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를 다녔고, 독일 유학이라는 공통점도 가지는 두 조각가가 21세기의 시점에서 바라본 생명의 문제를 화두로 던졌다. 생명은 영원한 미술의 주제이지만, 이 두 작가가 부려놓은 작품들은 과거 낭만주의풍의, 가령 전일성(全一性)이나 원초적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 대신에 까다롭고 복잡한 차원의 문제를 거쳐 간다. 간결하고 서늘해 보이는 형식미 배후에 강도 높은 작업량과 탄탄한 개념성이 녹아있는 점도 공통적이다.
먼저 윤영석의 작품은 근대 이후 자연이 과학기술과 결합된 생산력의 발달로 그 고유의 질이나 내적인 가치를 빼앗기고 도구화된 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유전자의 조합으로 환원되는 생명이 더 이상 탄생이 아니라 설계 및 조립, 생산의 문제가 되었음을 예시한다.
로댕 갤러리의 글래스 파빌리온 중앙에 자리한 컴퓨터 회로도가 새겨진 거대한 육손이에는 과도한 인간의 욕망에 대한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윤영석의 작품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생명의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지는 가축의 이미지이다. 양이나 돼지 등은 가상공간 속에서 디자인된 산물로 자발적인 생식능력이 제거되어 있다. 그것들은 생식이 아니라 복제의 산물인 것이다. 자연의 도구화는 인간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작품 ‘향기로운 뇌’는 나프탈렌으로 만들어진 뇌의 형상인데, 치과용 드릴들이 뇌를 자동적으로 조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유기체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모델에 따른 코드화된 체계에 의해 재구성된다. 생명은 실험실의 분열적인 광휘 속에서 기호체계로 배열되며 그 표면적 명료함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드 구조로 배열된 새끼 돼지들, 그래픽 그물망으로 뒤덮인 양, 또 다른 편의를 위해 진화한 듯한 여섯 개의 손가락까지, 그의 작품에서 자연적 대상은 고유의 경계를 넘어 분열한다. 경계를 위반하는 존재들은 고유의 존재성을 벗어나 차이의 장 속에서 흔들린다. 대상 뿐 아니라 지각의 문제도 그렇다. 그리드처럼 나뉜 방충망에 빗방울이 맺혔다가 사라지는 작품에서 윤영석은 창밖의 현실이 그래픽 화면 같은 가상성과 교차되는 모호한 순간을 포착한다. 겹쳐진 이미지들이 통과하는 렌티큘러 렌즈를 이용한 작품들은 이동하는 관객의 착시현상을 통해 가상의 움직임을 만든다. 발레리나의 발놀림, 공을 다루는 손놀림 등은 고정된 시공간 속의 형태가 아니라, 눈금처럼 그어진 시간의 홈을 따라 흔적(잔상)을 남긴다. 시간의 개입을 통해 3차원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이 ‘3.5 차원의 영역’(전시부제)이 제시하려는 것이다.
관객을 따라 움직이는 렌티큘러 렌즈 속의 눈동자는 영원을 향해 고정된 전지전능한 시선이 아니다. 사이보그 이론가 다나 해러웨이는 완전한 언어와 의사소통, 최종적인 질서 등을 지향하는 군사주의화 된 과학기술이 신을 흉내 내는 자기 동일적인 관점에 갇혀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윤영석의 작품은 주체와 대상, 문화와 자연 등의 극단적 분열이 전제하는 근대의 전능한 초월성이 아니라, 제한된 위치와 상황적 인식을 강조한다. 렌티큘러 렌즈나 그리드 구조로 투영된 주체와 대상은 토대나 근본 또는 기원의 확실함이나 투명성이 아니라, 차이의 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적극 도입된 시간성은 자기동일성이 필요한 순간에도 차이의 흔적이 있음을 예시한다.

김주현은 삼성동의 테이크 아웃 드로잉에서 설치작품이자 모델인 구조물을 선보였다. 나무 및 금속으로 제작된 ‘생명의 다리’는 그물망을 이루는 생태계에서 착안한 보행전용 다리이다. 나사못으로 점과 점을 수평으로 연결하는 막대들이 쌓여 이루는 중층적 구조는 높이와 넓이, 그리고 방향과 형태가 무제한의 다양성을 가지면서도 물리적인 견고성을 가진다. 다양함과 견고함의 결합은 살아있는 것, 즉 인간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속성이며, 예술작품의 본 모습, 그리고 바람직한 과학기술의 방향이기도 하다. 특별한 목적이나 계획 없이 어디론가 던져진 점들이 나무나 금속 막대로 서로 얽혀 자유롭게 성장하는 듯이 보이는 형태는 전체 계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의 배치 규칙에 순응함으로서 달성되는 점에서 자연과 닮았다. 그녀의 작품은 ‘심연과 미지를 향해 활짝 열려있으면서도 합리성을 완전하게 이용하며 그 기능은 단순히 이어주는 것’(에드가 모랭)이라는 점에서 지구시대에 바탕 하는 종교적 감성과도 닿아있다.
근대이후 과학은 자연을 그 구성성분들로 헤쳐 놓기만 하고 결합하지 못했다. 물리학자 바라바시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다룬 책 [링크]에서 자연은 수백만년 동안 조각들을 우아하고 정교하게 결합해왔다고 말한다. 자연은 자기 조직화라는 보편적인 법칙을 이용하여 그렇게 해왔다. 사건이나 현상은 복잡한 세계라는 퍼즐의 엄청나게 많은 다른 조각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에 의해 생겨나고 상호작용 한다. 김주현의 작품 역시 수평을 이루는 같은 층의 모든 점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그물망적(Web-based) 시각을 제시한다. ‘생명의 다리’는 자연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연결하는 매개가 된다. 거기에서 모든 것은 모든 것에 닿아 있으면서도 특별한 척도 없이 성장한다. 그것은 링크의 추가를 통해 끝없이 변화하는 동적 시스템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물망들은 어느 것도 소외시키거나 비워두지 않는데, 이러한 구조에서는 링크의 변환을 통해 미지의 가능성으로 도약할 수 있다.
바라바시에 의하면 상호연관 된 세계에서 링크는 곧 생존을 의미한다. 고도의 이동성과 연계성이 특징인 김주현의 작품은 자연이 따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해결책처럼, 우연과 무작위의 성질이 조합되어 있는 네트워크이다. 무작위 네트워크 모델의 전제는 평등주의적이다. 네트워크가 커지게 되면 링크를 완전히 무작위적으로 부여하더라도 거의 모든 지점들은 같은 수의 링크를 갖게 될 것이다. 자연은 맹목적으로 링크를 여기저기 던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어떤 지점도 특별대우를 받거나 배제되지 않는다. 편향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만물의 영장’ 인간 역시 예외적 존재가 될 수 없다. 김주현의 그물망에서 인간은 유기체의 일부이지만, 전체와 부분의 유비관계 속에서 설정되지 않는다. 이전시대의 유기체적 우주는 지배적 위계질서라는 은유를 낳았다. 사건들 간의 관계들을 지배하는 총체성, 체계화, 유기적 조직화는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환원하고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편입시켰던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엄격한 구조보다는 과정을, 지배보다는 협력을 중시한다. 윤영석과 김주현의 작품에서 자연은 명료한 지시물로서의 속성을 버린다. 그들의 작품은 현존적인 현실로부터 부재한 다른 곳으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그것은 다나 해러웨이가 지적하듯 텍스트화되고 코드화된 세계 속에서의 움직임에 대한 힘의 장을 이루며, 가변적인 기호현상 속에 존재한다. 기호현상은 의미와 생명을 만든다. 그것은 객관성이나 초월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 소통하기 위한 것이다. 상황적 지식에서 특정한 위치와 장소는 중요하다. 진리는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 관계들과 예기치 못한 기회들을 찾는다. 그들은 기존의 유기체적 세계관과 이의 현대적 계승자인 ‘글로벌 시스템’이 전제하는 위계적 질서의 지배, 부분들을 전체 속으로 통합시키기, 적대적 대립 등이 아닌, 차이의 관계를 고려하는 기하학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구속의 기하학 밖에서 복수성을 재형상화 하고자 한다.

-출처: 아트 인 컬처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