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이 자주 나오는 정재석의 우화 형식의 그림은 풍자적인 요소가 강하다. 작년 전시에서는 돼지가 등장하였는데, 올 전시에서는 말이 등장한다. 오로지 말만 등장하는 그림들에 붙은 제목이 모두 ‘The Man’이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화면 한가운데 단독자처럼 나타나는 압도적인 형상은 인간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밝거나 어두운 빈 화면에 떠 있는 형상에는 구체적인 맥락이나 내러티브가 극히 자제되어 있어,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고 느껴지게 하고싶다’는 작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동물농장’이라 이름붙인 전시제목은 벽에 걸린 동물의 초상들을 연민에 가까운 시선으로 변모시킨다. 동물농장은 조지 오웰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에 의하면 그 소설의 주인공은 돼지이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말이다. 말은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지 않는 성실하고 우직한 대다수의 실행자들을 대변하고 있다. 작가는 말에서 한국의 남성상을 본다.

그는 원당의 말목장, 경마장 등지에서 경주마들을 찍어 작품에 활용하였다. 관상용 말이 아닌 경주마들인데도 불구하고, 일필휘지로 그린 날아갈 듯한 역동적인 모습이 없다. 그들은 앞이나 뒷모습, 전체나 부분의 모습 등이 사진처럼 정지된 모습으로 포착되어있을 뿐이다. 간혹 온순해 보이는 큰 눈을 관객에게 들키기는 하지만, 더 이상 말이 이동수단이 되지 않는 오늘날, 오직 승리만을 위한 스피드 기계로서 사육되고 훈련된 흔적이 역력하다. 승리를 위한 훈련의 결과물인 단단한 근육과 튼튼한 마구, 경기를 위해 호출된듯 나란히 배치된 모습이 그러하다. 또한 군상은 없고 한 마리씩 고립된 채 있어 경쟁지상주의가 야기하는 고독과 가혹함이 작품의 소재 뿐 아니라 형식 속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빅 브라더스 같은 보이지 않는 권력은 구성원들의 경쟁을 유지 강화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각자를 고립시켜야 한다. 권력은 고립된 개체들에게 작용하고, 또 개체들을 고립시킨다. 드라마틱한 액션 보다는 정지된 표면이 강조된 화면은 물성과 실존적인 고독의 분위기를 동시에 전달한다.





올해 2-3월 중에 집중적으로 작업하여, 전시장에 걸린 17점의 작품은 오일이나 아크릴로 직접 그린것도 있지만, 말을 찍은 사진의 디지털 프린트에 가필한 것도 있다. 사진과 가필 사이에서 이물감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화가에게 실제와 똑같은 완벽한 묘사력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뭔가 성실함의 부족, 눈가림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작업의 용이함을 위해서는 아니다. 사진을 이용한다고 해서 작업시간이나 비용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진이 영감을 주며, 덧칠하기는 놀이같은 쾌감을 준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 혹은 더 빈번히는 자아과 동일시 될 수 있는 화면의 중심 모티브에 가변성과 이질성을 개입시키는 방편이다. 그것은 작가적 구상이 완벽하게 관철된 작품이 주는 그럴듯한 성공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일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처럼 얼어붙은 말들은 때로는 눈조차도 가리고 달려야 하는 맹목적인 경쟁의 대열에 선 현대인의 모습이 교차된다.

작가는 스스로 비관주의보다는 낙관주의에 가깝다고 말하며, 또한 묘사된 말이 특별히 어떤 웅변적인 제스추어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과 교차된 경주마의 모습을 21세기에 접어든 한국의 사회적 문화적 현실에 대입해 볼 때 시사적인 면이 많다. 연간 무역액을 비롯한 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권 안팎을 넘나들며, 세계 유수의 기관이 조사한 한국의 경쟁력 순위도 상위권에 속하는 등, 세계로 개방한 한국의 경제는 놀랄만한 성장을 해왔다. 그러나 성장만큼 분배가 정의로왔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세계화된 분업으로 재편된 체제에서 몇배가 불어난 경제규모는 고용이 아니라 실업의 증가로 이어지고, 노동자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몰리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현실은 경제 규모나 국제 경쟁력에 비해 삶의 질은 현저하게 낮다. 공공부문의 사회정책은 가시적 성과가 없어서 교육이나 의료 등 기초적인 삶의 방편조차 개인이 과도하게 짊어지고 있다.

단적인 통계가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위로 조사된 예이다. 보다 가시적인 의미의 경쟁의 대열에 서있는 남성들의 압박은 더욱 강하여, 여성보다 3배나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병영이나 공장이 사회의 모델로 주어졌던 가부장적 독재정권 시대는 물러났지만, 신자유주의의 경제질서에 의해 기업이 사회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면서 또다른 틀이 강요된다. 보이는 폭력보다 더 강력한 보이지 않는 폭력이 횡행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정재석의 작품에 나타나는 말은 현상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는 보통인간들의 초상이다. 말은 보통 야생의 상징처럼 간주되지만, 사실은 전형적인 사육동물로서 인간과 역사를 같이 해왔다. 인간은 다른 동물을 사육하면서 다른 인간도 사육하고 스스로도 사육되어왔다. 이러한 여정은 휴머니즘의 역사를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역사적으로 휴머니즘은 인간의 야만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정립되었다.





휴머니즘의 철학적 내용을 이루는 것은 계몽과 이성중심주의이다. 그러나 그 논리가 극단화 될때 비합리와 야만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야만적 본성은 경기장이나 전쟁터에서 곧잘 발휘되었고, 오늘날에는 미디어가 그 본질을 이어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정재석이 이번 전시에서 선택한 경주마라는 테마는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에도 보편성을 가진다. 구성원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동일한 가치를 재확인하는 경기라는 주제는 미디어 시대에 날개를 달았기 때문이다. 말과 인간의 비유는 너무나 적절해서 무엇이 말의 상황이고 무엇이 인간의 상황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풍자는 외재성을 넘어 내재성을 획득한다. 특히 사육당하는 동물로서의 말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 역시 말처럼 길들여진다. 훈육과 사육은 길들이기의 전형적인 방편이다, P. 슬로터다이크는 오웰의 [동물농장]에 대한 21세기적 버전인듯한 저서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1999)에서 인간 길들이기와 휴머니즘을 연결시킨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성공적인 사육자이다. 인간은 윤리학과 유전학의 결합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사육해 왔다.

슬로터다이크는 사육자 모델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가 플라톤이라고 지적한다. 플라톤적 정치가는 사육자이다. 진정한 사육자들은 차이를 강조하고, 또 자신은 통찰에 따라 행위하기 때문에 그가 보호하는 혼란스러운 생명체들보다 훨씬 더 신들과 가깝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강조한다. 플라톤주의적 이상은 휴머니즘 사회의 프로그램이 되었다. 휴머니즘은 유일한 완전한 휴머니스트, 즉 왕의 목자 기술을 지닌 지배자에게서 구현된다. 소수의 엘리트가 전체를 사육하는 모델은 정보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더욱 힘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로 존재하고, 동물로 남아있는 것에 실패한 존재’(슬로터다이크)이다. 아직 규정되지 않은 이 존재는 동물로서의 자신의 실패를 통해 환경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그렇게 함으로서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세계를 획득한다. 정재석은 ‘말의 형상은 인간과 비인간을 오가는 존재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중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 균질화되지 않은 화면 속에서 불현듯 비져 나오곤 하는 비자아, 낯선 것, 타자는 모든 것을 하나로 몰아치는 동일성의 논리에 대한 대항논리가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기문화 재단 시각예술 부문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