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욱 전 6.20--6.30 | 노화랑
유현미 전 6.27--7.11 | 갤러리 인
Mioon 전 7.19--7.25 | 창동스튜디오 전시실







비슷한 시기에 꼬리를 물듯 열린 세 전시는 각기 회화(이강욱), 사진(유현미), 영상설치(뮌)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지만, 각자의 방식을 통해 ‘보는 것/보여지는 것’에 대한 미술의 자기 성찰을 고도의 형식적 완결성으로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전시는 굳이 미술이 시각에 관련된 예술 장르라서가 아니라, 시각성이 현대인의 의사소통에서 가지는 압도적인 보편성, 즉 시각의 헤게모니라는 현상에 대해 미술이 개입할 수 있는 주요 지점들을 드러낸다. 이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표상과 관련되며, 이 표상은 기나긴 회화의 역사 뿐 아니라 사진이나 영상같은 비교적 최근의 기술과도 결부된다. 이러한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시선의 그물망들이 현대 미술가들에 의해 다시 짜여지면서 만들어지는 심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그리고 내밀하면서도 문명비판적인 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현미는 정교한 정물화같은 사진작업을 통해 ‘차원의 경계’(전시부제)를 넘나든다. 벽, 창문, 모서리, 계단 등이 있는 작업실에 세트처럼 놓여진 사물들에 그림처럼 색을 입히고, 사진을 찍은 작품으로, 여기서 ‘차원의 경계’란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숨바꼭질같은 게임을 말한다. 육지와 바다, 국경 등 모든 경계가 사라진 지구의가 텅 빈 탁자 위에 놓여있는 작품 ‘still life(지구)’는 시각적 트릭을 가능하게한 적극적인 조정 작업을 대변하는 듯하다. 작업실의 한 모퉁이는 오브제와 색을 바꾸면서 서로 다른 정물화를 생산한다. 여러 작품을 만들기 위해 벽에 겹겹이 칠했을 두터운 색은 북유럽 정물의 대가들의 작품을 연상케하는 고전적인 구도와 상징적인 사물들에도 칠해진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이 작은 그림으로 축소된 채 장면에 끼워넣어지고, 그 작품이 놓여진 맥락을 다시 동어반복적으로 연출한 무대는 그림 속의 그림에 해당된다. 가령 계단 그림이 걸려있는, 색이 칠해진 실제 계단의 사진이 그것이다. 자명한 듯 존재하는 실체는 잡히지 않고 그 뒤로 자꾸 물러날 뿐이다.

붓질이 드러나는 두터운 벽은 그앞에 놓여지곤 하는 회화작품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림같은 사진을 연출하기 위해 3차원 상에서 가한 인공적인 조작들이 완전히 숨겨지지는 않는다. 왠지 이상한 빛과 그림자의 방향, 그리고 사물의 명암은 정지된 장면들을 기이하게 만든다. 수수께끼같은 빛이 떨어지는 실내를 연출한 작품 ‘still life(25시 01분)’는 아예 25시라는 비현실적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가 등장하기도 한다. 사실처럼 보이기 위해 원근, 색상, 명암 등이 작가에 의해 치밀하게 재배치되지만, 결과물은 사실주의라기보다는 초현실주의이다. 데카르트 이래 가시적인 것이란 ‘사유의 명료함에 기반한 모델’(메를로 퐁티)이었으며, 감각 및 환영과는 단절된 정신과 이성의 아성으로 구축되어왔다. 근대에 확립된 확실성과 명료함은 신체적 감각으로 단절된 눈, 즉 기하학적 합리주의의 산물이다. 재현은 도식과 체계의 결과물이며 이를통해 대상과 주체의 동일성이 규정됨으로서, 가시적인 것은 일정한 틀에 길들여졌던 것이다. 세계가 구성되고 인지되는 방식인 재현은 역사성을 가진다.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원근법은 카메라의 전신이다. 로버트 로마니신은 카메라는 하나의 작은 방이고 렌즈는 빛이 미치는 범위만큼 세상으로 새어나가는 특별한 창문이라고 지적한다. 캔버스는 창문으로 상상되지만, 그것은 방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특히 빛이 미치는 범위만큼 세계를 받아들이는 부분이다. 빛이 미치는 범위로 변형된 세계는 사적인 주관성의 방으로 점차 멀리 후퇴하는 주체의 대응물이 된다. 이 창문을 통해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세계와의 접촉을 상실한다. 차원의 경계를 흐리기 위한 유현미의 인공적인 장치와 눈속임은 표상의 질서에 내재한 한계를 드러내면서 진행된다. 그러나 회화와 조각을 담은 최종적인 장치인 사진이라는 양식은 지각이 지니는 경험적이고 인간적인 특징을 삭제하면서, ‘시각의 무의식’(벤야민)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가장 명료하다고 간주되어온 가시성의 질서와 지각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부각시키고 있다.



Mioon(김민, 최문)의 ‘the visible city에서는 시각의 변증법이 전개된다. 벽면 가득히 펼쳐지는 도시의 야경은 보는이의 계급적 상황에 따라 지옥으로도 천국으로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욱한 안개가 피어나며 도시가 만들어내는 소음까지 곁들여진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옆에 설치된 영상의 원본 속으로 진입하면 야경이 크고작은 상품 포장상자들이 겹겹이 붙여지고 배열된 산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가상도시 속 감시 카메라에 잡힌 관객은 킹콩같이 거대한 모습이다. 그 거대한 그림자처럼 생겼을 소비자의 욕망이 도시를 괴물처럼 증식시킨다. 이 도시는 구매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정보로 가득 채워진 곳이며, 이 메시지는 스펙타클에 의해 전해진다. 이 전시는 국제 교환입주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같은 기간 propose 7 전(금호미술관)에서 실물이 공개되고, 창동미술 스튜디오에서는 관련 도큐멘트가 전시되었다. 작가들에게는 그럴싸한 환영보다는 환영과 현실의 대비가 중요했고, 그 환영을 추동했던 과정들을 낱낱이 밝힘으로서, 미술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보여질 또다른 환상에의 매몰을 경계한다.

도시는 상품자본주의의 신전과 같은 곳이다. 벤야민은 원형적 쇼핑몰이라고 할 19세기의 파리 아케이드를 거닐면서 자본주의 진면목을 관찰한 바 있다. 하늘 높은줄 모르는 건물과 조명으로 어둠을 극복한 도시는 천상의 도시처럼 풍요로운 미래를 선전하지만 그 뒤편에 과도한 노동과 욕망에 의해 지친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이 존재한다. 그곳이 억압적인 이유는 풍요의 꿈이 소비라는 유일한 통로로만 흘러갈 수 밖에 없다는데 있다. 간판처럼 상품이름이 드러나 있는 뮌의 포장지 건축물은 대중이 숭배하는 화려한 물신의 실체들이다. 아스라한 어둠이 지배하는 인공낙원은 시각적인 물신들이 출몰하기에 적당한 생태계를 이룬다. 쌓여서 건물을 이루는 상품들은 벤야민이 지적하듯 그 안으로 ‘역사의 모든 힘들과 관심들이 축소된 규모로 들어가는 단자론적 구조’를 가졌다. 여기에서 관객은 스펙타클의 주술에 현혹되기 보다는 그것을 총체적 사건의 결정체로 해독해야할 과제를 부여받는다. 계몽은 신화를 극복했지만 다시금 현대사회는 물신에 의해 주술화되었고, 이를 깨려면 역사로 복귀해야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뮌의 작품에 나타난 바와 같은 시각의 변증법인 것이다.

이강욱은 반대로 ‘invisible space를 그린다. 유현미나 뮌의 작품처럼 보여지는 것, 가령 사진적 정보같은 것이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한 얼룩으로 말소된 채 새로운 차원의 것들이 중첩된다. 세포, 우주, 꽃, 과일 등이 단면 또는 평면으로 확대된 디지털 프린트 위에 반투명한 코팅을 여러번하고, 그 위에 드로잉을 하고 작은 유리구슬을 도포하는 과정을 거친다. 겹겹이 중첩된 층으로 말소되긴 하였으나 밑바탕의 이미지는 그 위에 얹혀진 또다른 차원의 이미지들과 어우러져 또다른 세계를 만든다. 이강욱의 작품에서는 모세혈관같은 미시세계나 은하수같은 거시세계, 식물과 같은 자연의 세계가 동일한 차원으로 배열된다. 화면에 시각적 포인트를 주는 둥근 원과 그 주변에 엉켜 흐르고 있는 수많은 선들, 그리고 차이를 내포한 반복적 선들이 실타래같이 엉킨 형태들이 바탕의 1차적 지시대상을 교란시킨다. 선은 재차 평평해지는 표면에서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원근법의 선조적, 단선적 인식을 끊어낸다. 그 위에 얹혀진 작은 구슬들은 저마다의 소우주를 이루면서도 한 화면에 압축된 다차원의 세계를 예시하고 있다. 작가는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유희를 반복하면서 물신화된 시각중심주의를 에둘러간다.

이강욱은 이를 통해 시각적 명료함과 의미의 투명성에 대한 합리주의적 가정을 부정하고, ‘비가시성을 가시성과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로 격상’(메를로 퐁티)시킨다. 그것은 근대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것과 동일시 해온 주관/객관 구조인 시각성 일반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강욱의 작품에 존재하는 이미지와 빛은 그 명료함을 잃고 그늘과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 흔적들은 보이지 않지만 보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시선을 또다른 차원으로 개방한다. 그의 작품은 본다는 행위에 내재된 명료함과는 달리 다소간 은폐적인데, 이러한 은폐는 현상이나 구조로의 고착이 아닌 끝없는 생성과 소멸, 즉 변모를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서로 구별되는 차원간의 매개를 통해 경계넘기가 시도된다. 경계넘기는 이전 세계의 통일성을 파악면서 새로운 관계짓기를 가능하게 한다. 마주침과 겹침의 세계, 이 유동성의 세계에서 시선의 산물인 실체나 체계 중심주의는 사라진다. 스스로 형성하는 ‘살아있는 구조로서의 세계’(롬바흐)에서 존재론적 경계선 긋기는 퇴색한다. 존재의 확고한 동일성으로 귀착되곤 하는 가시성은 한 세계에서 또다른 세계로 도약하는 근본적인 경험으로 변모한다.

출전 | 아트 인 컬처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