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 특히 조형 예술가들이 다뤄온 가장 전형적인 소재는 단연 인체일 것이다. 예술은 이념의 표상이며, 그 이념은 어떤 식으로든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형태를 통해서 표상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체는 가장 표피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심층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이념의 거의 전 영역을 표상할 수 있게 해준다. 그 표상은 직접적인가 하면 간접적이기도 하고, 즉물적인가 하면 암시적이기도 하다. 인체에 내재된 이런 거의 무한대의 표상능력은 인체 자체가 존재의 집이라는 인식과 함께, 인체가 지닌 천의 표정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표정은 그대로 삶의 다양한 지점들과 겹치며, 존재의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조건들 위에 포개진다.

인체가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존재론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체는 오래 동안 편견과 폄하와 극복의 대상이었다. 정신과 물질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사유체계 속에서의 인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 그리고 정신의 승화를 막는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인체는 세속적인 욕망과 동격인 것으로 여겨졌고, 부르주아의 관점에서의 인체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도덕을 위협하는 위험한 계기로 받아들여졌다. 오죽하면 도덕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은 채, 죄의식 없이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누드를 발명했을까. 누드와 네이키드의 구분이야말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구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서, 억압하면서 욕망하는 인체에 대한 이중성의 역사를 대변해준다. 법이 없으면 욕망도 없다. 금기가 오히려 없던 욕망을 만들어내기조차 한다. 도덕, 금지, 검열, 금기, 터부가 죽은 아버지의 껍데기뿐인 이름(허명)으로 살아남아 이러한 이중성을 퍼트리고 강화한다.

이렇듯 일종의 인문학적인 몸인 인체는 이중성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 굴레로부터 빠져나오지만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한 개념이 몸이다. 여전히 그 굴레의 잔재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몸은 그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무의식이 그것이다. 인체가 정신의 발명품이라면 몸은 욕망과 리비도와 무의식이 자기를 발현하고 실현하는 태(집)에 다름없다. 몸을 소재로 한 김일용의 작업은 이런 몸의 언어, 무의식의 언어와 대면케 한다.

김일용은 모델의 신체에다 직접 석고를 부어 그 몸을 떠낸다. 이러한 라이프캐스팅의 방식은, 입체와 평면이라는 외관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사진의 생리와 닮아 있다. 그러니까 양각의 형태를 얻기 위해선 음각 상태의 석고 틀을 먼저 제작해야 하는데, 이때 석고 틀이 사진의 전 단계인 필름에서의 네거티브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음각 상태의 석고 틀로부터 양각 상태의 최종적인 형상이 비롯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 역시 필름 상태의 네거티브 이미지를 경유해서만 비로소 포지티브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음각 상태의 석고 틀이나 필름 상태의 네거티브 이미지가 존재와 부재와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석고 틀 상태에서의 형상은 엄밀하게는 부재하는 것이지만, 일종의 가능적인 형태로 그 형상이 잠재돼 있다는 점에서는 반드시 부재한다고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필름 상태의 형상 역시 그 자체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형태로서보다는 일종의 가능태 혹은 잠재태로서 존재한다. 라이프캐스팅은 이처럼 존재와 부재와의 관계에 대한 선입견을 넘어선다.

한편, 예술을 이미지의 형태로써 세계를 소유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정의한다면, 라이프캐스팅이나 사진은 여타의 다른 방법이나 매체에 비해 세계를 더 잘 소유할 수 있게 해준다. 세계를 직접 떠내는 캐스팅이나 찍어내는 사진의 프로세스가 작가가 세계에 대해 해석적으로 간여할 수 있는 여지를 최소화함으로써 세계 자체와 만나게 해주고, 세계의 맨살과 대면하게 해주는 것이다.

김일용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인상 즉 지나치리만큼 친근하면서도 왠지 낯 설은 이율배반적이고 역설적인 느낌은 이처럼 해석되지 않은, 각색되지 않은, 미화되지 않은 모델의 맨몸과 직면하는 데에서 온다. 이를 작가는 ‘소름’과 ‘껍질’이라고 부른다. 몸의 표면질감이 만져질 것 같은 감각적이고 촉각적인 경험을 형용하고 있는 이 개념은 작가의 작업으로 하여금 신체를 소재로 하거나 이를 떠낸 여타의 다른 작업들과는 구별되게 해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모델의 맨몸은 그대로 세계의 맨살에 해당하며,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단순한 몸의 경계를 넘어 세계 자체의 맨살과 직면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경계의 끝에서 맞닥트린 세계의 맨살이, 인체에 대한 인문학적 베일을 걷어내고 본 모델의 맨몸이 소름끼치게 하고 당혹스럽게 하고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김일용은 자기 정체성을 몸에서 찾는다. 이는 정신이나 이성으로부터 정체성을 발견한 모더니즘적 인간과는 비교된다.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적 인간은 사유능력을 인간의 존재성과 동격으로 본 데카르트에 의해 뒷받침되며, 이는 총체적인 전제로서의 나와,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나의 인식으로써 현상한다. 반면에 후기 모더니즘적 인간은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파편화된 것으로 보며, 또한 이를 인식하는 주체 역시 파편화돼 있다고 본다.

이러한 후기 근대적 자의식은 김일용의 작업 가운데 특히 ‘체적’ 연작으로 범주화할 만한 일련의 경향성들, 즉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을 임의적으로 해체하고 분절하는, 조합하고 재구조화하는 사례들에서 극명해진다. 이질적인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을 자의적으로 결합하기도 하고, 특히 입체의 몸을 부분 이미지들로 조각낸 연후에 이를 마치 평면처럼 펼쳐 보이는 것에서 입체파의 조각적 버전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이러한 신체의 입체파적 재구성에서 더 나아가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선입견마저 넘어서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에 의해 제시된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을 그대로 입체의 형태로 재구성했을 때 완전한 신체가 복원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부분 이미지는 다만 그 자체 자족적인 이미지일 뿐이며, 이를 재구성한다고 해서 완전한 전체가 복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체를 구성하는 제반 요소들을 다 합쳐 놓는다고 해서 하나의 온전한 개체로서의 주체가 복원되지는 않는다. 이로써 작가의 조각은 전체와 부분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경계를 넘어서고 있으며, 주체를 재현하거나 복원할 수 있다는 믿음과 신념의 불가능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처럼 김일용의 작업에서의 부분 이미지의 집합은 전체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한 사실성이나 즉물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은 다만 신체를 닮아 있을 뿐 신체 자체일 수는 없다. 이를 작가는 ‘유사신체’라 명명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인식은 작가로 하여금 신체를 자의적으로 변형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함몰된 가슴이나 종잇장처럼 구겨진 신체, 그리고 부분 이미지들로 마구 절단된 신체의 편린들이 금기의 경계를 넘어 불경의 경지를 넘보게 하며, 에로스의 표면 위로 타나토스를 불러내며,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하나로 들러붙어있는 실재계와 직면케 한다. 그런가하면 젖가슴만을 따로 집적시켜 일종의 유전자나 염색체, DNA의 나선형 구조의 형태로 재구성해 놓은 작업에서의 젖가슴이 생명의 최소단위로서의 세포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산실(産室)을 소재로 한 작가의 전작과도 통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 작가의 작업이 정박해 있는 또 다른 개념의 한 지점을 말해준다. 즉 작가가 몸을 소재로 다루는 이유가 다름 아닌 생명사상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는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는 방법으로써 일련의 초상화 연작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아르침볼도의 초현실적 초상화를 연상시키며, 이로부터 그로테스크한 일면과 함께 신체의 희화화가 감지된다. 그리고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로써 일종의 집의 형태를 재구성한 작업에서는 신체를 집에다가 비유한 상징의 한 전형을 떠올리게 하며, 이로부터 몸이 여전히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와 관련한 존재론적 물음이 읽힌다.

애초엔 몸 그 자체에 집중하던 것에서 점차 몸을 분절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에로 변화해온 김일용의 작업은 이질적인 부분들의 무분별한 집합으로 구조화된 몸을 매개로 해서, 정형화된 언어로 환원될 수는 없는 존재의 다면성을 드러낸다. 파편화된 몸을 통해 상처투성이의 존재를 드러내고, 불완전한 신체를 빌려 부조리한 인간 실존을 증언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체의 재현 불가능성을 주지시킨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탈)주체론 혹은 (탈)존재론으로 부를 만한 어떤 경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