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찬규의 그림은 특정한 상황성이 문득 멈춰 진동하는 풍경이다. 광막한 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듯 인간이 단독으로 위치해있는데 그/그녀는 감정이 응축된 얼굴 표정, 심리를 언어화 한 손짓과 몸짓만으로 무언극을 펼쳐 보이는 듯하다. 그 장면은 심리적인 연출의 극화다. 그는 자신만의 고정 배역을 반복적으로 등장시켜 어떤 감정과 상황을 함축해서 전달한다. 그것은 마임의 한 ‘씬’이자 말을 잃고 오로지 몸과 표정으로 드러나는 몸짓 언어의 형상화다. 감정을 드러내는 이 몸짓, 제스처는 관자의 시선에 말을 넘어서는 울림과 파장을 ‘표현적’으로 전달한다.
인간의 감정은 신호를 내보내면서 우리의 표정, 목소리, 몸짓에 변화를 일으킨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표현적이며 제스처란 의도적인 표현행위이다. 그래서 감정은 육체를 풍경으로 만든다. 통상 감정은 자신이 감정적이 되었을 때 세심해지는, 즉 자신의 상태를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능력이자 다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고찬규는 결국 자신의 감정을 그리고 있고 누군가의 몸과 얼굴에서 감정을 읽는다. 그리고 이를 섬세하게 조형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이 그림은 상형문자처럼 다가온다. 그림 속 인간은 자기 몸으로 그림을 그리고 서사를 기록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우리들을 정면으로 쳐다보는데 관자를 쳐다보는 이 응시의 시선은 언어와 문자를 지운 자리에, 침묵을 지닌 체 정서적으로 예민한 부위에 호소한다. 알다시피 문자는 항상 인간을 짓누른다. 어떤 메시지든 문자로 포착되면 즉각 고형화되고, 고체 특유의 경직성과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에 비해 예술, 이미지는 부드러운 액체처럼 미끄러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부풀어 오른다. 문자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을 긁어 주면서 문자의 질곡을 풀어주고 문자의 영역바깥에 위치한, 언어화될 수 없는 것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절망일까? 그저 가끔 올라오는 희망을 위해서 일상을 버틴다는 느낌을 주는 이 소시민들의 작은 몸짓은 대부분 놀라고 당황하는 표정이자 반복되는 일상 속에 조금씩 가라앉아있거나 그 무게로 인해 침잠된 우울과 고독을 가면처럼 두르고 있다. 그 얼굴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매번 접하는 어느 한 순간의 느낌이나 정서, 불안정한 인간의 욕망을 긴장감 있게 그려 보인다. 특히 그가 묘사한 인체는 해부학에 따른 ‘각’으로 인해 아주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힘차고 폭발적인 선과 부드럽고 유연한 선들이 엉켜 활력과 기운을 전해준다. 그만큼 선은 핵심적인 요소다. 정적으로 얼어붙은 화면에 인물들은 서서히 미끄러지고 감정의 외화를 시각화한다. 그래서인지 무척 영상적이라는 생각이다. 목탄은 부드럽고 날카로운 윤곽을 보여주고 분채로 인한 견고하고 깊이 우려낸 색감과 그로인한 단호한 평면성은 하나의 막, 무대를 연상시킨다. 그림 속 인물들은 그 배경 안에서 드라마를 펼친다. 연극적이고 문학적인 느낌이 강한 것은 그런 장치 때문이다. 약간의 단서를 가까스로 제공하는 소도구들과 단독으로 위치한 인물은 보는 이들에게 문장을 만드는 단어들처럼 존재해서 우리는 그 내용을 직접적으로 확인한다. 그런데 그 인물은 다소 정형화되어 있어서 ‘클리셰이미지’가 되고 반복적인 기호로 인해 메시지가 약화된다는 인상을 주는 편이다.
그의 그림에서 얼굴은 커다란 부분이다. 그 얼굴은 많은 이야기를 떠올려주는 매개다. 기쁨이나 분노, 절망, 증오와 같이 한순간에 폭발하는 감정도 얼굴에 드러나며 성격이나 개성처럼 좀더 영구적인 특징도 얼굴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시각적 장면이 분명하지 않을 때 얼굴의 이미지는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얼굴은 스스로 모든 것을 ‘누설’한다. 인간의 얼굴은 주체가 타자와 만나는 지점이자, 세상과 마주하여 소통하는 최전선이다. 또한 내가 나를 인지하고 내적 상태를 투사하는 장소가 되기고 한다. 따라서 얼굴에는 한 개인의 복잡다단한 내면과 역사, 그 시대의 상, 역사의 굴곡과 권력의 구조들 또한 각인되어 있다. 얼굴은 쉽고도 난해하다. 미술가들이 인간의 얼굴을 표상하려는 오랜 시도는 그것이 사실과 외형의 표상을 넘어 주체와 정체성의 문제, 사회적 메타포와 삶의 방식을 은유하는 역동적인 표상의 장으로 기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물의 표상은 직접적인 ‘사실’ 과 함축적인 ‘상징’ 양자사이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인물 대상의 감추어진 내면을 표현하는 것은 외적 기호에 대한 객관적 관찰보다는 모델에 대한 화가의 지식에 근거하는 것 같다. 즉 인물화는 주인공과 관람자, 그리고 화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화학작용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풍경화나 정물화에 비해 다층적인 해석과 읽기를 요구한다. 고찬규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 불가피하게 표출되는 인간의 얼굴과 몸짓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몇 가지 유형을 추출해 놓았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그만의 관념이 되었다. 그는 모델을 놓고 그리지 않고 자신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하나의 얼굴, 하나의 몸짓을 길어 올린다.
얼굴은 “지구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표면(surface)”(프란시스 자크)이다. 얼굴은 그 존재를 특징짓기 때문이다. 얼굴은 우리 몸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며 가장 표현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내재한 것을 밖으로 풀어내면서 우리 몸에서 소통의 역할을 가장 잘 해내는 부분이다. 또한 얼굴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정체성이나 성격을 측정하는 도구가 된다. 다른 사람의 내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얼굴의 표현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결국 얼굴은 일종의 열려진 창이다. 그런가하면 얼굴은 사회적인 텍스트이자 비명(碑銘)이다. 얼굴은 다른 사람들이 읽도록 드러내는, 개방된 텍스트다. 그런가하면 그 얼굴은 거울이기도 하다. 나는 누군가의 얼굴을 통해 결국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얼굴그림이 매력적인 부분이 여기에 있고 사람의 얼굴을 관찰하는 일이 그토록 흥미로운 것 역시 여기에 기인한다.
얼굴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단호한 평면, 배경이다. 원근법이 통하지 않는 근거리 공간이며, 특별한 좌표축도 없고 중심도 없고, 방향이 부재한 공간, 매끈한 공간 말이다. 빛에 의한 명암의 대비는 우리가 공간을 파악할 수 있는 절대적인 좌표가 되는데 이 그림은 빛과 어두움의 고정적 가치를 제거하고 색의 관계를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고 있다. 그래서 배경은 단호한 색채로 멈춰있다. 작가는 그 색을 통해, 색의 상대적 대비를 통해 형태를 보완하고 감각을 표현하다. 이는 색을 더 이상 어떤 특정 사물 혹은 대상에 귀속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이고, 색의 순수 정서를 생산하는 것이자 색으로써 스토리를 구성한다. 따라서 공간은 한계를 갖지 않은 무한이 된다. 이러한 공간은 시각에 호소하기 보다는 감정의 영역을 자극한다. 이 그림을 보면서 광막하고 고독하고 황량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색채로 물든 단호한 배경, 공간 역시 인물의 표정과 몸짓 못지않게 서사적인 기능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고찬규의 채색화가 지닌 의미 있는 영역이다.
박영택
#2898
고찬규-언어를 넘어서는 몸짓들
박영택
2007. 02. 28.
박영택
서울 출생
인명사전 바로가기 : www.daljin.com/author/688
미술평론가 박영택(b.1963)은 [얼굴이 말하다, 마음산책(2010)], [예술가의 작업실(2012)]을 저술하였고 아시아프 총감독(2010)을 역임하였으며,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