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을 수정하지 않는다. 자연은 나를 인도해준다.
어떤 존재든 변경하는 일이 없이 그대로 모사하기만
한다면 걸작을 낳을 수 있다. 예술의 유일한 원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모사하는 것이다. 자연을 미화하는
비결 따위는 없다. 정확하게 보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 로댕
회화의 가장 정통적인 문법으로는 단연 재현을 들 수 있다. 세계의 감각적인 지평을 사실적으로 모사하는 재현의 논리는 모방론에 의해 지지되며, 이는 흔히 자연주의로서 현상한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을 제안하는 것이야말로 회화의 기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자연의 외형을 충실히 모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을 재현하는 태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보다는 이로 인해 자연의 본성이 암시되고 상기되는 한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의 본성은 어떻게 그 감각적 표층 위로 끄집어내질 수 있는가.
로댕은 자연을 정확하게 볼 것을 주문하고, 알베르티는 자연의 가장 순간적인 양상을 모방할 것을 주문하고, 하이데거는 존재자(자연의 감각적 형상)가 아닌 존재 자체(자연의 본성)를 불러낼 것을 주문한다. 여기서 자연을 정확하게 보라는 로댕의 주문은 아마도 자연의 감각적 외상(피부)을 투과해 그 이면에 놓여진 자연의 구조(근육)를 꿰뚫어보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알베르티가 주문하는 자연의 가장 순간적인 양상이란 자연의 본성이 자연의 감각적 외피를 뚫고 그 표층 위로 밀어 올려진 순간에 주목하고, 그럼으로써 자연의 본성과 자연의 외상이 일치되는 순간을 포착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 자체는 그대로 하나의 자족적인 세계이며, 그 세계가 감각적 표층 위로 열릴 때는 필연적으로 낯설고 이질적인 언어의 형태로써 어필된다. 그러면서도 그 세계는 주체와의 치열한 상호작용성과 공감의 과정으로부터 열린 것이므로 친숙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회화는, 특히 재현적인 회화는 생경하면서도(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친근한(고향과 원형 등 상실한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언어의 이중적인 결과, 그 양가적인 구조에 의해서 견인된다.
인물과 동물 그리고 식물 등의 자연을 소재로 한 이재삼의 회화는 이처럼 재현적인 회화논리에 의해 견인되며, 자연의 감각적인 형상을 매개로 하여 그 이면의 비감각적인 자연의 본성을 암시하고 드러낸다.
인물과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들. 이재삼은 목탄 하나로만 그림을 그린다. 이 단순한 재료를 가지고 결코 단순하지 않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가 화면 속에 그려놓은 인물과 동물들은 마치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감각적이고 사실적인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자연을 충실하게 재현해놓고 있는 이 일련의 그림들에다 작가는 의외로 ‘저 너머’라는 하나같은 제목을 붙인다. ‘저 너머’라니. 이 제목이나 주제 자체는 화면에 드러나 보이는 감각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가지고 있는 대상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그림에서의 감각적 닮은꼴은 ‘저 너머’라는 제목과 부닥친다. 왜 ‘저기’ 혹은 ‘저곳’이 아닌 ‘저 너머’인가. 그려진 그림 저편의 미처 그려지지 않은 부분을 봐달라는 주문이고, 그림의 가시적인 영역이 암시하고 상기시켜주는 비가시적인 영역을 봐달라는 주문이다. 여기서 저기 혹은 저곳이 사물, 세계, 대상의 감각적 표면이 전개되는 지평이라면, 저 너머는 그 표면을 넘어서 사물, 세계, 대상의 실체가 드러나 보이는 장이다. 작가는 다름 아닌 사물의 본성이, 사물의 자기다움이 정박해 있을 만한 한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 전통적인 재현회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 이면에서 감각적 현실의 저 너머에 있는 비감각적 현실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로써 현실에 정박하는 대신 현실로부터의 초월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작가의 회화로 하여금 저곳(그림의 가시적인 영역)에서 저 너머(그림의 비가시적인 영역)를 넘보게 하고, 또한 실제로도 넘어가게 해주는가. 현실을 닮은 것처럼 보이는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여러 면에서 현실과는 다르다.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평면적으로 보이고, 흑백의 모노톤으로 환원된 색채마저도 단순하다 못해 금욕적이기 조차 하다. 동물 그림도 그렇지만 특히 인물화에 반영된 소위 정면성의 법칙 역시 비현실성을 더한다.
여기서 정면성의 법칙이란 단순히 대상의 정면 시점을 포착한 형식적 개념이기보다는, 사실상의 증명(성)을 의미하는 상대적으로 더 유기적인 개념이다. 즉 인물들은 정면은 물론이거니와 측면포즈를 취하는 등 그 시점에 일정한 변화를 꾀할 때마저 무표정하고 경직돼 보이며 심지어는 엄격하기 조차 하다. 마치 증명사진에서처럼 그의 인격이 그림의 표면 위로 뚫고 나오지 못한다. 주관적인 인격이 객관적인 정보나 소재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여기서 작가의 시점은 공감적 시점으로서보다는 관찰자적 시점에 가깝다). 더욱이 그는 배경마저도 결여하고 있다. 즉 실제의 사물현상은 자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사물들 간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여져 있기 마련이며, 이때의 사물을 그 배경과 분리할 수는 없는 형태로 현상하기 마련이다. 이런 배경화면을 삭제함으로써 작가는 그림을 사실상 추상화한 것이다. 관계의 망으로부터 동떨어진 모티브로 인해 비현실성을 강조하고,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화면을 추상적인 화면으로 변질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보기에 따라서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프랭크 스텔라)이라는 동어반복적인 전언으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적 환원주의를 재현화법의 논리를 통해 풀어낸 다른 한 버전으로마저 비친다. 그렇다면 작가가 감각적 사물현상 저 너머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결국 사물의 본성(인격)이 아니라 그림의 본성(그림은 그림일 뿐이라는)이 아닌가.
그러나 꼭 그렇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작가의 그림은 실제를 추상화하는 만큼이나 실제를 현실화하기도 한다. 삭제된 배경화면은 일종의 여백으로써 설정된 것일 수 있고, 이는 그대로 인물의 비가시적인 인격을 암시하는 공간일 수 있다. 정적이고 단조로운 화면 역시 온전히 인물 자체, 인격 자체에 몰입케 하려는 고도의 전략 혹은 장치일 수 있다. 결국 ‘저 너머’란 주제의식을 통해서 작가는 사물의 본성과 그림의 본성, 둘 다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질적인 두 지층이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 연유한 긴장감이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고 있다.

자연 풍경을 대상화한 그림들. 작가는 다른 일련의 그림들에서 연잎과 송림, 옥수숫대와 대나무 숲, 폭포와 매화(홍매와 백매) 등의 자연 소재를 대상화하는데, 이는 인물과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들과는 그 인상이 사뭇 다르다.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소재가 자연풍경으로 옮아오면서 화면이 현저하게 확대된 점과, 소재로써 화면을 가득 채워 그리는 점을 들 수 있다. 일종의 공간공포(빌헬름 보링어)나 사진에서의 클로즈업 기법을 연상시키는 이 현상은 그림의 현실감을 강조해주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인상을 강화하기도 한다. 즉 모티브와의 시각적인 거리는 좁혀졌지만(화면에 꽉 찬 모티브는 마치 숲 속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거리감은 오히려 더 증대된 느낌이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심리적인 동화현상으로까지 확장된다.
이렇게 그림에서의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그리고 가시적인 대상은 비감각적이고 비재현적인 그리고 비가시적인 그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암시하는 상징으로 전이된다. 불현듯 대나무 숲 뒤쪽으로 대나무와 대나무간의 사이공간이 드러나 보이고, 매화나무의 가지와 가지 사이에 여백이 열린다. 그리고 그 사이공간과 여백에 바람이 분다. 작가는 다름 아닌 이 바람을 그리고 싶은 것이다. 스스로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감각적 형상을 빌려서만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이 바람을 작가는 음기라고 부른다.
여기서 음기 자체는 그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가변적인 존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양기에 의해서만 감각적인 형상을 덧입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람은 그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지만, 이는 감각적인 형상을 통해 암시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비가시적 실체로는 바람과 함께 또한 달을 들 수 있다. 즉 작가의 그림에 달은 그려져 있지 않지만 칠흑 같은 어둠 위로 그 형체를 드러내 보이는 이미지들에서 달빛의 실체는 분명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화면은 그려진 그림을 경유하여 그려지지 않은 그림, 암시적인 그림에 가 닿는다. 바람과 달빛, 미처 그려지지 않은 배경 어둠 속 정경이 품고 있는 음기, 사물의 고유한 형상이 허물어지고 지워지는 사물과 사물 사이, 그 어둠, 그 여백, 그 경계를 붙잡으려는 작가의 기획은 일종의 초월적 기획과 통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이 기획이 감각적 형상의 부정이나 폐기를 통한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감각적 지평 속에서의 초월을 지향하고, 감각적 사물현상을 끌어안는 초월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더 설득력을 얻는다.
이재삼은 이 모든 그림들을 달랑 목탄 하나로만 그린다. 이로부터는 회화의 기본이나 그 본질에로의 회귀 또는 환원과 함께 일종의 도덕적인 자의식(그 자체 금욕주의로 부를 수 있을 만한)마저 느껴진다. 목탄 자체는 빛을 흡수해 들이는 성질이 있어 마치 그 속에 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깊고 짙은 색조(색감)를 가능하게 해준다(이에 반해 흑연은 빛을 내뱉는 성질이 있어 마치 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것 같은 금속성의 표면질감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도 작가는 목탄을 검묵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단색처럼 보이는 목탄의 색감이 사실은 그 이면에 수많은 색의 밸류를 함축하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어둠의 정적 위로 밀어 올려진 이 이미지들은 밤이 내재하고 있는, 그 자체 휴식과도 통하는 정화력과 치유력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