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자연의 감각적 외피(동양에서의 양에 해당하는)를 취하면서도, 그 이면의 본성(동양에서의 음에 해당하는)을 포착케 해주는 것이 암시와 상기이다. 다시 말해, 암시와 상기는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 그 이면의 자연성의 표출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것이 부재할 때 그림은 단순히 재현적 표출에 머물 뿐인 장인적인 차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연성을 암시하고 상기시킬 수 있을까. 그 방법으로는 자연과 친해지고 동화되는 수밖에 없다. 즉 자연과 더불어 있으면 자연과 나를 구분 짓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불현듯 자연이 그 속에 품고 있던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개시되는 세계가 다름 아닌 자연의 혼이며 생명이며 본성인 것이다.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이해가 아닌, 결여와 결핍을 동반한 절실함으로써만 열리는 세계, 대상을 향한 나의 시선(인간의 몸 가운데 그 속성이 정신의 그것을 가장 닮아있는 눈은 인식론적 이해를 수행하는 자의식의 도구이다)이 허물어지고 지워지고 마침내 사라지고 마는 순간에야 비로소 열리는 세계이다.
도성욱의 그림은 일견 감각적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심미적 대상으로서 다가온다. 대기의 입자가 만져질 듯 습윤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숲, 그 숲 뒤쪽으로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길,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만들면서 숲과 길을 감싸는 빛, 그리고 그 빛의 다발을 조각내며 반사하는 물여울 같은 정경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적인 기법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그림은 그저 자연풍경의 감각적 닮은꼴을 겨냥한 재현회화의 소산만은 아니다. 사실적인 기법은 자연을 감각적 향수의 대상으로 즐기게끔 해주는 강력한 계기로서 작용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즉 사실적 기법은 그 이면의 보다 궁극적이고 핵심적인 어떤 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한에서만 정당화된다.
그러니까 작가의 그림은 자연의 감각적 외피를 통과해 자연이 그 속에 움켜쥐고 있는 본성이나 숲의 비의, 친근하면서도 낯선 세계가 열리는 어떤 지점을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자연의 객관적인 지평을 집어삼켜 이를 재차 뱉어낸 주관적인 풍경이거나, 자연의 감각적 피막을 찢고 그 안으로부터 끄집어낸 심의적 풍경으로서 현상한다.
이처럼 자연에서 자연성을 끄집어내려는 작가의 이러한 기획 자체는 일면 현상학의 학적 인식과도 통한다. 주지하다시피 현상학에서의 학적 대상인 현상은 사물과 대상의 감각적 표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식과 선입견 그리고 편견으로 굳어진, 소위 지식의 축조물과 그 의미의 더께를 걷어낸 이후에야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사물의 형상(존재태)이 바로 현상이다. 현상은 말하자면 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사물의 태, 자기 외부로부터 부여된 의미들로 오염되기 이전의 사물의 맨살에 다름 아니다. 이를 자연에다 적용해보면, 자연에 있어서의 그 진정한 현상이란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과 의미가 지워진 나머지 낯설고 생경하기만 한 자연의 맨살, 자연의 본성, 자연의 야성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본성을 붙잡기 위해 작가는 사실적인 묘사와 더불어서 일종의 조작적인 과정을 풍경 속에다 밀어 넣는다. 사실적인 묘사와 조작 과정이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하나의 결로 짜여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조작 과정은 사실적인 묘사가 주는 감각적인 쾌감에 가려서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만큼 은근하게 끼어든다. 이러한 은근함이 오히려 그림의 밀도감과 함께 신뢰감을 높여주고 있다.
그 조작 과정이란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풍경이 아닌 상상적인 풍경으로서 현상한다. 즉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현재하는 풍경을 닮았지만 사실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풍경, 실재하지 않는 풍경, 부재의 풍경이다. 무의식의 지층으로부터 끌어올려진 이상향에 대한 작가의 비전이 만들어낸, 순수하게 가공의 풍경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 풍경이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풍경은 현실과 상상력 그리고 무의식, 이렇게 이질적인 세 계기가 서로 자극하고 견인한 상호작용성의 소산인 것이다.
이러한 인공적인 과정 중에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시점(視點)이다. 예컨대 어두운 숲 속 한가운데서 그 위를 향해 올려다 본 듯, 햇빛이 하늘 높이 치솟은 숲을 헤집고 그 속으로 비쳐든다. 또한 아래의 대지와 위의 하늘이 숲과 유기적으로 연속된 이미지 대신, 화면을 가득 채운 숲의 단절된 이미지가 즉물성을 강화하는 한편, 그 자체가 사진의 고도로 인공적인 시점을 연상시킨다. 이외에도 작가는 한 폭의 숲 그림을 그린 연후에, 그렇게 그려진 화면들 중 일정부분을 따로 취해 이를 확대해서 그리는데, 이로부터는 일종의 자기차용이 확인된다. 이와 함께 풍경의 한 단면을 확대하는, 이런 부분 확대의 경우는 분명 자연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이나 시점의 성향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자체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인공적인 미디어의 눈을 통해 본 사물이나, 미디어의 눈에 의해 변형된 사물 현상의 생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도성욱의 그림에서는 빛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 느껴진다. 빛은 숲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부터 화면의 전면을 향해 비취기도 하고, 어두운 숲 속 위쪽의 들창처럼 열린 하늘로부터 화면의 아래쪽으로 드리워지기도 한다. 빛과 나뭇잎이 희롱하는 듯한 빛의 유희가 느껴지고, 자잘한 불꽃들이 꼬리를 물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빛의 산란현상이 감지되기도 한다. 나뭇잎은 사물을 투과하는 빛의 성질로 인해 실재보다 더 투명하게 보이고, 또한 숲은 빛이 만드는 음영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검은 실루엣인 양 드러나 보인다. 그리고 빛은 숲과 부닥치면서 때론 부드럽게 때론 뚜렷하게 그 대비를 드러내 보인다. 일견 초록으로 물든 숲이 실재의 고유색이거나 자연색 같지만, 사실은 거의 모노톤에 가까운 색조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
이와 함께 빛은 입자를 머금은 대기의 반투명한 두께의 층을 뚫고 그 표면 위로 드러나 보이는데, 이때 대기가 함축하고 있는 입자의 밀도감과 함께 숲의 습윤한 기운이 감지된다. 이 모든 정황들의 원인(작가의 말로는 조건)인 빛은 마침내 사물들로 하여금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로 혼재하게끔 유도한다. 이로써 도성욱의 그림에선 사물의 개별 형상들이 그 뚜렷한 실체를 얻는 대신에, 빛의 세례 속에서 그 경계가 흐릿해진 사물현상이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마디로 빛은 작가의 그림을 예사로운 풍경화와 구별하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제로서 작용한다. 실제로 이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즉 ‘빛이란 일종의 비물질적인 형상으로서, 그 자체 정해진 형태가 없으니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의 구상이 가능하며, 또한 그 빛이 접촉하는 모든 물질을 비물질화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말은 작가의 그림이 사물의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표면현상보다는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이면현상(사물이 그 진정한 현상을 드러내 보이는)을 겨냥하고 있음을, 그리고 다름 아닌 빛을 길잡이 삼아 이를 실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한 풍경이 친근함을 자아내는 경험을 데자뷰라고 일컫는다. 그러니까 실재하지는 않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 실재와 비실재가 그 경계를 허물고 혼재하는 풍경을 말한다. 일견 자연의 감각적 외피를 그대로 옮겨 그린 듯한 도성욱의 풍경화는 사실은 이를 매개로 해서, 그 이면의 자연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감각현상은 이러한 자연성을 암시하고 상기시켜주는 방편에 지나지 않지만, 그 자체가 자연성과 구분되지 않은 하나의 지층 속에 녹아들어 있다. 이로써 그 지층의 표면현상이 자연을 감각적 대상으로 향유케 하며, 그 이면의 결이 자연의 내적 생명력을 감지케 한다. 그렇게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풍경은 숲의 비의를 열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