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 미술평론가
최해리의 최근 작품들은 평행하게 분리된 인조견들 위에 그려진 이미지들이 벽면의 조명에 의해 종합되는 설치 작품이다. 동굴처럼 어둑한 전시장에서 유일한 광원이 되는 뒷조명은 화면에 등장하는 동식물들이 내딛는 가상의 지면을 탈각시키고, 잔잔한 물결 위에 떠있는 것같은 몽환적인 장면으로 전환시킨다. 작품 [움직이는 영토]는 화면 좌측 상단부에서 몰려오는 모래 폭풍과 폭풍에 쫒겨 날아오르는 새들, 뿌리 뽑힌 나무들과 그 위에 걸쳐있는 조서(弔書), 잘 미용된 애완견들, 비둘기, 사슴 등이 뜬금없이 배치된다. 각각의 평면에 그려진 장면들이 겹쳐진 채 조합된 화면 속 동물들 간에는 심리적, 물리적 거리감이 있다. 그들은 시선이나 행동을 교환하지 않는다. 식물들 역시 대지에 힘차게 뿌리내리지 못한다. 작가는 이렇듯 맥락이 부재한 장면들을 ‘불편한 시선들로 뒤섞인 풍경’이라고 말한다.
도시인들이 자연을 접할 수 있는 흔한 장소가 동식물원이나 공원이다. 최해리는 동물원이나 집 근처의 묘지 공원에서 작품의 소재를 채집한다. 그곳은 이미 이식된 인공적인 자연으로, 애써 원초적인 자연을 흉내내고 짜맞추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불완전한 연극 무대같은 느낌을 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러겹의 무대 배경같은 막위에 등장하는 것은 동물들이나 건물들 사이의 자투리 정원이나 분재들로, 이들은 서로 엮여서 일련의 이야기를 만들지만, 나름의 결론을 만드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전, 또는 사건 이후의 증후나 흔적같은 이미지이다. 최해리의 작품은 여러 판이 공시적으로 교차되어 만들어진 몽타주이기 때문에, 명확한 전개와 결말을 가지는 이야기처럼 선적 구조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정서적인 울림으로 남는다.

채집된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상황으로 연출하는 몽타주 기법은 우리나라 농촌 풍경과 정글의 동물들이 결합된 사진 작업에서도 나타난다. 서로 다른 시공간이 조합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초현실성 외에, 작가는 ‘미시적인 힘들이 응축되어 정형화되지 않은 형태로 나타나는 연기, 구름, 먼지나 폭풍, 또는 물, 그림자와 같은 표현들’을 삽입했다고 말한다. 오려진 이미지들의 명료한 외곽선과 대조되는 흐릿한 분위기는 대홍수나 폭풍같은 거대한 자연재해나 신비로운 초자연성을 나타낸다. 인간을 기준으로 멋대로 자연을 재단하고 분류함으로서 야기된 자연과의 단절은, 공포와 매혹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숭고sublime의 블랙홀로 빠져든다. 공원이나 동물원으로 상징되는 이식된 자연은 타자를 인간 본위로 분류하고 배열하면서 길들이는 방식이다. 작가는 동일성의 논리가 관철되는 그곳에서, 제자리에 선 채로 여행하는 탈주를 감행한다.
안전과 부자유를 동시에 상징하는 지금 여기의 쇠우리 속 그들은 탁트인 저곳, ‘움직이는 영토’에 배치된다. 최해리의 작업 자체가 산책이나 여행 등 이동에 대한 일상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탈주의 시도는 형식적인 장치가 보완되지 않았다면 성공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최해리는 동양화에 이미 있는 재료나 기법들을 새롭게 변용한다. 견이라는 재료나 다시점이라는 방식은 동양화에 있는 것이지만, 투명한 재료인 인조견으로 층위를 만들어 여러 시점을 각각의 프레임에 담아 종합하고, 여기에 전기 에너지를 투여한 설치의 개념으로 풀어낸다. 틀 뒷면의 조명도 태양이나 석양같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반투명한 얇은 인조견 외에 검은 색, 붉은 색 등 색이 있는 인조견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짙은 바탕에서는 밝게, 흰바탕에서는 어둡게 이미지를 처리한다.
보통 2-4개의 층위로 이루어지는 화면은 앞면과 뒷면이 모두 활용되고, 여러개로 증식되면서 결론이 없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최해리는 이미지가 고착되는 하나의 평면을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종합하는 하나의 시점도 마찬가지이다. 작업 모티브가 되었던 동물원이나 도심의 자투리 녹지대, 무덤 등이 한눈에 타자를 분류하고 배열하고 지배하는 동일자의 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학적 사고가 만들어진 때는 이성과 계몽의 시대였다.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에 의하면, 계몽주의 시대에 연구와 탐사를 위한 대여행에 의해 동식물에 대한 기록, 그림, 견본들이 유입되었다. 자연 전체는 그자체가 아니라, 박물학에 의해 구성된 지식의 그물망을 통해서 조명되었다. 박물학이란 가시적인 것을 명명하는 작업으로, 지구의 표층을 뒤덮고 있는 존재들은 수학적 질서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다.
최해리의 작업은 박물학적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명료한 가시성의 분류 공간을 다시 흩어뜨리는 것과 관련된다. 이성에 의해 성립된 가시성의 장은 억압적으로 느껴진다. 이 가시성의 장에서 자연은 분절화되고 불확실한 것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본 것을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가시성의 장은 한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동일한 그물망을 사용하도록 한다. 박물학이 가지는 이러한 표상적 구조는 마찬가지로 자연과 세계를 다루는 미술에서도 관철된다. [말과 사물]에 의하면 박물학은 단순히 호기심이 있는 새로운 대상의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표상의 총체에 항구적인 질서의 가능성을 도입하려는 일련의 복잡한 조작들을 내포한다. 박물학은 경험의 한 영역 전체를 기술가능한 동시에 질서화가능한 것으로 성립시켰을 뿐, 생명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이러한 환원주의에 대항하여, 예술가들은 한 시대의 이성에 의해 확정된 공간을 혼란시키는, 새로 배열된 지형을 출현시키고자 하였다.

최해리의 작업은 자연이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기호들로 짜여진 복잡하고 광할한 하나의 그물조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의 그물망은 연속적이지 않다. 거기에서 개체와 개체, 공간과 공간 사이는 연속성이 아니라 비약이 존재한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을 촘촘하게 일렬로 줄세우는 진화론적 사고방식에 대한 거부이다. 푸코는 진화론이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로의 출현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연속성의 원리를 일반화하고 모든 존재가 매끄러운 연속면을 형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법칙을 일반화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진화론적 연속성을 보증해 주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기획이었다. 기묘한 풍요로움으로 분산되고 있는 최해리의 작품 속 자연은 직선적인 운동의 법칙에 세계 전체를 끼워맞추는 이성의 기획을 직관에 의한 채집과 파격적인 조합으로 해체시킨다. 여러개의 틀은 자연이 하나의 틀 속에 끼워맞출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중첩되는 면들은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생명의 복잡다단한 운동을 예시한다.
최해리의 작품에서 인간의 편의에 의해 설정될 뿐인 동일성과 존재의 범주는 문제시된다. 그녀는 자연의 타자성에 주목한다. 타자로서의 자연은 불안하면서도 신비한 방식으로 생성, 소멸한다. 연결망들이 느슨한 개체들의 배치는 각자가 가지는 고유성과 고유성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세계의 다수성을 예시한다. 여럿으로 해체된 평면 속에서 부유하는 개체들은 허울뿐인 공동체나 투명한 소통을 지향하지 않는다. 작품속 개체들은 각자의 고유성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그들은 자신을 외부가 아닌 자신으로부터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닫혀있다. 다양한 세계들의 마주침을 통한 생성을 주장하는 철학자 롬바흐는 살아있는 자연의 모든 매력과 생동성은 닫혀있음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예술작품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근거나 의미를 자신 안에 가진다. 공통의 지반이 없이 떠있는 개체들이 외부로부터의 지지없이 자신을 지탱하는 작품 속 개체들은, 이성의 시대로부터 발판을 마련해온 물질 문명의 판에 미세한 균열을 내면서, 만물의 진정한 공존을 위한 기적적인 입지를 마련하고 있다.
출전 | 2007 인사미술공간 신진작가 수첩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