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시제로서의 역사와 역사적 현실
독일은 전통적으로 표현주의적 경향성이 강하다. 오죽하면 독일표현주의란 말이 그 자체 하나의 독립된 명사처럼 여겨지겠는가. 독일표현주의의 이러한 전통은 중세 고딕에서부터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표현주의에로, 즉물주의와 신즉물주의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신표현주의에로 면면히 그 특정성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사실 표현주의는 주정주의의 한 전형으로서, 세계를 자기 내부로 불러들여 이를 재차 뱉어낸 것이다. 주관적인 감정이나 기분 여하에 따라서 세계는 그 객관적인 지평을 잃어버리고, 그 전망이 한갓 개인적인 전망으로 축소되고 밀착된다. 잿빛의 하늘은 우울한 마음과 겹치고, 고즈넉한 호수는 그 깊이를 헤아릴 길 없는 심연 위에 포개진다. 적막감이 감도는 숲은 상실한 유년기의 비의가 숨겨져 있으며, 수평선은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신과 동격인 것으로 드러난다. 하늘, 나무, 바람, 공기 등이 생생하게 살아서 육박해온다. 그 생생한 세계로부터의 파장이 주체를 건드리고, 울고 웃게 하고, 광기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렇듯 세계와 주체는 밀착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세계의 전망이나 세계 자체를 투명하게 반영하고 드러낸다. 그에게 세계는 인식이나 해석의 대상이기보다는, 몸으로 부닥쳐 겪는 느낌과 감각의 대상으로써 존재하고 경험된다.
한편, 신표현주의 작가들은 2차 세계대전의 피폐해진 시대상황으로부터 그 자양분을 흡수했던 만큼 전후 독일의 시대정신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즉 전후 독일의 재건의식과 중세 독일의 영화를 회복하려는 기획(이는 주로 중세 독일의 신화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이성과 함께 전형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의심, 그리고 여기에다 통독(統獨) 이후의 어수선한 시대상황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과 심지어는 신나치즘으로의 회귀 같은 온갖 이질적인 의식의 자장들이 난맥상을 이루며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신표현주의 작가들은 바로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태동되었으며, 이들 중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형상을, 특히 인체를 거꾸로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체를 바로 그린 연후에 화면을 뒤집어 놓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꾸로 그린다. 이 그림들은 전형적인 재현의 문법을 벗어나 있으며, 전형적인 형식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어눌한가하면 거침없어 보이는 그림들이 마치 날것 상태 그대로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 같고, 미처 인식이나 손재주의 관성이 미치지 못하는 형상의 원형을 드러내는 것 같다.
세계의 붕괴 즉 세계의 밑바닥이 내려앉은 것을 경험하고 이를 글로 옮긴 R. N. 마이어나 카프카 같은 문학가들처럼 바젤리츠 역시 세계가 온통 뒤집어졌음을 경험하고 이를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다. 미친 세상, 뒤집혀진 세상을 바로 보는 유일한 방법은 이를 거꾸로 보는 수밖에 없다. 이 혼돈의 시대에 이성을 올바르게 정초하는 방법은 거꾸로 보기, 거꾸로 생각하기, 거꾸로 먹기, 거꾸로 싸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젤리츠가 세계를 보고, 세계를 불러들이고, 세계를 뱉어내는 반응이고 방법이다.
이 전시는 바젤리츠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4년여에 걸쳐서 <러시안 페인팅>이란 특정의 주제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주제화로만 구성되었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도 여전히 모티브를 거꾸로 그려 몰락한 이성과 뒤집혀진 세상을 풍자하는 식의 역설적인 화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와 함께 차용과 인용을 통해 기왕의 역사화와 주제화를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니까 작가는 구소련 시절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에 입각해서 그려진 일련의 역사화와 주제화 그리고 당시 제작된 일련의 사진을 차용해서, 이를 자기 식으로 각색하고 재해석한다. 예컨대 A. M. 게라시모프의 1929년 작품 <연단 위의 레닌>이나 블라디미르 A. 세로프의 1950년 작품 <레닌을 만나는 농민 청원자들>, 그리고 코르제프가 1953년에 그린 <전쟁의 나날들> 같은 작품을 패러디하면서, 이를 자기화한 것이다. 주로 역사화를 차용하고 있지만, 이외에도 당시 생활사를 엿보게 해주는 장르화도 폭넓게 차용하고 있다.
인용의 이러한 배경에는 동독출신이었던 바젤리츠 자신의 개인사가 깔려있다. 그림 속에 묘사되고 있는 정경들이 그 자체 작가에게 뜬금없거나 의외의 상황이 아니라 그 자신이 속해 있었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그림들을 불러내고 인용하고 재해석할 필요성을 느꼈는가. 당시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재해석 행위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더욱이 사회주의 국가체제가 붕괴되고 없는 현실에서 이 일련의 그림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작가의 의식이 정초해 있는 지점은 무엇일까. 이제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없는 체제, 그 자체가 공상이 돼버린 체제를 되불러오고 새삼 이와 마주함으로써 역사란, 그 역사적 현실이란 결코 완전히 지워지거나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는 다만 외관상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일 뿐, 실은 그 시대의 터널을 지나쳐온 개인의 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그의 인격을 만들고 그의 정체성을 만드는 법이다.
바젤리츠는 이 일련의 <러시안 페인팅>을 통해 자신의 개인사를 추억하고, 뒤집혀진 그림을 통해 미친 세상을 추억한다. 역사화에 대한 인용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개인사를 복원하려는 이 기획은 그러나 역사에도, 작가 자신에도 속하지 않는 이질적인 어떤 지점을 드러내며, 역사적 현실에 대한 해석행위의 불완전성을 증언해줄 뿐이다. 그러면서도 뒤집어진 그림이 사실은 바로 서 있는 세상을 겨냥한 반어법적 표현이듯이, 이제는 과거지사가 된 현실이기에 그 역사는 오히려 더 생생하게 다가오고 더 집요하게 살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