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오후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나무가 많은 목동 아파트촌에 있는 화가 이경혜의 작업실 겸 거주지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마름모 무늬의 하얀 커튼 뒤로 놓여져 있는 식물들이었다. 벽에 붙어있는 오디오 기기와 여행지에서 수집해온 듯한 예쁘고 작은 오브제들도 인상적이었다. 작업 환경과 작품이 일 대 일의 인과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환경은 분명 정물과 풍경이 주를 이루는 그녀의 그림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적절하게 제어된 자연 앞에서 느껴지는 감흥과 관련된 것이다. 대중들의 시선과 작품을 맞추면서 평온한 즐거움을 내포한 이경혜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이력으로, 그녀가 정통적인 화가 코스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경혜는 1999년 서울의 롯데 화랑에서 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2006년까지 7회의 개인전을 통해 거의 매해 전시를 해 온 뚝심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으나,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던 1990년까지 고등학교와 대학의 교단에서 몇십년 동안 음악을 가르쳐 왔던 음악 선생님이었다. 그래서인지 음악은 이경혜의 작품에 깊이 스며있다. 음악적인 배경을 가진 작가는 끼를 발산하는 자유분방한 그림보다는 절제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좋아하며, 서로 다른 멜로디가 조화를 이루는 대위법과 같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그것은 화면 전경의 구상적 모티브와 배경의 기하학적 구획의 대조로 나타나곤 한다.
이경혜의 그림 목록에는 조형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한 누드 이외에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나 풍속적 삽화가 거의 없는데, 인위적인 제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물이나 풍경은 음악가적 절제와 중용을 발휘하기에 적절한 장르였던 듯하다. 음악과 더불어 이경혜의 그림의 특징지우는 것은 장식성이다. 필자는 음악성과 장식성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그녀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음악이다. 이경혜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며,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 [로맨스2](2000)는 하얀 꽃병에서 폭죽처럼 터져 올라간 꽃다발이 다른 오브제와 함께 고전적인 구도를 형성한다. 테이블에 드리워진 흑백 무늬의 천과 곡선을 이루는 배경 문양은 화면에 평면성과 장식성을 부여하면서 정적인 정물에 리드미컬한 활기를 준다.
[빈 자리에 놓인 꽃 1](2002)은 하얀 꽃병에 꽂힌 꽃다발에 기하학적으로 구획되어 있는 배경이 깔린 작품이다. 마치 피아노의 건반처럼 흑백으로 채워진 평면에는 음의 높낮이를 알리는 수직 수평의 기호가 새겨져 있다. 정물이 아닌 풍경에서도 음악성을 찾아볼 수 있다. [남한강 귀여리](2002)가 그러한데, 이 작품은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수면에 비친 하늘과 산그림자는 육중한 부피감을 가지는 산 못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서는 실재보다 허상이 더 강조되어 있다. 거의 추상적인 색면들로 이루어진 허상들은 물의 파장과 공명하는 듯하다. [해남 두륜산](2006) 대부분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포근하게 대지를 감싸는 분위기의 풍경과 달리, 높은 산봉우리가 화면을 압도하면서 상쾌한 시각적인 메아리를 울려퍼지게 한다.
안정감 있는 수평면에 길이가 다른 수직적 나무가 듬성듬성 꽂혀 있는 작품 [문막](2004)은 또 다른 운율이 느껴진다. 산아래 작은 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풍경 전면에 떨어지는 강한 오후의 햇살 아래에는 그녀의 다른 그림들처럼 인적이 없다. 인간의 온기가 담겨있어야 할 삶의 터는 색과 형태의 조합으로 치환되면서 신비로운 적막감과 이국성을 자아낸다. 이경혜의 풍경화에서 풍기는 이국적 정서는 해외 여행지의 풍경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몇가지 무정형의 색면으로 구획된 풍경화 [말라가로 가는 풍경](2000)은 사실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구성적 견고함을 보여준다. 작품 [그라나다의 유대인 거리 1,2]는 이례적인 수직적 구도의 작품으로 4개가 쌍을 이룬다. 2층 3층의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그린 풍경인데, 하얀 벽에 옆 건물의 짙은 그림자를 떨구었을 이국의 청명한 날씨를 담아내면서 여행지에서의 감흥을 전달한다.
레비 스트로스는 [미학 에세이]에서 구조주의적 방식으로 음악과 미술의 관계를 논한 바 있다. 그는 과학자 뉴턴을 인용하면서, 빛의 굴절 각도에 의해 다양한 색깔로 나타나는 원무늬 직경과 한 옥타브의 음표들을 산출하는 모노코드의 상이한 길이와의 수학적 관계를 살펴본 바 있다. 단계별로 구별되는 색채의 집합 및 구성원리는 직관적으로 소리와 비교하게 한다. 많은 화가들이 감지했듯이 음과 색조는 상응관계를 이룬다. 회화의 경우에는 한쪽에 데생이 있고, 다른 한쪽에 색채가 있다. 음악의 경우 한쪽에 멜로디가 있고 다른 쪽에 하모니가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하나의 배열만을 인정하는 음의 연속적인 나열을 멜로디로, 그리고 멜로디가 사용할 수 있는 음의 창고 겸 목록을 하모니로 정의한다.
이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이경혜의 그림에서 화면을 가르는 선적인 연속성에서 멜로디를, 색채의 동시적 울림에서는 하모니를 읽을 수 있다. 한편 질서 잡혀진 음은 자연이 아니라 전적으로 문화에 속한다. 음악의 관계하는 세계는 구상화figuration를 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경혜의 그림에 내재한 음악적 특성은 사실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단계와 관련된다. 그러나 완연한 추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이 과도적 단계에서 장식성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미술사를 되돌아보면, 19세기말 20세기 초 전환기에 장식예술과 모더니즘은 극적인 상호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장식과 추상은 모더니즘 미학이 더욱 정교하게 됨에 따라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지만, 적어도 초창기에는 재현을 벗어난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배를 탔던 것이다.
이경혜의 작품 역시 재현에 기반을 두면서도 단순함과 순수한 형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궤적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 그녀의 작품은 구상적 요소가 있으나, 사실과 서사 보다는 음악성이나 장식성같은 추상적인 패턴이 더욱 두드러진다. 근대적 화가는 단순한 묘사보다는 구성과 조화라는 추상적 법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음악이나 수학적 요소가 더욱 가깝게 다가올 수 있다. 풍경과 정물을 이루는 요소인 추상적 패턴과 화면 구획, 그리고 여기에서 도출되는 조화와 균형의 감각이 아름다움을 낳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전적인 모더니즘 시기에 즐거운 그림을 그리겠노라고 공언했던 화가 앙리 마티스를 떠올릴 수 있다. ‘기분좋은 팔걸이 의자같은 작용을 하는 예술’을 추구했던 마티스는 예술작품의 본질적 특성은 장식이라고 말했다. 곡선 리듬이 전면모양all over pattern을 형성하거나 평면적인 형태가 장식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이경혜의 정물화에서도 보이는 특성이다.
이경혜는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대상을 정면에서 주시하면서 자신의 느낌을 강조하였으며, 정물적 소품들을 장식적 모티브로 자주 등장시켰다. 그림에 재현적인 요소가 있지만 그림의 내용물이 아니라, 전체적인 배열에 있어서 표현을 추구한다. 그것은 색채와 명암, 구도같은 그림의 구성요소들이 가지는 내재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성은 ‘화가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을 장식적인 방법으로 임의로 배열하는 기술’(마티스)이 된다. 이경혜의 정물화와 풍경화는 초창기 모더니즘 회화처럼, 음악을 포함하는 장식적인 요소와 조형적 요소와의 상응관계를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과 인간과의 신비한 친화력을 중시하면서 기존의 내러티브와는 다른 상징적 가치를 획득하고자 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6월호)
이선영
#2964
이경혜 / 소리의 꽃다발, 풍경의 울림
이선영
2007. 06. 30.
이선영
서울 출생
인명사전 바로가기 : www.daljin.com/author/3059
미술평론가 이선영(b.1965)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하였으며, 웹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 편집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를 수상 하였다.
미술평론가 이선영(b.1965)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하였으며, 웹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 편집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를 수상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