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조각의 육중한 중량감과 부피감을 탈피한 전용환의 작품은 공중에 그려진 음악이자 율동이 고착된 춤처럼 경쾌함이 살아있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색조의 변화는 음계의 변화에 상응하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선은 아무리 복잡해도 결국은 하나로 이어져 있으면서, 작품마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중심 부분에 평행을 이루는 일련의 색띠와 그 바깥으로 요동치는 선의 궤도라는 구성 방식은 변화하면서도 반복된다. 그것은 일련의 구조와 선율을 이루면서 작품에 음악적인 면모를 두드러지게 한다. 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조형예술에 도입된 음악적 성격은 곧 시간적 요소의 강화를 의미한다. 빠르게 운동하는 입자의 궤적같은 선이 공간에 자유롭게 그려지는 그의 작품은 ‘공간의 시간화와 시간의 공간화’(데리다)가 이루어진다.
색조는 물론, 넓이와 높이 그리고 방향의 차이를 간직한 거대한 하나의 끈은 불규칙한 궤도를 돌면서 어딘지 모를 출발지점으로 다시 회귀한다. 시간적 요소는 음악 뿐 아니라 문학적 요소이기도 한데, 꼬리를 문 선으로 끝없이 연기되는 전용환의 작품은 공중에 휘갈겨 쓴 필체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그것은 글쓰기처럼 ‘차이의 기술(記述)’(블랑쇼)이 된다. 시공간이 얽혀 있는 매듭에는 차이가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공간의 시간화와 시간의 공간화가 특징인 그의 조각은 블랑쇼나 데리다로부터 비롯된, 현대철학의 주요 개념어인 ‘차이’와 ‘연기’를 내포한다. 여기에서 차이는 공간, 연기는 시간과 관련된다. 이러한 개념어는 그 선조격인 니이체의 ‘영원 회귀’와도 연결되며, 영향력 있는 현대 철학서인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다시 울려 퍼진다. 필자는 가족 유사성을 가지는 이들 철학자의 논지를 빌어 전용환의 이번 전시를 읽어 보고자 한다.
그것은 ‘transforming cycles’이라는 전시부제 및 작품제목이 변형과 주기라는 개념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전용환의 작품에서 관객들은 복잡하게 이어진 선을 더듬어 방향지워진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궤도는 복잡해도 화살표의 방향은 하나이다. 일견 시초와 끝을 가지는 전형적인 시간관을 내포하는 듯이 보이지만, 끝과 끝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순환적이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구부러져 있으면서 진보라는 하나의 벡터에 의한 직선적 방향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3차원 상에 서있거나 공중에 메달린 작품에서 두드러진 것은 텅 빈 중심과 불확실한 외곽이다. 이번 전시에서 새로이 선보인, 가느다란 동선으로 엮어서 만든 애벌레나 두상은 텅 비어 있는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그림처럼 벽에 붙이는 부조적 작품에서 텅 빈 중심 기둥에 해당되는 색띠들은 여러 방향의 힘을 받아 복잡하게 접혀있는 양상이다.
부조적이든 환조적이든,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중심을 끝없이 맴도는 궤도들에서 시간은 순환적으로 회귀하지만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는 불확실하다. 그의 작품에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시작과 끝이라기 보다는,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발생하던 원초적 시공간, 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는 파국적인 시공간이다. 전형적인 역사관이 앞과 뒤를 가지고 한 방향으로 흐르는 직선적 진보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전용환의 작품에서 시간 감각은 역사 이전이나 역사 이후에 해당한다. 시작과 끝은 거대한 순환주기로 연결되어 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말하듯이, 순환의 시간 속에서 세계는 매우 빠른 리듬으로 태어나서 쇠퇴하고 소멸했다가 다시 태어난다. 혼돈, 그리고 새로운 창조에 의하여 이 혼돈에 종말을 고하는 우주창조가 주기적으로 재연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겁회귀란 ‘이미 무한히 그자신을 반복하고 유희하고 순환적 운동으로서의 세계’(니이체)이다.

차이나는 것의 반복
그것은 영원히 회귀하지만 중심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을 향해 있으며, 종결이나 완성이 아니라 무한하게 펼쳐있는 외곽을 향한 추방이나 방황, 탈주를 내포한다. 영원회귀의 기원은 부재하며 그것은 순수한 차이의 세계에서 비롯된다. 거대한 주기를 상징하는 영원회귀는 진보나 목적이 아니라, 단지 무한한 지속을 의미하며,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변형 및 생성과 관련된다. 마크 테일러는 [미래로의 회귀]에서 회귀가 영원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원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모든 것은 전부 2차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전부가 2차적일 때, 무엇인가는 언제나 빠지게 마련이며 모든 것은 결여되게 마련이다. 예술은 이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의 세계, 시작이 있기 이전의 세계로 인도한다. 블랑쇼가 말하듯이 예술은 시작하고 끝맺는 능력을 우리에게서 박탈해 버렸다. 친밀성도 장소도 휴식도 없이 예술은 우리를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그것은 기원의 부재, 시간 속의 시간의 주변을 알리는 언제나 접근하지만 결코 도래하지 않는 미래로 회귀인 것이다. 든든한 실체보다는 기체같은 가벼움, 허상같은 느낌을 주는 전용환의 작품에서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일관성과 동일성이다. 그것은 거대한 순환주기를 가지면서 반복되지만, 동일한 것이나 유사한 것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영원회귀가 동일성 없는 어떤 세계, 요컨대 모든 것이 불균등성에 의존하고 무한하게 반향을 일으키는 차이들에 의존하는 세계라고 말한다.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파괴를 함축한다. 그것은 생성, 차이, 다양함과 관련된다. 전용환의 작품에서 화학적이거나 물리적인 상태의 차이를 가지는 색채와 형태는 스스로 변형할 수 있는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다. 이 에너지의 변용을 통해, 반복되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를 산출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정의한 반복처럼 자기 안에 차이들을 포괄하면서, 하나의 특이점에서 또 다른 특이점으로 직물처럼 짜여나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차이로서의 운동에서 체험되는 것은 순수한 힘들이며, 공간 안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역동적인 궤적들이다. 현기증나는 운동을 만드는 반복은 재현의 일관성을 무너뜨리는 무질서한 도약이나 춤을 닮았다. 사실, 시간 자체가 재현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빠져나갈 뿐인 그것은 그저 반복적으로 접근되면서 끝없이 추적될 뿐이다. 그것은 결정적인 것과 충돌하면서 중심에서 미끄러져 나와 가장자리에 존재하면서 스스로를 분산시킨다. 이러한 과정은 질서화된 재현이 아니라, 창조적 무질서에 가깝다. 전용환의 작품은 무한히 회귀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체의 보존이나 종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변신을 위한 것이다. 들뢰즈는 영원회귀가 모든 변신들 안에 현전한다고 말한다. 무한한 궤도를 형성하는 구불구불한 선들은 들숨과 날숨의 숨결처럼 반짝인다. 많은 띠와 선으로 주름 잡혀있으며 차이를 두고 서로의 꼬리를 무는 이 복잡한 세계는 어떤 동일성과도 무관한 카오스의 세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이체는 카오스와 영원회귀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카오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벗는다. 그것은 질서가 내포된 혼돈, 즉 카오스모스Chaosmos의 세계가 된다. 세계는 회귀를 통해 완성되지만, 제약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차이를 통해 달성된 영원회귀에서 정지화면은 새롭게 살아 움직인다. 시간은 직선의 끝에서 자리를 바꾸면서 탈중심화된 원환을 형성하며 이상한 고리를 형성하며 꼬인다. 재현의 바깥에 놓인 끈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끈을 통해 모든 것이 되돌아오는 이유는 그 어떤 것도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반복이 결코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언제나 차이나는 것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영원회귀는 모든 것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과도하고 비동등한 것, 끝낼 수 없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가장 극단적인 형식성의 산물인 비형식만을 긍정한다. 영원회귀는 다양한 모든 것, 차이나는 모든 것, 우연한 모든 것을 긍정한다. 전용환의 조각 역시 차이나는 것의 반복을 통해, 다양성이 내포된 어떤 결정적인 어떤 순간들을 포착하고자 한다.
출처 : 뷰즈 2007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