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영의 작업실은 상상의 공간이다. 적조하고 아늑하며 이 세상의 변방인양 고요한 그곳에서 이런 저런 상념의 실타래를 풀고 감는다. 작업대 위에서 동서양의 모든 이미지들이나 주변의 오브제들을 가지고 유희한다. 그의 손을 거쳐 맥락과 연고가 다른 것들이 슬그머니 조우한다. 그는 사물과 이미지, 기성의 오브제와 손으로 그려놓은 것들을 음양의 조화처럼 절묘하게 버무려 놓았다. 그는 상반되고 낯설고 문맥이 다른 것들을 연결시키거나 이질적인 것들을 공존시키는데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로인해 사물과 세계에 대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상식들을 슬쩍 지워내는 한편 보는 이들의 상상력과 몽상을 증폭시켜준다. 그래서 전혀 예상치 못한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놀라운 매개이자 기이한 모순이다. 그는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려주거나 그것이 자연스레 파생되어나가는 통로, 창을 만들어 보이는 것이 바로 미술의 일임을 믿는다. 따라서 그의 그림, 작업은 망막에 호소하면서도 결국은 뇌와 감성에 깊이 적셔지는 일이다. 그것은 지각과 지성에 관여하는 일이다. 보면서 꿈꾸고 나아가 이미지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와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관계, 화면안과 밖의 사이 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자신의 고립된 작업실 안에서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늑한 앞날에 대한 사념을 실처럼 풀어내고 문장처럼 다듬는다. 그 실과 단어들은 동서양의 모든 이미지들이자 자기 눈에 들어와 박힌 세상의 모든 존재이다. 그는 이미지를 참조로 하고 오브제를 매개로 해서 그 둘을 직조해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을 만든다. 그 문장은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현실과 비현실에 관한 단상 같기도 하고 한 개인의 내밀한 꿈과 의식/무의식에 관련된 임상보고서 같기도 하다. 그것은 결국 현재 자신의 의식계와 현실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의문과 탐색에서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인간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생애동안 나를 있게 한 과거와 내가 지워진 후의 미래라는 시간 축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어쩌면 그 시간은 무한상상의 시간이자 현실과 비현실이 오락가락하는 기이한 시간의 지대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시간의 지평위에서 과거와 미래의 실을 직조하고 문장을 만든다. 그는 자신만의 시간과 역사에 대한 개념을 축조한다. 그 축조의 틀 안에서 시간은 너울거린다. 모든 것은 심연의 깊이 아래 잠기다가 자맥질 친다. 직선적인 서구의 시간관은 사라지고 순환하는 동양적 시간관이 그렇게 부유한다.
그의 작업은 일종의 연구와 모색에 대한 단상을 시적으로 압축해서 이미지화 시켜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과거의 시간을 상징하고 우리의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미지(민화와 산수화, 혹은 불상 등)를 끌어들이고 그와 함께 서구미술사에 기록된 그래서 보편적인 미술의 대명사가 된 그림의 부분들을 바탕에 올렸다. 구상과 추상, 이미지와 실재하는 사물, 정신적인 것과 통속적인 것, 동양과 서양, 이성과 몽상 등과 같은 이원적인 대립요소들이 그의 화면 안에서는 세련된 감성으로 마감되어 더없이 조화롭게 공존한다. 파랑과 노랑 원색이 바탕화면에는 흰 색에 가까운 색상을 머금은 선들이 일정한 높이를 지니고 부드럽게 융기하면서 관능적인 궤적을 만들어 보인다. 그 이미지들은 박스와 미러지, 전선줄, 기타 여러 오브제들과 함께 주어진 공간 안에 세련된 감성으로 더없이 조화롭게 장치되어있다. 그것은 마치 건축적 공법이나 절묘한 배치, 장식을 떠올려준다. 화면 속 이미지는 화면 밖으로 나와 전선줄로 자존하다가 다시 그림 안으로 숨어든다. 비현실적인 색 속에 파묻힌 이미지, 선을 따라가다 보면 아득한 시간의 자취가 감촉될 것도 같다. 그러다가 다시 이 현실계로 돌아온다. 그림은 통로, 문이자 경계가 된다. 그는 그 경계를 보여준다. 모든 그림은 그런 경계이자 문이지 않을까?
박영택
#2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