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신미경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02년 성곡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때이다. 과거의 대가들처럼 간단치 않은 재료를 떡주무르듯하여 솜씨좋게 만든 조각상들 만큼이나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공간을 가득 메운 비누 향기였다. 조각의 완벽한 형태미가 충족시켜주는 시각성, 실제 살처럼 보여 몰래 만져보고 싶은 촉각성, 그리고 개인의 무의식 깊숙히 소하는 후각성까지 어우러졌던 그녀의 작품을 작년 가을 소마 미술관에서 열린 ‘부드러운 조각’ 전에서 다시 만났다. 난장을 지향하는 듯한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좌대 위에 얌전하게 놓여진 고풍스런 형태는 관객의 시선을 끌곤 한다. 박물관 속에 안치되어 있을 법한 소재들이 그것의 원래 재료였을 대리석, 청동, 흙이 아니라, 비누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비누는 통상적인 의미의 조각과는 달리, 닳아 없어지는 전형적인 소모품이다. 그러나 신미경의 작품에서는 영원한 기념비 역시 닳는다는 점이 강조된다. 학생들의 미술수업 교재로 쓰이는 우악스럽게 생긴 빨래비누를 비롯하여, 조각 케익처럼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바디샵의 비누 덩어리들은 항균이나 세척이라는 단순한 기능성을 넘어서 있다. 바디샵에서 욕조같은 진열대 위에 놓여진 갖가지 수제 비누들은 탐미주의적으로 시식하기 위해 장식된 요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한 표피 관리를 넘어서, 섭식의 단계로까지 심화된 현대인의 미적 갈망을 반영하는 듯하다. 인간의 미적 갈망이 결정화된 듯한 수제 비누는 신미경의 작품에서 미끈한 피부와 살덩어리로 변신한다. 물론 그녀의 작품에는 이상적인 비례를 갖춘 기성의 도상과 더불어 축처진 가슴과 뱃가죽이 그대로 드러난 현실 속의 여인상도 등장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목욕하는 님프’같은 상황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상주의적인 고전 조각의 외피를 걸치든 다소간 현실적인 형태를 취하든, 그것들은 어떤 미적 지향이 투사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미경의 비누조각은 내용물과 형식의 통일을 이룬다. 2002년 전시에서는 비누로 제작된 조상들 뒤로 특정 상표의 비누 포장들을 세트처럼 설치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비누와 조각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미적 연결고리를 암시하고 있다. 작품의 소재는 동양의 불상이나 도자기 등이 포함되지만, 누드 조각의 전범을 이루었던 고전적인 형식이 많이 등장한다. 본래 누드는 단순히 벌거벗은 몸뚱이(naked)와는 다르게, 감각 보다는 관념에 호소하는 이상주의적인 형식으로 간주되었다. [누드]의 저자 케네스 클라크에 의하면 누드란 균형 잡힌 건강한 육체, 즉 재구성된 육체의 이미지이다. 그리이스인들이 창안한 예술형식인 누드는 그저 인간의 재현이 아니라, 비례와 이성의 질서의 구현이었다.





예술의 한 형식으로서 누드는 이상주의와 측정 가능한 비례와 관련된다. 고대인들은 그들의 예술을 수학, 즉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질서의 표현과 관련시켰다. 지금도 육체를 통해 보편적인 질서를 깨닫는 듯 할 때 신적인 것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고전적 조각은 개개인의 표현을 넘어서 인간의 형상을 한 신과 더욱 가깝다. 고전적 형식을 취하는 신미경의 작품은 기념비가 세워질 역사적 장소나 박물관같이 공적 공간과 어울리는 듯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인의 향취로 가득한 침실이나 욕실같은 내밀한 사적 공간으로 전이된다. 속이 텅 빈 채 투박한 물질의 색으로 남아있는 조각의 차가운 부피는, 막 목욕을 마친 듯 온기를 품은 살구빛 덩어리로 거듭난다. 작가가 인용하는 기존의 시각적 전통 탓도 있겠지만, 목욕하는 여인상이 눈에 많이 띄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공간을 지배하면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미적 전범을 보여주는 조각적 소재를 비누라는 재료로 번역하는 것은, 그것의 시간적인 차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수분을 머금고 있는 재료인 비누는 조각으로서는 취약한 재료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시간의 흔적을 각인하기 용이하다. 겉으로 보아 대리석 조각처럼 매끄럽고 견고해 보이지만, 공중이 접근하는 세면대 위에 놓여지고 비누로 사용되어 닳아 변형된 형태로 전시되곤 한다. 작품들은 온전한 형태보다는 박물관 속의 유물이 흔히 그러하듯 코와 턱이 깨진 형태나 마모된 흔적을 담고있다. 그것들은 유기체처럼 온몸으로 시간의 흐름을 타는 것이다. 비누로 만들어진 작품에서 촉각과 후각적 요소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신미경의 작품에서 강조되는 시간성은 형태의 변형 뿐 아니라, 조각이 서있는 한 공간에서 호흡을 통해 얻어지는 존재감, 즉 살아있는 몸을 통해 인식된다.

시각이 언어로 대표되는 관념의 세계와 가깝다면, 후각이나 촉각은 몸뚱이와 더욱 가깝다. 언어적 사고가 중심이 된 모더니즘 이래로, 시각 이외의 감각은 타자화되어 왔다. 일상적 생활에서도 개인의 체취는 비누나 향수로 감추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제 미는 후각을 비롯한 총체적 감각으로 지각되어야 할 미묘한 것이 되었다. 딱딱함, 공간성, 관념, 이상 등 고전적인 미적 범주는 부드러움, 시간성, 살(肉), 현실성 같은 또 다른 범주와 겹쳐진다. 서로 반대되는 듯한 범주를 연결짓는 아름다움이라는 우리의 관념이다. 박물관 속에 전시된 대가들의 유물, 그리고 위생과 미용의 대명사인 비누는 모두 아름다움에 관련된 것이다. 특히 비누조각품을 세면대 위에 비치해 놓고 사용자로 하여금 닳게 만든 상황은, 미(위생, 미용)를 실행하기 위해 또다른 미(미술작품)를 소비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아름다움은 변하는 요소와 변하지 않는 요소가 공존한다. 동서고금의 명작을 모아놓은 박물관은 영원한 미적 전범을 예시함과 동시에,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모해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신미경이 참조로 하는 박물관 스타일은 이러한 이중성이 내재되어 있다. 작가는 박물관의 유물을 모사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유물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교묘한 번역물을 배치해 놓는가 하면, 그곳에서 작품제작을 실연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극단적인 문화 상대주의가 판치는 현대사회는 보편적인 미의 존재를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는 듯이 보인다. 보편적인 미는 억압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어서 거부감을 자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미는 ‘금본위제처럼 시세에 따라 변동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미적 본질이나 보편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본다.

이상적인 비례를 내재하면서도, 유기체처럼 매끄럽게 연결된 표면이 특징인 신미경의 작품은 역사적인 변화나 시간성만큼이나 어떤 변치 않는 미의 핵심에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강의하는 심리학자 낸시 에트코프는 [아름다움의 과학]에서 1960년대까지 언어는 임의적으로 바뀔 수 있으며 한계가 없는 것으로 믿어졌지만, 이제는 언어의 다양성 아래에 보편적 문법이 깔려 있다고 주장하는 언어학자들의 의견을 빌어, 미의 보편성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녀에 의하면 인간은 선천적인 미의 탐지기를 가지고 있다. 미를 감지하는 회로는 자연도태로 만들어진 순환의 지배를 받는 견고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물학자들은 아름다움은 임의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이 아닌, 의사소통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미는 한눈에 사로잡히는 것이고, 이러한 미적 신호는 생물학적인 이득과 관련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선호는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본능적인 것이다. 건강하고 풍요로운 신체를 탐지하는 레이다를 탑재한 인간은 생존과 재생산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연적 선택으로 발전되었다. 신미경이 인류의 미술사의 보고에서 인용하는 고전적인 미가 무의식적으로 체택하는 대칭이나 평균화된 얼굴형 및 비례는 개별성보다 아름답게 여겨진다. 생물학적 사고 역시 자연세계에서 대칭이나 평균치가 건강함--기생충에 대한 면역, 생존, 생식력 등--과 밀접하다고 파악한다. 신미경의 유기체적인 비누조각은 자연과 문화의 교차점에서 발견된 보편적인 아름다움과 관련이 있다. 현대 미술사는 (포스트)미니멀리즘 이후, 조각의 기념비성 대신에 시간성과 우연성이 강조된 형태들을 많이 보여준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닳은 듯 한 유물의 흔적을 제시하는 신미경의 작품에서 시간성은 거의 자연사에 가까운 것이다.

-출처:미술과 비평 2007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