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시대를 비롯한 전통사회에서는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공동체의 것이었으므로, 굳이 공공미술이라는 범주가 필요 없었다. 모닥불 주위에 모인 부족들이 쓰는 탈, 해안가에 세워진 거인 상, 대성당같은 건축물에 붙어있는 성인성자 상, 민초들의 종교의식을 위해 절 앞마당에 걸린 걸개그림 등이 그러한 예술의 예이다. 그 때의 예술은 오늘날처럼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의식(儀式)을 위해 존재하였고, 자연 및 우주와 연결되는 마법적인 수단이었다. 그것은 개별적 인간을 초월하는 사회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 다. 예술은 공동체의 구성인들에게 정체성과 의무를 부여해줌으로서, 혼돈과 우연, 그리고 불확실성을 극복하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 질서와 균형 감각을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진정 공공적이었다.

오늘날에도 공동체적 가치가 다시 호출되는 장(場)에서 예술은 다시금 상호 간에 교류를 트는 기능과 의미가 부여된다. 가령 1980년대 민주화 시위 현장에 걸려있던 폭력 희생자의 아이콘이나 2002년 월드컵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져 활용된 각종 이미지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원초적 공공예술은 개인적인 감각에 의해 만들어지고 개인에게 소유되기 위해 상품으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의식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서로 주고받는 선물과도 같이 존재한다. 오늘날에도 이상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은 개인에게 명성과 부를 안겨주며 시장에서 거래될 뿐인 상품을 넘어서며, 예술가라는 존재 역시 단순한 직업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현대사회가 되자, 미술 역시 다른 분야처럼 전문적인 부문으로 진화하면서 총체성을 잃고 극도로 지엽화되었다.

분화라는 면에서 미술 역시 다른 분야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물질적 감각화가 아닌, 개념화로 현대미술의 방향이 흘러가면서 소통은 미궁에 빠져 버렸다. 현대미술은 기술과 솜씨가 요구되는 객관적인 생산물보다는 ‘무엇이 예술작품인가’를 결정하는 작가의 의도가 중시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예술가 주체의 역할이 과도하게 설정된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예술을 공적 영역과 분리된 사적 영역으로 급속하게 편입시킨다. 예술의 사(私)영역화는 어떤 기준이 없이 모든 것을 용인하는 분위기와 더불어 현대미술을 극단적으로 상대화 시켰다. 그러나 비평가 수지 개블릭이 지적하듯, 모든 것이 미술이 될 때 미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위험이 있다. 미술의 개념화는 수많은 상품으로 둘러싸인 현대사회에 저항하는 의미가 있었지만, 이 역시 상품화의 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계화된 일상적 삶에 거리를 둔다는 ‘낯설게 하기’ 또한 타성화된 도발로 곧 익숙해진다.

개념적인 현대미술은 그럴듯한 완성품을 추구하지 않고, 미술관을 텅 비워놓거나 쓰레기로 가득 채우는 일, 심지어는 자신의 팔을 총으로 쏘는 따위의 맹목적이고 자극적인 행위와 사건들이 벌어지는 장으로 변한다. 그러나 비물질화를 지향하는 개념적인 미술 역시 제작비가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에, 관료화된 제도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는 역설을 낳았다. 섬처럼 고립된 미술계는 자신들만이 소통할 수 있을 뿐인 언어의 문법적 갱신을 통해 스스로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론적으로 예술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의 객관적 효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예술에 있어서의 진보와 혁신은 과학기술 같은 분야의 그것과는 다르다. 가령 새로운 건축공법의 도면이나 컴퓨터의 회로도를 알아보지 못해도, 그 생산물을 통해서 대중들이 새로움의 가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보편성을 주도하는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새로움의 주기는 더 급격하고, 사회에 대한 파급효과도 예술보다 크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미술 행사, 가령 대중매체의 선전이나 교양화 작업에 의해 익숙해진 유명 해외 전시같은 경우, 현시점에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기술적인 완벽함과 이국성으로 대중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러한 이전시대의 미술과는 달리, 동시대 예술은 관객에게 안정감이 아니라 불확실함을 준다. 만들다 만듯 어지럽게 널려있는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 웬지 주눅이 들고 사기 당하는 것같으며, 귀중한 여가 시간에 골머리를 썩힌 것에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이 한두번 쌓이면 미술과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다. 공공미술, 즉 공공영역에서의 미술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수 있는 가능성으로 주목받는다. 그러나 과잉 생산과 소비에 기반을 두는 현대사회는 공공성보다는 풍요로움을 더 중시한다. 진정한 풍요는 다양함의 공존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시에 세워진 각종 공공미술 작품들을 보면 비슷한 것이 많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예술의 주관화와 사영역화, 즉 고립과 유폐를 무릅쓰고 발전시켜온 현대미술의 다양한 가치와도 단절된 듯 보인다.

공동체와 기념할 것이 사라진 사회에서 스쳐지나가는 익명적 대중들 사이로, 위압적인 건물과 동어반복적으로 나란히 서있다. 거대한 건물의 문패처럼 거리를 점령하고 하고 있는 한국의 기념비 문화는 또한 관료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건축비의 몇 퍼센트를 공공미술을 위한 재정으로 따로 떼어 놓는, 자못 훌륭해 보이는 제도가 멋진 예술 도시를 만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공공성이라는 미명 아래 층층의 심의기구를 통과하게 함으로서,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담보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예술에 대한 관료적 발상은 수단의 효율성만 추구할 뿐, ‘왜 여기에 이런 조형물이 서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누구와 소통하려 하는가’하는 필연적인 맥락을 창출하기에 역부족이다. 자폐적인 현대미술을 극복하고 새롭게 시도되는 공공영역에서의 미술에서 ‘예술의 진정한 목적’, ‘공동체’, ‘소통’ 같이, 지금은 사라진 듯 보이는 어떤 초월적 가치가 연상된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지향성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술은 공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불확실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대우 건설 사보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