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모든 이미지 안에는 당대의 유토피아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이 꿈꾸는 낙원은 지상계 너머에 있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현실 속에서 탐구되기도 했다. 자연이 바로 그 대상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 조화로운 관계를 도모할 때, 그것이 현실적 삶의 공간아래 가설될 때가 바로 지상낙원이리라. 애초에 인간의 삶의 공간으로 정해진 곳은 바로 강과 바다에 인접한 곳, 물가였다. 모든 문명의 발원지, 최초의 도시는 그런 곳에 인접한 장소에서 실현되었다. 특히 지상의 끝인 바다에 가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중력계에 완강하게 저당잡혔던 현실로부터 이탈되거나 잠시나마 자유를 얻었다고 여겼으리라. 여행이나 피서도 그런 맥락이다. 아울러 정원과 풍경화의 등장 역시 지상의 낙원의식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동양의 산수화란 바로 그런 의식이 가장 적극적으로 표출된 그림이다. 마시모 비탈리의 사진은 사람들이 도시를 뒤로 하고 바다와 물가를 찾아 나선 기행을 보여준다. 그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모두 햇살을 쐬느라 분주하다. 바닷가에서 성기만 가린 체 드러누워 오후의 따사로운 햇빛으로 몸을 말리고 오수를 즐기는 그들의 자태는 마치 바다표범들의 군집생활을 연상시킨다. 쇠라의 ‘일요일 오후의 그랑자트 섬’(1884-86)을 보는 듯도 하다. 기본적으로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 같은 모습은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이나 모네의 ‘라 그르누이에르’, 르느와르의 ‘보트 파티의 점심’ 등과 같은 인상주의 주제를 계승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까지도 서구이미지에서 흔하게 검출된다. 동시대 한국작가들에게서도 엿보이는데 방병상의 한강공원풍경이나 인효진이 일산호수공원을 찍은 사진들은 그런 맥락에 위치해있다. 앞서 쇠라의 그림 안에는 다양한 연령과 성별, 중산계층과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섞인 당대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변질된 생활의 패턴과 휴일과 여가, 오락 개념의 등장을 선언적으로 보여주는 이 그림은 당시의 사회학적 언급으로도 비쳐진다.
사회의 새로운 근대성을 기념비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공간은 물질적인 측면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지니고 있는 정체성과 인식을 형성하는 사회적 의미 또한 갖고 있다. 공간이란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삶이 조직되는 구체적 형식이고 경험과 사유가 여타 다른 사회적 요소들과 직조되도록 하는 물리적, 인식적 지반이다. 인간은 몸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부득이 공간을 차지한다. 그래서 공간 안에서 실재하는 물체인 육체는 공간과의 연관성 속에서 인지된다. 비탈 리가 보여준 사진 속 공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비탈리는 194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사진을 잔공하고 유럽 유수의 잡지사에서 포토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모국에서는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다가 ‘90년대 들어서서 다시 사진 작업을 한 작가다. 이번에 선보인 작업은 대부분 해변가, 물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군상들이 집합적 사진이다. 커다란 화면에는 대부분 저 멀리로 그들이 떠나온 도시가 자리하고 있고 하단에는 육지와 물가의 경계가 위치해있다. 그 경계에 새까맣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여름이고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 일상에서, 도시의 한 복판에서, 집에서 빠져나와 이리로 밀려든 이들이다. 우리들의 시선 역시 이들을 따라 화면 하단으로 내몰린다. 그들은 곧 돌아갈 도시의 삶터를 뒤로 하고 잠시 유예된 시간, 지상의 낙원을 만끽하고자 한다. 이곳은 모두 이탈리아의 특정 지역들이다. 아드리아해에 면한 반도들이고 이탈리아의 남동부 해안의 항구도시들이다. 이탈리아의 남녀노소가 모두 수영복 차림으로 이곳에 와서 각자 적당한 장소, 평평하고 드러눕기 좋은 장소를 찾아 커다란 타월을 깔고 드러누웠다. 인간은 이렇게 오랫동안, 여전히 자연을 자신의 삶 안으로 끌어당기고 이용한다. 멀리서 조망한 시선에 의해 포착된 사람들은 조그맣다. 이들은 사진적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작자 그 시간, 공간을 즐기고 있다. 물속에 들어가 겅중거리거나 썬텐을 하거나 파라솔 그늘 아래서 독서를 하는 한편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더러 가족들끼리, 친구나 연인끼리 속삭이고 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이곳에 온 이들이다. 한가로운 한 낮을 보내며 인생의 한 시점을 풍요롭게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조금씩 다르다. 몸매가 다르고 사회적 계층에 따라 미묘한 균열을 드러낸다. 그런 것들을 읽어나가는 재미, 관음증을 유발하는 엿보기가 흥미롭다.

작가는 우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선별하고 작품의 대상과 격리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시점을 잡았다. 상당히 먼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세밀한 묘사나 반복도 놓치지 않는 연작을 보여진다. 작가는 자신이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작품이 복잡하고 때로는 서로 모순된 해석을 가능하게 할 때 재미를 느낍니다... 달콤한 색채의 물결이 잊혀진 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한편으로는 고대 회화에서 보이는 종교적 의미의 연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사람들의 각기 다른 행동방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는 알려고 하지 않아요..단지 제 앞에 보이는 것만을 의식하지요. 한 지점을 고수하고 저의 시야 안에 대상이 들어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은 시각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제가 담아낸 이미지들은 제가 계획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상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으며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제게는 세상을 체험하는 자유로운 실습인 셈입니다.”(작가노트)
이것은 단순한 풍경사진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사진은 인간의 가장 오랜 욕망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 투쟁, 시선의 욕망 등과 얽힌 엄청난 의미를 내장한 텍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