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전 (5.11-7.5, 김종영 미술관), 정연희 전 (4.11-5.2, 갤러리 인)
조각가 박소영과 화가 정연희의 작품에서 자연은 여러겹의 베일을 쓰고 나타난다. 그래서 조각이나 회화는 바닥이나 벽에 고정된 단일성을 벗어나 다양한 면모로 접혀지고 펼쳐진다. 초록잎으로 둘러싸인 박소영의 사물들은 낮의 세계를, 드높은 천공을 수놓는 별의 무리들을 보여주는 정연희는 밤의 세계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구별은 피상적일 뿐이다. 비록 구체적인 형상들이 있기는 하지만, 낮이든 밤의 세계이든 그들이 자연을 시시콜콜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재현적 사고의 근간이 되는 본질이나 동일성이 아니라, 일련의 문맥 속에 설정된 차이와 공존 또는 공명이 존재한다. 그들은 문득 맞딱뜨린 미시적, 또는 거시적 자연을 되풀이하여 해독해야 할 미지의 기호로 만든다.
박소영은 여러 형태로 프린트된 모조 잎을 일상적 사물, 특히 기능을 상실하고 버려진 물건의 표면에 붙인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알맹이를 색다르게 포장한 껍데기가 아니라, 표면의 무한한 반복을 통해서 본질 자체를 변형시킨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에 의해 설명되는 같음의 반복과,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하는 반복을 구별한 바 있다. 전자는 기계적이고 정태적인 반면, 후자는 독특하며 동태적이다. 버려진 변기, 화분, 또는 자연 한토막의 굴곡을 따라가는 반복적인 포장 행위는 대상을 봉인시키면서 그것을 비밀스러운 해석의 대상으로 만든다. 모조잎이라는 분절된 작은 단위는 배열의 리듬을 따라 다양한 질감과 깊이, 그리고 잠재적인 움직임을 창출한다. 거기에는 자연도 인간도 사물도 아닌 것에서 발산되는 기이한 생기가 있다.
그것은 껍질로 싸여지는 대상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결핍을 장식으로 메꾸려는 것이 아니다. 그점에서 그것은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반복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심층적인 반복이다. 박소영의 반복행위는 재생이나 모사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점들 주변으로 또다른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동어반복이 아니라, 점진적인 기술(記述)이자 진화인 것이다. 이러한 심층적 반복은 동일한 요소들의 규칙적인 회귀가 아니라, 강세와 강도를 지닌 단위들이 일련의 음가(音價)를 형성한다. 그 음가들은 다(多)리듬을 가리키는 어떤 특이점, 특권적 순간들을 창조한다. 들뢰즈는 동등하지 않은 점들, 굴절하는 점들, 율동적인 사건들의 되풀이가 등질적이고 평범한 요소들의 재생보다 훨씬 근본적이라고 말한다.
리듬상의 차이에 의거한 반복은 발산과 탈중심화를 동반한다. 이는 유희적인 예술의 언어의 특징이다. 예술에서 반복은 사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상으로 뒤바꾼다. 잎의 모조 그자체가 반복이지만, 여기에 또다른 반복적 행위가 가세하면서 모사를 극한으로 밀고나가 결국 모상이 전복되고 허상으로 변화한다. 이 점에서 박소영의 작품은 팝아트의 전략을 따른다. 작가가 수집한 사물들은 일상의 흔해 빠진 소비품들이다. 그 위에 실행된 반복은 일상적 삶에 작은 차이를 끌어내어 일련의 계열을 만들고, 이러한 양태 변화들은 삶과 죽음, 일상과 예술 등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는 공명을 만들어낸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부정없는 차이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했다.
차이가 부단한 탈중심화와 발산의 운동이라면, 반복에서 일어나는 전치와 위장은 그 두 운동과 밀접한 상응관계에 놓인다. 이점에서 반복은 차이의 역량이자 분화의 역량이다. 작품에 사용되었던 모든 종류의 모조잎새들이 등장하여 다리 하나씩을 감싸며 다족류처럼 뻗친 한 작품이 예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박소영의 작품에서 사물들은 초록빛 옷을 입고 스스로 위장하면서 자신을 형성해 간다. 이러한 위장은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지만 위장을 가리는 것은 또다른 위장일 뿐이다. 전시장 밖 ‘진짜’ 신록들 사이에서 초록 껍질을 벗은 채 알몸으로 옹기종기 앉아있는 덩어리들은 여전히 수수께끼같은 형태로 남아있는데, 그것은 박소영의 작품에서 반복되어야 할 최초의 항이 본래부터 없었다는 점을 예시하고 있다.
정연희는 어둑한 전시장 안을 우주로 연출한다.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별무리는 높은 천정으로 솟구치고, 여러 굴곡을 있는 거대한 펼침막에 물결이 투사되어 어른거린다. 바닥면은 우주의 장관이 그려진 그림이 투명한 마감재에 깔려 있기 때문에, 위아래 할 것없이 상호반영되는 형상이 우주의 무한성을 예시한다. 빛나는 성좌들은 성당이나 미로같은 도시의 평면도로 전치되고, 평면도는 다시 거대한 배가 되면서 창공은 바다와 중첩된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들은 별들의 궤도가 되고, 미지의 도시의 길이 되며, 선박의 항로가 된다. 전시장에는 이러한 대우주의 쉴새없는 창조와 소멸을 누워서 관조할 수 있는 거치대가 놓여져 있는데, 이 또한 관객을 우주의 대양으로 떠돌게 하는 작은 배로 변모시킨다. 이렇게 연출된 무한한 공간성은 변동과 경로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연극성(theatricality)을 내포한다.
이 공간은 하늘로 뚫린 창이라기 보다는 가변적인 변곡이 있는 선들로 뒤덮인 하나의 어두운 방이다. 내부로 무한하게 열려있기 위해 외부와는 차단된 이러한 어두운 공간은 들뢰즈가 [주름]에서 묘사한 수도원의 독방과 유사하다. 빛은 단지 구멍에 의해서만 스며나오고 이 구멍은 굽어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부의 장식물들을 밝게 비추고 색칠한다.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른 빛나는 작은 형태들이 찰랑거리는 바닥은 바닥을 부정하며, 높은 꼭대기의 존재들과 조응한다. 들뢰즈는 밑바닥이 없는 높은 꼭대기라는 구조를 바로크의 고유한 이미지--‘물결과 흐름으로 넘실대는 물질의 바닥으로부터 사유와 자유를 품은 정신의 꼭지점으로 솟아오른 것’--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창공과 심연의 점들은 내포된 에너지를 방출한다. 균형이 잡힌 정지된 점이 아니라, 성장하는 무엇이다. 이 점은 운동을 일으키는 점, 변곡의 점이자 우주생성의 점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주는 무한히 다양한 곡률을 가진 곡선과 같고, 세계는 많은 사건의 유성이 쏟아져내리는 밤하늘과 같다. 정연희의 작품에서 원초적 형상들의 무한한 집합은 신이 되며, 신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는 동일성이 아니라, 무한의 심연속으로 빠져든다. 이 우주는 본질성이나 완결성 대신에 어두운 심연의 편재성과 유체성을 가진다. 그것은 의미가 고정된 상징적 우주가 아니라, 끝없이 해독되어야 할 알레고리이다. 상징이 영원과 순간을 세계의 중심에서 결합한다면, 알레고리는 중심없는 세계 안에서 자연과 역사를 발견한다. ‘Ascending River’(전시부제)의 무대는 들뢰즈가 말한 바로크의 공간처럼 상승과 생성을 교차시킨다. 여기에서 물질의 무대는 정신, 혹은 신의 무대로 대체된다.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미로인 도시, 곡률 또는 변곡의 무한한 계열 이것이 이 세계이다.
세계는 무한히 많은 점에서 무한히 많은 곡선과 접하는 무한한 곡선,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면서 독특점들 주위에서 수렴하는 무한히 많은 계열이다. 이 무한한 계열들은 차이적 관계들을 이룬다. 영원한 대상들은 사건의 흐름 안으로 들어간다. 이 흐름 속에서 영원성은 창조성과 대립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보편적인 유일한 시점이 없다. 보편적 정신의 교의가 부재한 우주에는 공존 불가능했던 다양한 세계들은 거대하고 잠재적인 카오스모스 안에서 서로 교차하게 된다. 그러나 전시장은 조화로운 천상의 하모니만 울려퍼지는 것은 아니다. 또다른 전시실에 걸려있는, 알누미늄 판에 그려진 그림들은 영속적인 탄생과 창조적인 팽창이 일어나는 신의 창공에 돌입하기 위해 거쳐야하는 험난한 여정을 예시한다. 상승과 고양은 또한 추락과 유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미끌거리는 금속성 물질의 표면에 흡수되지 않은 채 고착된 찐득한 안료의 흐름들 사이로 지옥의 불덩어리 같은 것이 떨어진다.
악몽과도 같은 카오스의 세계 역시 ‘창조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의 우주’(알베르 베갱)의 포착과 관련이 있다. 알베르 베갱은 낭만주의를 연구한 한 저서에서 꿈꾸는 이가 격는 감정은 미지의 나라의 두가지 양상과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즉 극도의 지복이나 극도의 공포가 그것이다. 사랑이 군림할 때는 한량없는 지복이 있을 뿐이지만, 항상 사랑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생성 중인 불안정한 세계에서 천국과 지옥의 풍경을 정확히 가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겹겹이 무너져내리면서 형성 중인 원초적 혼돈의 세계들은, 그것을 관통해 도달해야할 영원의 바다처럼 심연의 형상을 가진다. 심연은 추락이자 고양의 공간 되며, 각성은 황량한 공간들, 물결치는 혼돈 속에서 문득 일어난다. ‘심연으로 내려가 그것들을 환한 빛 속으로 끌어 올리는’(헤르더) 이중적 사건이 칸막이 처져있으면서도 연결된 두 방에서 벌어지고 있다. (출전; 아트 인 컬처 6월호)
이 공간은 하늘로 뚫린 창이라기 보다는 가변적인 변곡이 있는 선들로 뒤덮인 하나의 어두운 방이다. 내부로 무한하게 열려있기 위해 외부와는 차단된 이러한 어두운 공간은 들뢰즈가 [주름]에서 묘사한 수도원의 독방과 유사하다. 빛은 단지 구멍에 의해서만 스며나오고 이 구멍은 굽어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부의 장식물들을 밝게 비추고 색칠한다.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른 빛나는 작은 형태들이 찰랑거리는 바닥은 바닥을 부정하며, 높은 꼭대기의 존재들과 조응한다. 들뢰즈는 밑바닥이 없는 높은 꼭대기라는 구조를 바로크의 고유한 이미지--‘물결과 흐름으로 넘실대는 물질의 바닥으로부터 사유와 자유를 품은 정신의 꼭지점으로 솟아오른 것’--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창공과 심연의 점들은 내포된 에너지를 방출한다. 균형이 잡힌 정지된 점이 아니라, 성장하는 무엇이다. 이 점은 운동을 일으키는 점, 변곡의 점이자 우주생성의 점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주는 무한히 다양한 곡률을 가진 곡선과 같고, 세계는 많은 사건의 유성이 쏟아져내리는 밤하늘과 같다. 정연희의 작품에서 원초적 형상들의 무한한 집합은 신이 되며, 신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는 동일성이 아니라, 무한의 심연속으로 빠져든다. 이 우주는 본질성이나 완결성 대신에 어두운 심연의 편재성과 유체성을 가진다. 그것은 의미가 고정된 상징적 우주가 아니라, 끝없이 해독되어야 할 알레고리이다. 상징이 영원과 순간을 세계의 중심에서 결합한다면, 알레고리는 중심없는 세계 안에서 자연과 역사를 발견한다. ‘Ascending River’(전시부제)의 무대는 들뢰즈가 말한 바로크의 공간처럼 상승과 생성을 교차시킨다. 여기에서 물질의 무대는 정신, 혹은 신의 무대로 대체된다.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미로인 도시, 곡률 또는 변곡의 무한한 계열 이것이 이 세계이다.
세계는 무한히 많은 점에서 무한히 많은 곡선과 접하는 무한한 곡선,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면서 독특점들 주위에서 수렴하는 무한히 많은 계열이다. 이 무한한 계열들은 차이적 관계들을 이룬다. 영원한 대상들은 사건의 흐름 안으로 들어간다. 이 흐름 속에서 영원성은 창조성과 대립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보편적인 유일한 시점이 없다. 보편적 정신의 교의가 부재한 우주에는 공존 불가능했던 다양한 세계들은 거대하고 잠재적인 카오스모스 안에서 서로 교차하게 된다. 그러나 전시장은 조화로운 천상의 하모니만 울려퍼지는 것은 아니다. 또다른 전시실에 걸려있는, 알누미늄 판에 그려진 그림들은 영속적인 탄생과 창조적인 팽창이 일어나는 신의 창공에 돌입하기 위해 거쳐야하는 험난한 여정을 예시한다. 상승과 고양은 또한 추락과 유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미끌거리는 금속성 물질의 표면에 흡수되지 않은 채 고착된 찐득한 안료의 흐름들 사이로 지옥의 불덩어리 같은 것이 떨어진다.
악몽과도 같은 카오스의 세계 역시 ‘창조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의 우주’(알베르 베갱)의 포착과 관련이 있다. 알베르 베갱은 낭만주의를 연구한 한 저서에서 꿈꾸는 이가 격는 감정은 미지의 나라의 두가지 양상과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즉 극도의 지복이나 극도의 공포가 그것이다. 사랑이 군림할 때는 한량없는 지복이 있을 뿐이지만, 항상 사랑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생성 중인 불안정한 세계에서 천국과 지옥의 풍경을 정확히 가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겹겹이 무너져내리면서 형성 중인 원초적 혼돈의 세계들은, 그것을 관통해 도달해야할 영원의 바다처럼 심연의 형상을 가진다. 심연은 추락이자 고양의 공간 되며, 각성은 황량한 공간들, 물결치는 혼돈 속에서 문득 일어난다. ‘심연으로 내려가 그것들을 환한 빛 속으로 끌어 올리는’(헤르더) 이중적 사건이 칸막이 처져있으면서도 연결된 두 방에서 벌어지고 있다. (출전; 아트 인 컬처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