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그려진 거대한 회화가 공허와 공포의 분위기에 젖어 있다면, 고풍스런 북커버에 그려진 그림과 프레스코화는 세밀화나 잘 정련된 보석같은 소우주적 밀도를 가진다. 열리지 않는 책뚜껑이라는 형식은 비밀스러운 세계의 입구 같은 느낌을 준다. 북커버에 그려진 소재 역시 건축, 인물, 식물 등 그림의 모티브가 변주되어 조합된 것이다. 건축적 구조물과 대치된 인간이나 식물 등이 등장하지만, 여기에서 발생하는 수수께끼는 회화작품처럼 위협적이기 보다는, 즐거움으로도 뒤바뀔 수 있는 미지의 형상에 속한다. 패널 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작은 스케일에 통일적인 형식을 더했다. 밀집된 건축물들은 소실점이 다양한 기이한 원근법을 가지고 있으며, 다채로운 색상이 입혀있으면서도 삶의 흔적이나 인적이 없는 상황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레스코화가 가지는 상대적인 안정감은 부동의 시간성과 관련된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되찾아진 시간, 즉 종교와도 비견될만한 절대적인 근원의 시간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예술작품을 통해 되찾은 시간은 펼쳐져 전개된 시간, 즉 흘러가는 계속적인 시간, 잃어버린 시간과는 대립되는 시간이다. 여기에서 예술작품은 비물질적인 장소들이나 풍경을 감싸며 세계의 시작을 구성한다. 반면 회화작품에서 허공에 메달린 인간을 압박하는 어두운 배경은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있는 실존적 시공간과 관련된다. 그들이 걸쳐있는 무시무시한 심연은 자유와 초월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황과 전락의 공간이기도 하다. 어둡고 딱딱한 인간의 표정에서 불행한 상황에 대한 자의식이 묻어난다. 당당한 누드가 아닌, 벌거벗겨진 채 홀로 떠있는 인간들에게 타인들이나 기계적 구조물은 서로 겉도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그를 둘러싼 자연이나 구원을 약속하는 신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또다른 정착지를 찾지 못했다. 숫자나 계단 등으로 나타나는 진보에의 환상도 그의 것이 되지 못한다. ‘삶에 대한 의식은 곧 삶의 불행에 대한 의식’(헤겔)이 되며, 이 지점에서 실존이 시작된다. 오원배의 작품에 나타나는 실존적 인간은 인간의 단말마적인 외침에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 비어있는 우주,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 앞에서의 무력감 사이에 있다. 뒤죽박죽의 우주를 지배하는 우연은 자유가 아니며, 미처 준비되지 않은 채 주어진 자유는 해방과 연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보이지 않은 감옥에 갇힌 수인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회화에 비해 긍정적인 빛으로 감싸인 소품들은 작가의 해결책이 광명한 이성이 아니라, 기호의 길에 있음을 예시한다.
오원배는 관객에게 사랑과 광기, 죽음이 점철된 어두운 전조인 기호를 맞딱뜨리게 한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추상적인 지성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기호들로부터 압박당하고 그 기호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만 활기를 띠는 지성, 자신을 질식하게하는 공허, 자신에게 침입해 들어오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만 활기를 띠는 지성이 문제이다. 수수께끼처럼 명멸하는 기호들은 관객에게 우연하지만 불가피한 무엇을 드러낸다. 우연히 나타나 해석을 강요하는 대상이 바로 기호이다. 그것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가 시작되도록 정신을 자극하는 대상인 것이다. 이 점에서 오원배의 소품이 텍스트의 형태를 가진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해석해야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대상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형문자같은 드러나는 미지의 기호들은 투명한 소통이 아닌, 침묵의 해석을 요구한다. 사물도 정신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우주에서 히스테릭한 몸짓을 하고 있는 인물들 역시 관객이 되풀이하여 해독해야할 거대한 상형문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플랫폼 여름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