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도 독일에서의 전시작품은 스텐레스 철사를 용접하여 만든 나무 형태의 구조물의 연장선 상에서 또다른 변주를 보여준다. 금속 대신에 식재료인 스파게티 면으로 만든 나무가 그것이다. 밀집된 섬유상의 조직은 국수와 나무를 이루는 동형적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동서고금에 걸쳐 보편적인 음식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국수와 자연을 대표하는 나무를 연결지으면서, 소통의 매개고리를 찾으려고 한다. 서양음식인 스파게티 뭉치가 누런 볏단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특이하다. 탁자 위에 스파게티 나무가 서있고 그 가지 위에 모니터가 달려있으며, 바닥에는 신발이 배열된 또다른 작품은 나무와 인간을 보다 일체화 시킨다. 여기에서 나무는 거대한 공간적 기념비성보다는, 서사(모니터 화면의 내용)나 이동성(신발)이라는 시간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수년전부터 지속해온 김무기의 나무시리즈는 인간과의 비유가 강화될 때마다 열린 부피와 가변적 설치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공중에 설치된 날아다니는 인간이나 벽에 서있는 인간 등이 그렇다.

그것들은 공중을 떠도는 홀씨같은 또는 식물의 씨앗을 몸에 품은 채 이동하는 동물같은 모습이 연상된다. 오래된 집이나 미라같은 소재는 영원한 안식처와 부활, 또는 갱신에의 소망이라는 면에서 나무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죽은 듯하다가도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 나무는 물질적인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영원한 삶을 상징해왔다. 이 전시의 대표적인 작품인 ‘중얼거리는 나무-자이안트’는 수많은 스파게티의 다발을 연결하여 나무의 수직성과 부피를 강조한다. 딱딱한 면발은 나무의 질긴 지지조직을 떠오르게 하며, 수분과 에너지를 공급받아 변화될 양상을 상상하게 한다. 스파게티 나무의 조직이 가지는 수많은 갈래들은 내구성과 더불어 주변 환경과의 접촉 면적을 최대화하는 나무의 이중적 전략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하에서 진행되는 단단한 뿌리박기와 지상에서 진행되는 무성함은 서로를 지원하면서 차이 속의 비슷함을 보여준다.
작가는 역사 속의 인간들처럼 나무의 형태에서 우주의 모습을 보면서, 물질과 정신의 모형을 찾아냈다. 나무는 추상화 과정을 거쳐 논리적 구조가 되었다. 나무의 든든한 뿌리는 형이상학적 바탕이 되어 지식의 총체가 그 위에서 펼쳐지는 장이 된다. 나무처럼 정신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자라나며, 연속적으로 가지를 치고 상호 간에 연결된다. 그러나 로베르 뒤마(Robert Dumas)가 [나무의 철학]에서 인용하듯이, 나무는 ‘변함없는 동시에 별나게 흔들리는 존재’이다. 김무기의 작품에서는 인간 또한 그러하다. 특히 공중에 설치된 선적 구조물이 드리우는 인상적인 그림자는 추풍낙엽처럼 떠도는 한갓된 인간 존재의 허무한 운명을 예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인간의 강고한 실체나 본질이 아니라, 현상적 또는 허상적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 나무와 인간과의 관계는 형태적 비유를 넘어서 보다 내적이다. 특히 스파게티 나무는 거대한 나무로 대변되는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무한대의 생산력을 상징하고 있다. 거기에는 식물이 이 세상 최초의 생물체였고, 인간에게 최초의 식량을 제공해 준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다.
식물학자 자크 브로스(Jacques Brosse)는 산소를 배출함으로서 대기층을 형성하여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은 남조류라고 말한다. 식물의 광합성 작용으로 말미암아 무기물을 유기물로, 무생물을 생물로, 비활성 물질을 생명체로 바꾸는 일이 가능했다. 숲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열매가 자라는 황금시대를 인간에게 선사했으며, 그 이후에도 인간에게 지속적인 미래를 보장해 준 것은 바로 식물이었다. 말려서 껍질을 벗긴 다음 잘게 빻은 열매들은 빵이나 국수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인구를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하고, 문명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에너지가 되었던 것이다. 수많은 국수가닥이나 금속이 엮여진 나무와 인간의 형태는 다소간 정적인 외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주변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분주한 역학적 기계로서의 면모를 두드러지게 한다. 김무기의 작품에서 나무와 인간이 근접하는 요소는 형태와 소리이다. 자크 브로스는 동물을 두 끝점이 열린 소화관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비해 식물은 속이 꽉 채워져 있다.
동물은 몸의 중심을 차지하는 빈 공간에 태생의 환경을 내재화해서 그 환경을 늘 지니고 이동하는 신체구조를 가지지만, 식물처럼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조달하는 능력이 없다. 한편 식물의 견고성을 보장해주는 셀룰로오스성 막의 손실은 동물의 이동성을 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 차이는 식물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물은 바람 소리를 집중적으로 관장하는 자기 내부의 중심 통로를 따라 몸 밖으로 내보낸다. 우리는 김무기의 작품에서 속이 빈 채, 때로는 소리를 내며 여러 공간을 유목하는 동물성 식물과 속이 꽉찬 채 정박 중인 원초적인 에너지 생산기계로서의 식물 간의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벽이나 공중에 설치된 나무인간들은 마치 태앙과같은 생명의 근원인 우주목(宇宙木) 주위로 자전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모니터를 탑재한 동물성 식물은 다소간 느릿하다. 그것은 삶의 속도를 식물의 주기에 맞추어 늦추면서, 외부와의 교류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식으로 환경에 적응해온 식물적 삶과의 친근성을 드러내면서,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