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의 근작은 ‘산조’(散調)란 제목을 달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림들마다 잔잔하고 시정이 넘치면서 은은한 운율과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들로 무성하다는 느낌이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음악이 있다. 우리네 가락과 운율이 짙게 베어 나오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가 보다. 혹 유년의 기억과 고향에 대한 추억을 길어 올리고 싶었기도 했던가 보다. 그림은 시각과 청각 모두를 가볍게 흔들어댄다.
눈발마냥 꽃송이 흩날리는 적막한 봄날, 잔잔한 바람에 마냥 흔들리는 대나무 숲, 낚시 대를 드리우고 찌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등에 비치는 오후의 햇살, 호숫가에 떠있는 오리 떼, 폐사지에 뒹구는 돌부처, 마당에 내려와 무언가를 쪼아대는 새들,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개가 있고 그런가하면 가물가물한 추억 위로 떠다니는 흐릿해진 누군가의 얼굴 등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의 화면은 무척이나 ‘센티멘탈’하다. 그리고 감각적으로 세련되게 조율되어있다. 나로서는 이 장면의 설정이 다분히 그의 고향 강릉에 관한 추억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대나무와 매화꽃이 가득하고 바닷가와 호수가 자리한 곳, 그 장소성에 대한 기억을 몇 가지 상징들과 함께 아련한 색채로 펼쳐 보이고 있다.
한지 위에 아교를 바르고 토분과 호분을 반복하여 칠해 만든 독특한 화면은 부드럽고 연한 색채로 덮여 있다. 그것은 칠해지거나 스며 들어 있다기 보다는 종이와 완전히 밀착되어 견고하고 투명한 지지대가 되었다. 일정한 두께로 마감되어 있어서 그 피부 위를 긁어서 생긴 자국이 붓질을 대신해서 독특한 선묘의 맛을 자아낸다. 화면은 매우 얇은 저부조를 만들어 보인다. 지극히 평면적이면서도 긁어서 생긴 상처들과 그려진 이미지, 그리고 콜라주로 부착된 도상들로 인해 화면은 섬세한 요철효과로 인해 공간감을 자극한다. 그려진 부분과 인쇄된 종이를 오려 붙여 만든 콜라주, 여백 같은 바탕 화면에 수직과 수평으로 지나가는 붓질/선, 작게 위치한 일련의 도상들이 만나 형성한 화면은 독특한 시감을 만든다. 주어진 평면위에 모든 것들은 평등하게 자리하고 존재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범신론적이고 물활론적 사유가 고여있다.
붓이 칼이나 연장이 되어 수직으로 흩어나간 자취는 마치 마당에 빗자루 질을 해서 생긴 흔적 같다. 땅위에 새긴 무수한 인연과 시간의 자취, 지난 시간의 궤적과 뭇 생명체들이 대지/마당과 함께 했던 삶의 얼룩과 잔상들이 아롱진다. 그의 화면은 그대로 우리네 전통적인 마당이다. 한국인에게 마당이란 장소성은 한국 문화 특유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다. 비교적 넓은 마당을 두고 사람과 가축, 짐승과 꽃과 새들이 한 식구로 살았으며 그 위로 사계절의 시간이 내려앉았고 눈과 비가 왔으며 꽃잎이 떨어지거나 새가 날아와 앉았다 갔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자취와 그분들이 뒷모습이 어른거리고 누군가 태어났고 누군가 죽어서 그 마당을 마지막으로 생의 인연을 끊어내고 산으로 갔을 것이다. 어느덧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작가는 문득 고향과 그곳의 마당 있던 자신의 집을 떠올려본 것 같다. 근작은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사연과 서사를 담은 그림들이다. 이전부터 지속되어왔던 자연과 인간의 병치와 이중화면, 파스텔 톤으로 조율된 색채 등 표현방식은 여전하지만 근작은 그것들을 좀 더 안으로 밀어 넣어 무척이나 격조있는 그림, 동양화에서 만나는 정신세계를 의식한 그림, 그러면서도 동시대 어법을 세련되게 마감한 그런 그림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맛깔스러우면서도 장식성이 강한, 동시에 전통적인 미감과 사유를 하나로 묶어내려는 시도가 눈에 밟히는 그림이다. 백자의 표면이나 너무나 파란 가을, 황토 마당, 깊고 푸른 바다, 연한 핑크빛 매화꽃, 녹색의 대숲 등을 연상시키는 화면은 우선 부드러운 색 면으로 처리되고 그 위로 가볍고 경쾌하게 긁어나간 자국으로 모필의 힘을 대신하는 그런 그림이다.
그는 화면을 유년의 집 마당으로 설정했다. 바탕은 마당처럼 처리되고 붓질은 빗질처럼 구사되는 한편 마당에 서린 모든 흔적들을 촘촘히 그려 넣고 오려 붙였다. 그는 추억 속의 마당을 화면 위로 불러들여 재구성했다. 조감의 시선 아래 펼쳐진 세계는 자연과 사물, 인간이 바글거리는 기이한 풍경을 선사한다. 마치 산수화에서 접하는 시방식이 납작하게 평면화시킨 공간 위로 스물 거리며 지나간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내밀한 추억과 인성에서 차분하고 격조있게 스며 나오는 이런 그림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영택
#2939
이만수-‘마당 깊은 화면’
박영택
2007. 03. 31.
박영택
서울 출생
인명사전 바로가기 : www.daljin.com/author/688
미술평론가 박영택(b.1963)은 [얼굴이 말하다, 마음산책(2010)], [예술가의 작업실(2012)]을 저술하였고 아시아프 총감독(2010)을 역임하였으며,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