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계속되는 ‘아트 인 시티 2007’(문화 관광부 주최, 공공미술 추진위원회 주관)과 더불어 서울 문화재단에서도 대규모 공공미술이 기획되고 있어, 올해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공미술 관련 사업이 많아질 전망이다. 공공미술은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설 때마다 필수적인 부대 시설처럼 소리없이 추가되어 왔다는 의미에서 항시적인 현상이었지만, 국가나 시의 주최로, 공공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표방하면서 개방적인 공모 형식을 취하는 점이 근자의 공공미술 붐의 변별점이다. 어디서 주최를 하든 기존의 미술장식품 사업처럼 수용자 및 생산자들에게 겉도는 사업이 되지 않으려면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미술이 공동체를 지향함으로서, 현재 미술계을 지배하고 있는 고립과 냉소, 그리고 눅눅한 자폐적 분위기에 인간의 사회적 삶에 대한 뜨거운 관심의 바람이 불었으면 한다.
‘아트 인 시티 2007’ 사업의 경우, 기획 공모사업의 주제가, 장소를 중심으로 사업을 펼친 2006년과는 달리, 특정 계층을 테마--‘노년 커뮤니티 공간과 공공미술’로 정해짐--로 진행하며, 모든 공모사업에 대해 주민 만족도 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언제 누구의 동의를 거쳐 세워졌는지 알 수 없는 도시의 수많은 기념비들은 대부분 어떤 소통과 합의, 그리고 지향점이 없다. 그래서 결국은 단순한 장식물 내지, 해당 건축 소유 재산의 한 항목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 경우 관련법규의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경비를 들이려는 건축주는 예술성이나 공공성이 아닌, 작은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업자들이 3D로 대략 작성한 엉성한 ‘도안물’ 내지 ‘구성물’ 중에서 선택해야 하고, 자기 건물을 지역의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건축주는 브랜드가 확실하여 재산가치도 보장되는 ‘명품’을 어디선가 모셔오곤 한다.
어느 경우이거나 해당 지역 주민이나 일반 미술인들과의 괴리는 불가피하다. 솔직히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면, 그 자리를 공터로 시원하게 비워두거나 나무라도 심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예술성은 차치하고라도, 미술인의 복지나 환경 개선과도 별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미술작품이라는 것이 공공의 이름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면, ‘의미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틀’(헤겔), 즉 시대정신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대중과 유기적으로 되는 것, 즉 공동체와의 소통이라는 가치는 얼마나 이상적인가. 쓰레기나 주차 문제, 재개발 보상이나 집값 담합 같은 일 아니면 이웃과 만날 일도 없는 도시 생활 속에서 어떤 공동체가 가능할까. 온통 자기 것 중심의 경계선 치는 일에 매몰된 일상적 삶 속에서 말이다. 그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시도되거나 달성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향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예술의 진지한 대상이 될 수 있다.
공동체적 가치는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지와 행동을 통해서 확실 시 해야 하는 잠재적인 것이다.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 시키는 것, 그것은 강고한 구조로 자리 잡은 시장의 물신적 질서와 관료주의 복합체를, 그 가장자리나 틈새로부터 파고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회학자들은 현대사회에서 구조의 합리화가 주로 관료주의의 현상으로 표출된다고 지적한다. 사회는 구조와 생성의 역학관계 속에서 진화해 왔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스스로 창조하지 않은 규범들을 따르지만, 동시에 인간은 규범을 변화시키는 존재이다. 기술관료(technocrat)가 구조에 속한다면, 작가라는 존재는 생성의 편에 선 자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구조적 질서의 관점에서 보면, 이도 저도 아닌 주변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방인의 입장은 거짓 보편성을 주장하는 동질적인 질서의 실체를 더욱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생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구조의 문제를 도외시할 때, 그것은 개인적인 의지나 의도만을 중시할 뿐 어떤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밑그림이나 기획안은 그럴 듯한데 구체적으로 실현하기가 힘든 경우, 공동체와의 소통을 중시한다면서도 객관적인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하여 작가들만의 자족적인 잔치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작가의 과도한 의식과 현실적 상황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생성과 구조를 매개하는 자로서의 위상을 지녀야 한다.
전통적인 공동사회는 사회적으로 분화된 이익사회로 진화해 왔다. 그것은 시장과 소비자를 보편화시킨다. 근대 산업사회의 필요조건인 합리화 과정을 통해, 종교나 예술을 비롯한 정신적 가치들 역시 시장 경제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정신적 가치의 세속화는 예술의 사유화를 동반한다. 예술은 더 이상 사회 구성원들에게 구속력 있는 공통의 상징 및 의미 부여를 제공할 수 없게 되고, 사소한 일부터 중요한 일까지 인간의 삶에 부여되었던 양식도 사라진다. 현대는 ‘능력 있는 소비자가 되어라!’고 끝없이 강요하면서 개인을 더욱 소외시키는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새로운 공공미술이 추구하는 공동체와 참여라는 가치는, 시장 중심주의가 지향하는 부에 기초한 자유 보다는 평등의 가치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사회의 잉여가치를 독점한 이들의 권위주의로부터 비롯되었을 상식(common sense)을 양식(good sense)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전:월간 퍼블릭 아트 3월호
이선영
#2909
상식에서 양식으로: 2007년 공공미술의 지향점
이선영
2007. 02. 28.
이선영
서울 출생
인명사전 바로가기 : www.daljin.com/author/3059
미술평론가 이선영(b.1965)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하였으며, 웹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 편집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를 수상 하였다.
미술평론가 이선영(b.1965)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하였으며, 웹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 편집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를 수상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