 그것처럼 암울한 잿빛을 닮아 있다.
이렇듯 작가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황량한 들판 위에 작가의 황량한 마음이 겹쳐진 심리적 풍경이며, 어수선한 풍경 위에 작가의 어수선한 시대인식이 포개진 사회학적 풍경이다.
송명진. 풍경의 개념적 환원
<순간 멈춤 - 이미지 캡처>, <풍경의 표면>, <과장적 징후>, <정원술>은 송명진의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의식들로서, 그림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먼저, ‘순간 멈춤 - 이미지 캡처’에서 작가는 구름이 생성되는 장면이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 그리고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 등의 현재진행형의 과정 중에 있는 유기적 현상을 마치 드라이아이스로 고착화시켜놓은 듯이 보여준다. 더욱이 이 장면들은 자기 외적인 관계의 망으로부터도 이탈된 듯 그 자체만의 자족적인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로부터 즉물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인상마저 든다.
그리고 ‘풍경의 표면’에서 작가는 풍경의 실재에 대한 일종의 개념적 환원을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풍경은 녹색의 단일색조로, 원근법으로부터 놓여난 평면적 화면으로, 그리고 명암을 비롯한 일체의 세부질감이 지워진 일러스트와도 같은 밋밋한 화면으로서 나타난다. 이로써 풍경은 한갓 기호로 환원되고, 이로부터 친근하면서도 낯선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평면적 화면으로 환원된 풍경에선 마치 융단이나 장판이 둘둘 말린 듯한 인조잔디가 연상된다. 그러니까 그 밑바닥에 흙을 잔뜩 물고 있어야할 잔뿌리와 흙덩이 대신에 빨간 고무 패드가 덧대어져 있는, 실리콘이나 고무와 같은 연성의 부드러운 소재로 만든 인조 풀이 연상된다. 더욱이 작가는 실제로 평면의 패드를 칼로 오려낸 듯한 형상으로 풀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평면적 환원을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과장적 징후’에서는 풍경이 그 자체 결정적인 형태로서보다는 현재진행형의 암시적인 형태, 있을 법하고 가능할 법한 형태로서 전이되고 있다. 이를테면 풀밭 사이로 난 길이 동시에 머리카락의 가리마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띠는가 하면, 무덤에 웃자란 풀들이 온몸에 연성의 유기적인 돌기들을 곧추세우고 있는 일종의 동물성을 내장한 듯이 현상하기도 한다. 이처럼 낯익은 풍경들이 불현듯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한 본성을 드러내면서 다가온다. 말하자면 그 자체로서 분명한 것, 결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대신 모든 것은 이중적이고 중의적이고 양가적이다.
그리고 ‘정원술’에서 작가는 관계의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져 나온 인공적인 자연을 보여준다. 이는 진정한 자연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변질되고 변형된 자연, 자연의 흉내만을 낼뿐인 가짜 혹은 거짓 혹은 의사 자연을 주지시킨다. 그 이면에는 자연을 한갓 소유물의 차원으로 축소시켜버리는 인간의 왜곡된 욕망이 놓여져 있다.
2006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