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6.27-7.3, 갤러리 한




나무의 따스한 느낌과 식물의 녹색이 주조를 이루는 입체 작품들은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을 바탕으로 하지만, 김형석의 작품에서 자연은 통상적인 자연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것들은 인간 또는 신 중심주의가 전제하는 유기적 총체성이 아니라, 부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분들은 기이한 연결고리를 따라 전개되거나 흘러간다. 한국에서의 전시에는 빠졌지만, 어느 노랫말을 따온 한 작품의 제목처럼 만물, 심지어는 외계인과의 평화롭고 신비로운 소통, 즉 타자와의 대화를 추구한다.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으면서도 엽록소의 색을 가진 그것들은 식물같은 양상을 보이지만, 두개의 끝점이 연결된 소화관 및 소리를 통과시키는 텅 빈 구조는 동물적 형태와도 관련된다. 부분으로 나뉘어진 절단된 체계들은 기계를 떠오르게 하지만, 자극의 방향을 향해 뻗어 있는 반사적 운동감은 유기체를 연상시킨다.

또한 그의 작품은 단독으로 고립된 형태는 없고, 분절된 여러 형태들이 연결된 구조를 가진다. 하나는 여럿과, 파동은 입자와, 덩어리는 분자적 형태와, 외부는 내부와 연결되곤 한다. 모호한 정체성과 예기치 않은 연결 구조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소통이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나팔구조는 소통과 연결을 압축하는 형태이다. 그것은 어느 방향으로든 급격히 전환하면서 물질과 에너지를 수렴하거나 발산한다. 또 하나 두드러진 것은 합판을 여러 겹 붙여서 그 단면을 노출한 주름의 형태이다. 이러한 주름은 물질의 기본입자처럼 단순하게 축약된 인간 형태의 작품 [My Generosity] 시리즈에서 주로 나타난다. 겹 주름이 진 물질의 층들은, 몸은 물론 몸에서 촉수처럼 뻗어 나온 나팔관에도 드러나 있다. 들뢰즈(G. Deleuze)는 [주름Le Pli]에서 유기체를 원초적인 주름, 접힌 것, 접기로 정의한 바 있다. 유기체는 내생적인 주름을 가진다면, 사물들은 외생적 주름을 가지고 있다.





무한히 나아가는 주름은 물질과 유기체 간의 친화성을 드러낸다. 김형석의 작품에서 합판의 무수한 집적이 만들어내는 주름의 미묘한 텍스추어는 덩어리를 이루는 물질의 탄성력을 예시한다. [My Generosity] 시리즈는 관객이 만지면 오뚜기처럼 본래 자리를 찾아가는데, 그것은 자동인형처럼 생명의 스프링으로 만들어져 있다. 주름잡힌 막이 끝없이 이어진 씨앗은 생명체의 전형적인 특성을 내포한다. [The Seed] 시리즈는 절개된 씨앗 주머니나 씨 형태 안에 들어있는 무수한 입자로 뭉쳐진 씨앗과 중층구조를 가진다. 여러 겹 포개진 구조 내부에 있는 나팔관이나 색색의 작은 입자들은 시간과 공간의 주름을 따라 이어질 소통의 매개 고리가 된다. 이 씨앗은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무한히 하나가 다른 하나에 감싸여 있다. 한 알의 씨앗에는 작은 나무가 이미 들어있고, 최초의 생물체는 이후 등장할 모든 생물체들을 포함하듯, 모든 개체들은 때가 되면 자기 차례에 자신의 고유한 부분들을 펼치도록 호출되는 것이다.

씨앗이나 배아는 애벌레 안에 접혀 있다가 스스로 펼치는 나비 같이 이질적인 성격을 품고 있다. 서로 다른 단편들이 연결되어 있곤 하는 김형석의 작품은 예기치 않은 형태나 스케일, 그리고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을 보여준다. 가령 머리통이나 가슴에서 불쑥 나온 관들, 분자적 단위들과 개체와의 접면, 색색으로 빛나는 별의 무리를 품고 있는 듯한 씨앗 등이 그것이다. 그의 작품은 기계론으로도 생기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각각이 전제하는 구조적이거나 개체적 통일성을 의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가타리(F.Gattari)와의 공저 [앙띠 오이디푸스LAnti-œdipe]에서 기계의 구조적 통일과 생물 특유의 개체적 통일이 없어지면 기계와 욕망 사이에 직접적 유대가 나타나고, 기계는 욕망하는 것이 되고 욕망은 기계화된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가슴이나 머리와 붙어있는 나팔관은 인간의 연장이나 대체, 투사로서의 기계가 아니다. 김형석의 작품에서 기계와 인간은 서로 들어가 사는 관계이다. 여기에서 기계는 커뮤니케이션의 인자로서 작동하여, 소리와 기계는 하나의 부품을 이루면서 소통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다.

작품 [Organ]은 수많은 나팔관 다발이 또 다른 나팔관의 형태를 만드는 프랙탈 형식의 구조물이다. 수많은 분지들로 이루어진 기관의 미세 구조는 진동들과 흐름들로 이루어진 환경 전체를 향한다. 몸체 없는 기관들 사이를 연결하거나 끊는 힘은 바로 욕망이다. 그것은 메카니즘 속에 욕망을 도입하고, 욕망 속에 생산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들뢰즈가 말한 바의 유물론과 관련된다. 이에 따르면 욕망은 기계요,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욕망은 개별 주체를 넘어서 사회의 터전을 직접 편력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연결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생산과 재생산의 형태이다. 그것은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작동하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표현하거나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생산하는 것이다. 가령 인간과 지구와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작품 [Talking with Earth]는 수많은 다발을 바닥에 토해내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강조된 것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두 가지 항이 아니라, 양자를 연결시키는 과정이다. [앙띠 외디푸스]의 구절처럼 여기에서 나와 나 아닌 것, 외부와 내부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인간은 만물의 왕이 아니고, 오히려 온갖 형태 혹은 온갖 종류의 깊은 생명과 접촉한다.





[Offspring] 시리즈에서는 하나의 나팔관에서 나온 또 다른 나팔관이나, 비슷한 결절 부분으로 연결된 상태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생산자와 생산물은 본질적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는 동일한 실재이다.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생산되는 것에 접목되어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로운 종합들의 영역, 즉 끝없는 연결들, 배타적이지 않은 이접(離接)들, 부분적 대상들 및 흐름들이 이번 전시의 주제이다. 하나의 신체 또는 기계로부터 또 하나의 신체 또는 기계로의 연결은 사이비 통일성을 파괴하며 나아간다. 이러한 크고 작은 연결들은 어떤 목적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는 과정을 중시할 뿐이며, 이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대지를 창조하려 한다. 그것은 전체적 구조나 원초적 기억, 상호적 유대감을 뒤로한 채 나아간다. 김형석의 작품에서 탈주는 부분적 대상들의 연결을 보여주는 방식 뿐 아니라, 뜬금없이 뻗어 나와 어디론가 향하는 나팔 형태나 무한히 잡혀지고 있는 주름, 산산이 흩어지려는 잠재태를 가진 분자적 구조에서도 보여 진다. 모든 부분적 대상이 하나의 흐름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근본성이나 특별한 원리들이 없다. 그가 어떤 것이라면, 오직 그가 다른 것임으로써 이다.

그러나 소통을 위한 끝없는 연결망들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의 고리들로 엮여있다. 그것은 요소들 간의 유대가 부재하기 때문에 서로 결합하고 있는 기이한 체계들을 이룬다. 들뢰즈에 의하면 우연한 관계들이란 실제로 구별되는 요소들 자체들 간에 유대 없이 연결을 가지는 관계들을 말한다. 타자와의 깊숙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연한 관계들의 실현에 의해서이다. 우연한 관계는 또한 통일되지도 전체화되지도 않은 채 부분들 곁에서 생산되는 또 다른 부분들의 세계를 말한다. 김형석의 작품에서 부분은 단편을 넘어서 입자로 분산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서로 다른 색의 구슬로 이루어진 입자, 또는 입자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입자가 등장한다. 가령 작품 [Offspring III]는 연결된 관들 위에 사슴 뿔 같은 형태로 입자의 형태가 모여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추상적인 선과 점의 세계가 아니라, 미로와도 같은 주름이나 분자적 현상과 관련된다. 그것은 곧 그의 작품이 유한의 체계가 아니라 무한의 체계를, 편집증적 전체주의가 아니라 분열을, 관념이 아니라 물질을,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