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서점과 수원의 미술 전시장에서 시간차를 두고 열린 이해균의 전시는 경기일보에 연재되었던 그의 기행문과 삽화를 책자로 만들고, 그 원화를 함께 선보였다. 문인이 글을 쓰고 화가가 삽화를 넣는 통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화가의 여행기에 자신의 그림을 삽입한 형식이어서 글과 그림의 유기적 통일성이 돋보이고, 책자 자체도 전시 팜플렛의 범주를 벗어나 하나의 예술품같은 가치를 지니게 된다. 전시장 한 켠에 쌓아놓은 책자 [수미산 너머 그리운 잔지바르]는 삽화가 곁들여진 여행기이다. ‘이해균의 세계여행 스케치’ 1권이라는 부제가 달린 것으로 보아서, 앞으로도 계속될 시리즈라는 것을 암시한다. 화가는 수미산과 티베트, 메콩 강과 남부아시아, 빅토리아 호수와 동부 아프리카 등을 여행했다.

책머리에서 그는 ‘마음 다스리기에 가장 좋은 3대 요소가 독서, 여행, 대화’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여행이 ‘성찰과 관조’를 위한 것임을 밝힌다. 책의 1부 ‘수미산 가는 길’에서는 막고굴의 벽화, 조장(鳥葬)의 풍속, 티베트의 풍광이 펼쳐지고, 2부 ‘메콩 강 물길 따라’에서는 라오스, 하노이, 호치민, 프놈펜 등 아시아 지역이, 3부 ‘인류의 시원 아프리카’에서는 적도를 지나 나일의 원류를 따라가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기행문 곳곳에 삽입된 시들은 각 지역에서 겪은 작가의 경험과 심경을 보편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소설가 박완서는 이해균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마치 여정에서 만나는 찻집의 휴식처럼 끼워 넣은 시들도 신선하고 적절하여 보기 좋았다’고 하면서,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는 시적 감성을 하나씩 하나씩 뽑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고 평한다.
가령 아프리카 여행지에서 인용한 헤르만 헤세의 글에는 ‘구름은 모든 방랑과 탐구와 향수의 영원한 상징이다. 구름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떠 있듯이 인간의 영혼은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나 역시 한조각 구름으로 방랑길을 떠나 낯선 인간으로 시간과 영원 사이를 떠돌며 인생을 마치게 될 줄 몰랐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문장은 화가의 처지가 강하게 감정이입된 것이다. 인간은 지상의 붙박힌 삶을 살아가면서 미지의 세계로의 유목과 방랑을 꿈꾼다. 그러나 실제로 자리를 털고 떠나기는 쉽지 않다. 이해균은 혼자 배낭 여행을 즐긴다고 한다. 특히 깊숙하게 숨어있는 세계 곳곳의 오지문화를 접하면서 자연이 주는 감동을 기대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티벳, 남부아시아 등지에서 한달씩 머물렀다. 홀로 떠나며 한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는 것은, 장소에 대한 피상적인 감상기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1년에 두 달, 여름과 겨울 한달씩을 투자해서 여행을 한다. 무용가 홍신자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읽고 수행적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번 여행기에서는 티벳에서의 환상적인 경험, 아득한 별밤의 느낌 등이 글과 삽화에 실려 있다. 책의 후기에서 그는 ‘우주의 중심 수미산의 밤하늘에 혼을 빼앗는 은 싸라기 같은 별빛’이나 ‘영혼까지 외로운 라오스 산중의 몽롱한 운무’, 그리고 ‘진정한 여유의 미학을 일깨워준 잔지바르 해변의 추억’을 통해 ‘혼탁한 내 삶의 정화’를 느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저 아름다운 장면만을 실으려 하지 않는다. 이해균의 스케치에는 오지든 어디든 무관하게 편재해 있는 역사의 아픔도 기록되어 있다. 가령 아시에 지역에서는 앙코르와트의 감동과 더불어 킬링 필드를 기억하고, 아프리카의 이국적 풍광과 더불어 잔지바르 타운 거리에 있었던 노예시장의 흔적을 기록한다.
이해균의 경우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고 나중에 화실에서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종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직접 사생한다. 구불구불한 선으로 빠르게 그어진 선들은 현장의 느낌을 그대로 담고 있다. 물론 그가 단순히 삽화가는 아니기 때문에 인상적인 것은 화실에서 다시 그리기도 한다. 드로잉은 다른 작품의 기초가 된다. 특히 오지 여행을 통해 원색(천연색)을 만날 수 있었던 점은, 모노톤 중심의 그의 작품에 자극이 되었다고 말한다. 전시장에는 여행 스케치 원화들과 더불어 오방색의 불교 경문을 걸어놓았다. 신심을 우주에 전파시키는 대승적 차원의 내용을 가지는 현지의 공예품으로, 실내에 걸려있어 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원색의 그림들과 어우러진다.

이해균은 수원에서 거의 30여년을 살고 있는 화가로, 수원 시내에 작업실이 있다. 이번 전시는 석 달 정도 준비했다. 2005년도 같은 장소에서 연 개인전 작품을 보면, 합판, 하드보드, 캔버스 위에 유채로, 하늘을 향해 용트림하는 영험한 기운이 서린 신수(神樹), 느티나무, 소나무, 엄나무 등을 그린 그림이 있다. 무한을 떠오르게 하는 가로수 길과 길 위에 있는 희미한 그림자처럼 처리된 인간, 또는 인간들, 그리고 추레한 일상의 거처 등을 질척한 안료에 실어 표현했다. 대체로 무채색의 칙칙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낮은 지평선 위 하늘 가득히 펼쳐지는 일몰과의 조우를 그린 그림에서는 강렬하고 표현주의적인 붓 터치가 두드러진다. 에너지가 가득 실린 선적인 회화는 이번 전시의 삽화에서도 보여 지는데, 여행지의 인상적인 기념물 뒤에서 기(氣)가 뻗어 나오는 듯한 선적인 표현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선은 묘사나 모방의 기능을 넘어서, 작가의 영감과 직관을 직접 표현하는 매체가 된다.
그것은 추후에 완성되어질 타블로의 준비단계, 즉 단순한 밑그림을 넘어선다. 미술사에서 이러한 전통은 자연 사생이 고무되었던 르네상스를 시발로, 자연과 대면하는 개인의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를 거쳐 그리고 타블로와 소묘를 일치시켜 나갔던 인상주의 등에서 발견된다. 펠드만은 선의 흐름과 패턴은 무한히 복잡하지만 선 그 자체는 결코 애매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선은 사물의 특성을 느꼈던 경험적인 방식대로 사물을 지시해 준다는 것이다. 화가는 자신에게 인상적인 사물의 외곽선을 소묘의 선으로 더듬듯이 바라본다. 또한 글과 그림이 한데 어우러진 이해균의 작업은 회화가 종국에는 글쓰기의 작업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는 회화와 글쓰기를 근접시키면서, 작업으로서의 텍스트와 텍스트로서의 작업이라는 일반화된 근육작업 기록ergographie을 이야기 한다. 이를 통해 그리기와 글쓰기, 창작과 비평에 드리워진 제도적 경계를 넘나들고자 한다.
구별되는 세계의 경계를 넘는 것은 여행가의 일상이기도 하다. 제 1세계나 2세계가 아닌, 오지 탐험은 이성과 계몽 이전 세계로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경계의 위반을 통해 원초적 시공간으로 다가가는 것은 신비체험의 근간을 이룬다.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구분을 넘어서는 확장된 의식이 깨달음을 야기한다.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안]에서 신비주의란 오래 전에 매몰된 원초적 정신 상태로의 퇴행이라고 하였지만, 이러한 원초적 감성은 단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현대의 정신에도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그것을 강력하게 예증하는 것 중의 하나가 현대미술이다. 한편 이러한 축복과도 같은 경험은 찰나의 순간이고, 짧게 지속될 뿐이다. 작가의 경우 이러한 체험을 위해 지금 이곳을 떠나고, 작업으로 경험을 표현함으로서 한정된 표현 방식을 초월할 수 있다. 모호하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을 자명하게 하고 물질화 하는 것은 화가의 영원한 욕망이자 숙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