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학이 보여주는 풍경은 개념적이다. 그것은 일종의 지도처럼 다가온다. 이미지이면서도도상이나 기호적인 성격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현실적인 풍경이면서도 환각성이 모락거린다. 실경이면서도 지도이고 지도이면서도 산수풍경으로 겹쳐서 다가오는 다소 기이한 그림이다. 구불구불한 길들이 연결되어 지렁이처럼, 뱀처럼 지나가고 그 옆으로 주름잡힌 밭고랑과 나무와 숲이 있는 풍경이다. 본래의 풍경은 해체되거나 풍화되고 겨우 남은 몇 가닥 선에 의지해 길들이 연이어 뻗어있고 더러 풀과 나무가 덩그러니 남아 홀로 우거져있다.
전체에서 일부분만을 고정시키고 나머지는 증발시켜 버려 텅 빈 공간과 그 가운에 겨우 살아남은 자취로 존재하는 이 풍경은 풍경을 보여주면서 도시에 풍경을 지우고 감춘다. 나머지는 보는 이의 상상과 기억에 호소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반이미지적으로 다가온다. 역설적인 풍경인 셈이다.
과감한 여백과 겨우 남은 풍경의 편린이 보는 이의 시선에 여운처럼 감긴다. 마치 숲을 제외한 나머지는 강렬한 햇살에 의해 온통 하얗게 반사되고 증발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백의 적극적인 강조와 그려진 부분과의 대비는 현실적 풍경을 비현실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사실 남겨진 것들은 결국 부재하는 것들로 인해 의미가 생긴 상처다. 산 자들은 모두 그 산 자를 배태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떠올려준다. 산 자의 얼굴에는 죽은 이의 얼굴이 또렷하게, 희미하게 서려있다. 자연 역시 무수한 자연이 죽고 살아난 자취로 울울하다. 내가 보는 이 풍경은 아득한 지난 시간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그 풍경으로부터 무척 많이 벗어난 풍경이기도하다. 이 풍경은 수많은 다른 풍경들의 소멸과 부재로 가능하다. 풍경은 시간의 풍화를 겪고 그 풍경과 함께 한 이들의 눈 속에서 머물다 그들과 함께 사라지고 다시 다른 이들이 눈과 시간 속에서 거듭 환생한다. 풍경은 보여주기도 하고 많은 것을 감추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 그림에서는 유독 숲 옆에 난 길이 눈길을 끈다. 길과 논, 밭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의 소산이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취고 그들이 노동한 흔적이다. 반면 숲은 인공에 반하는 공간, 인간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장소, 원시의 꿈과 비릿한 생명체가 바글거리는 곳, 도시의 대척점에 서서 자연을 대표하는 그런 장소성이다. 이 그림은 항상 그 길과 숲의 대비를 강조한다. 인간은 자연에 길을 내고 논과 밭을 일구었다. 반면 풀들은 빈터나 지워진 곳을 악착스레 덮어나간다. 아직 아스팔트가 덮치지 않은 곳에 풀들이 자란다. 문명은 바로 그 접점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모두 흙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흙을 갈아 논과 밭을 만들고 그 흙을 밀어 길을 내고 다시 그 길을 풀이 덮고 숲이 되고 다시 그 숲과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고 논과 밭으로 대체해 온 역사가 이 땅위에서 이루어진 인간과 자연의 일이었음을 문득 깨닫는다. 작가는 자연 풍경을 보면서 그 같은 역사와 시간의 자취를 보았던 것 같다. 길과 논, 숲의 의미를 헤아려본 것 같다. 문화가 말을 만들고 트고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발현된 것이라면 길과 논, 밭 역시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고자 하는 흔적이다. 인간은 자연의 내부에 길을 만들어 그곳을 빈번하게 오고가면서 숲과 산의 일부를 펴서 논과 밭의 주름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 기생하고 자연을 전유하는 방식이었다. 작가는 바로 그러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은 단순한 풍경, 산수의 재현에 머물지 않고 무척 개념적이고 인식론적인 풍경화에 해당한다.
작가는 구체적인 풍경으로부터 출발해 이를 변형해서 독특한 풍경/장면을 만들었다. 그것은 특정 장소의 재현이나 기존 산수/풍경이 보여주는 ‘풍경적인’ 장면과는 무관하다. 이것은 구체적인 대상의 재현이면서도 그 정보를 변형, 생략, 가공해서 일종의 인덱스로, 혹은 묘한 판타지로 만들어놓았다. 작가는 풍경을 자의적으로 해체하고 편집했다. 그것은 자연으로 난 길을 걷다가 만난 풍경에 대한 환각이기도 하다. 작고 바트고 꼬불거리는 길들을 걸어 산을 넘고 밭을 건너서 갔던 옛사람들의 발길이 눈에 밟히고 상상되어지는 그런 길이다. 이 그림은 보는 이들의 눈을 그 길로 몰아 저 너머로, 화면 밖으로 부단히 유출시킨다. 그 길에 의존해 떠나가게 한다. 그림은 그 매개다. 그림은 일종의 징검다리 같다. 그림을 밟고 아득하게 펼쳐진, 너무나 정겹고 낯익은 우리네 산천의 길과 풍경을 ‘사뿐히 즈려’ 밟고 나가게 한다. 아니 그런 길로의 유인을 독려한다. 이 그림은 망막에 저당 잡히지 않고 정신적 활력에 의해 완성된다.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이리저리 길과 주름으로 유인하고 몰고간다. 이 그림 앞에서 시선은 부산하고 그 시선을 받은 마음들은 동요한다. 유동하고 부유한다. 정신들은 부산하다. 마치 내가 풍경을 소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은 그 소요를 받아주는 기이한 장소, 장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다름아닌 산수화 아니었던가?
작가는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만난 실경에서 출발한다. 다만 그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경물-밭, 논, 가옥, 나무, 산, 기물 등-을 과감히 생략하거나 교묘하게 재구성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찾고자 한다. 경물의 생략 속에서 보여지는 선의 연속체는 어느 한 곳에 시선이 집중됨이 없이 마치 감상자가 산수를 거닐듯이 근경에서 원경으로 시각이 빠지기도 하고 다시 산등성이를 돌아 중경의 밭에 시선을 쉬게 한 뒤 물길을 따라 근경으로 이어진다. 선을 통하여 연속적이고 계속적인 시각적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는 얘기다. 선을 보다가 문득 풍경을 만나고 다시 선을 접한다. 그림이면서도 동시에 바탕에 그어진 선에 불과하고 다시 선들이 집적되어 나무와 숲을 보여주다가 결국 선으로 귀결되기를 반복하는 그림이다. 그것은 그림으로 수렴되지도 않고 즉물적인 선이나 추상적인 기호로 머물지도 않는다. 사실 그림이란 바로 그 두 세계를 현기증 나게 넘나드는 유희, 놀이이다. 그림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畵子畵也)그 그림은 세계를 연상시키고 말을 건네고 관념을 자아낸다. 이미지를 이미지로 볼 수 도 있고 그 이미지를 통해 실재 세계를 연상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그림은 결국 물리적 자취에 불과하기도 하다. 이것이 그림만의 비밀이고 매혹이다.
작가의 작업방식은 장지위에 방해말(돌가루)을 10회 정도 입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에스키스를 바탕으로 목탄으로 선을 그은 다음 다시 면봉으로 선을 따라 긋는다. 이때 목탄가루가 선 옆으로 삐져 나가거나 가루가 점착되도록 해 선에 재미를 선사한다. 그로인해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선이 아니라 작가의 체취와 호흡, 기운을 반영하는 흥미로운 선이 되었다. 이후 아교로 선을 정착시키고 숲을 목탄으로 그린 다음 면봉으로 숲 역시 비벼서 완성한다. 그런 다음 최종적으로 목탄이 묻어나지 않도록 5회 정도 아교로 정착시키면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종이 위에 목탄으로 이루어진다. 목탄은 나무를 태워 만든 자연적 재료이며 이미 오래전부터 동양화제작의 밑그림을 그리는데 즐겨 쓰였다. 유탄이란 재료가 그것이다. 사실 동양화 작업에서 목탄을 먹과 함께 쓰는 경우는 빈번하다. 목탄이 먹과 잘 조화되기도 하고 그 검은 색 역시 수묵화에 어울리기에 그럴 것이다. 다만 이 작가는 목탄만을 이용해 수묵화의 느낌을 살리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수묵화 자체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동양화의 특성이랄까, 재료적 특질을 고려하는 선에서 목탄과 아교 등이 쓰여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목탄의 선은 동양화의 모필 선을 확장하기도 하고 그 맛을 유니크하게 되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전적으로 까만 그림이다. 그런데 그 검정은 흰 바탕, 여백을 배경으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작가는 그 검은 색을 검빛이라 부른다. 그에 의하면 검빛은 모든 빛이 함께 스미어 만들어진 빛깔이다. 나무의 그을음과 재인, 먹과 목탄이 자신의 검빛으로 스미며 또 다른 검빛을 발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작가가 서로의 기색을 느끼는 순간, 시간의 흐름은 압축되며 유연한 바람결이 된다고 한다. 검빛 시공 안에서 검빛 풍경은 서로의 존재를 바라보고, 인식하고, 스미어, 각자이면서도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흑백을 고집하고 검은 색으로 자연을 해석한다.
흑백의 대비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검은 색의 다양한 맛들을 구사하면서 동시에 여백의 쓰임과 활용을 중심으로 놓고 다시 자연에 대한 해석을 그 위에 올려놓고 있다. 산수대신에 논과 밭, 길과 나무와 숲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그래픽적인 선의 구사와 치밀한 묘사로 구성된 숲, 검은 색채의 풍부한 톤으로 물든 나무와 종이 자체의 질감과 색상을 고스란히 유지한 체 그 위에 그어진 선의 궤적이 대비를 이룬 그런 그림을 형성하고 있다.
“그림을 업으로 삼아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세상, 사람, 자연가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하는 방법은 내가 그린 그림을 통해서이다. 사람들과 내가 그린 그림이 스치듯 만나는 순간, 시공이 부드러운 바람으로 흐르며, 서로에게 검빛 풍경으로 스며들기를, 그림과 사람이 가붓이 깊어지며 적요한 풍경이 되기를 꿈꾼다. 내가 세상과 그림 속 만물과 그러했듯이.”(작가노트)
그의 이 글은 무척이나 시적이다. 문학적 정취가 홍건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 역시 시정이 넘치고 아련하면서도 감성적이다. 그러면서도 개념적인 뉘앙스가 은은하게 자리하고 있다. 시정과 개념이 공존하는 그런 풍경화인 것이다.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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