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박영택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였고 전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로 많은 작가들을 발굴하였다. 현재 경기대학교 미술경영학과 교수로,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미술전시장 가는 날」 등이 있다.
최근 미술계는 여러모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토록 미술이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적은 없었던 듯하다. 미술대전을 둘러싼 추문이 터져 나왔고 미술시장이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 돈과 자본이라는 괴물이 미술을 지배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래서 미술시장과 미술과 돈에 관한 기사가 흘러넘쳤다. 미술시장에서 팔리는 것이 유일한 척도가 되고 기준이 되고 좋은 작가의 잣대가 되고 있다. 그 정도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화랑 역시 양극화 되고 있다. 이른바 ‘블루칩’ 작가 몇 명만 있으면 된다. 그런 작가를 가진 대형 화랑만 살고 나머지는 죽는다. 자본과 네트워크와 소수 인기작가를 독점하는 화랑은 떼돈을 벌게 되어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아티스트와 아티스트적 삶은 부재하고 다만 미술과 미술가와 미술제도와 시장만이 존재한다. 작가들은 전시장에서 전시하지 않고 여러 아트페어를 떠돌며 파는데 열중하고 있다. 알다시피 아트페어는 시장경제의 원칙이 강력히 작동하는 곳이자 작품의 질보다는 상업적 목적과 이윤이 우선하는 곳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아트페어나 옥션에서 좀 팔렸다는 작가들이 이내 스타작가가 되고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업들이 모두 아방가르드작업이나 중요한 현대미술인 것처럼 논의되거나 인정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질적인 재료를 장인처럼 다루거나 눈알이 빠질 정도로 극한 묘사에 몸을 맡기거나 스펙타클한 볼거리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들이 대부분이 작업이 되고 있다. 미술에 대한 풍성하고 진지한 사유와 담론, 비평과 작품의 질에 대한 고민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작품의 판매수치와 자본의 회전이 절대적인 척도가 되고 모든 미술행위가 시장에서, 시장 논리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척이나 황폐하고 삭막한 풍경일 것이다. 작가들은 결국 돈이 되는 미술을 해야 하고 화랑은 돈이 될 만한 작가. 작품만을 다루고 이 같은 미술시장의 논리는 이제 미술의 모든 핵심이 되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결국, 돈과 권력이 미술계의 화두가 되었다. 작업의 척도가 돈이 되고 시장이 되었음을 크게 탓할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이거나 유일한 잣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미술계란 다름 아니라 미술과 관련된 일이 논의되고 그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고 일을 둘러싼 가치와 질의 논의가 통용되고 인정되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부재하고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욕망들만이 너무 뜨겁고 노골적으로 얽혀있는 곳이 되었다. 다들 먹고 살자고 일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대로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일’은 시늉이고 알리바이에 머물고 있고 결국은 돈과 명예가 최종의 목적이 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알다시피 미술이란 사실 정답이 없는 부분이라 사기와 가짜가 판칠 수 있는 희한한 영역이다. 그러나 미술이란 사물과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놀라운 눈과 감각,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과정이며 이를 판독하며 이해하는 취향과 안목의 투쟁이다. 그런 질적인 측면들에 대한 엄정한 위계와 그 위계에 대한 존중과 인정은 부재하고 상업적인 척도와 특정한 자리, 권력의 자리가 곧바로 가치와 질로 연결된다고 믿는 이 후진적 발상이 결국 모든 문제의 핵심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근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은 극사실주의와 팝아트의 변종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미 지나간 양식들이 전면적으로 부상하고 있음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이질적이다. 고도의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번성, 영상이미지의 번창 속에서 파생된 대중들의 미적 감수성과 맞물린 부분도 있을 것이고 보수적 미술시장의 유혹과 관련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요 몇 년간 팝이란 제목을 단 전시들이 줄을 이었다. 거기다 팝아트의 대부인 앤디 워홀의 전시가 얼마 전 성황리에 끝났다. 젊은 이들로 붐빈 전시장 풍경은 마치 쇼핑몰을 거닐고 클럽에 모여든 남녀들의 몸놀림과 오버랩되었다. 이들은 귀엽고 이쁘고 감각적인 것들을 전적으로 갈망한다. 미술은 통해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이제 미술은 그들의 욕망을 보상하는 선에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키치적이고 팬시한 감성, 장식적이고 달콤하며 관능적인 미감이 물씬 거리는 이 통속적인 미적 감수성의 근원이 새삼 팝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를 후기 팝 혹은 네오팝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충무갤러리기 기획했던 ‘현대 대중문화의 우상-Pop& Popular전’(3.9-4.19)이 뒤를 이어 영은미술관이 마련한 ‘PoP & CoN Mix (7.6-9.22)전은 국내 젊은 작가들이 팝적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시였고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누보팝’ 전(7.12-9.30)에는 이태리와 프랑스, 스페인과 스웨덴, 벨기에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중국 등 7개국의 10명의 외국 작가가 참여한 전시다. ‘누보팝’ 전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서 조금씩 다른 조형적 언어로 팝을 이야기 한다. 알다시피 1960년대 중엽 워홀은 대중매체적인 시각문화의 기술을 미술에 적극 접목했다. 기존 미술의 폐쇄된 서술방식을 일상생활의 흐름으로 바꾸어놓았고 사물과 지각의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다름아닌 시뮬라크르에 있음을 최초로 지각한 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워홀 이후의 팝아트, 미국식 소비주의를 찬양하는 팝이 아닌 비판적인 팝을 모색한다. 이 새로운 팝아트의 저변에는 “인간적인 나레이션이 깔려있고 각자의 경험을 때로는 예민하게, 때로는 통속적으로, 때로는 풍자적이되 인간적인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에서 미국 팝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기획자는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흥미롭지만 반면 명확히 초기 팝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다소 의아스럽다. 워홀의 진정한 정신이 단지 감각적인 표피이미지로 차용되고 지나간 팝에 기생하고 패러디해서 연장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본주의사회와 미술이 더 이상 새로움을 추구하지 못하고 그저 ‘동일자의 무한증식’상태에 빠져들었음을 간파하고 유일물을 생산하는 장인적 생산의 영역으로 남은 미술과 예술가라는 주체의 자리, 그 아우라를 기꺼이 지워버린 존재가 바로 워홀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팝의 정신과 포스트모던의 담론 역시 증발되었다. 그런데 새삼 다시 팝이 논의되고 부활한다. 디지털 기술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이미지가 활개 치는 시대에 대중과 미디어와 결합되어 있는 그 이미지들의 삶도 결국 팝이라고 부를 수 있기에 그럴까? 그러나 나로서는 시장논리와 출구없는 미술계가 새삼 팝에 기생하며 감각적 이미지를 소모하는 형국이 오늘의 미술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최근 팝아트를 표방한 대다수 전시에 해당할 것이다.
그와 한 쌍으로 극사실주의 그림 역시 여전히 성행중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재현회화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와 다양한 해석과 접근, 그리고 환영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들이 젊은 작가들에 의해 부풀어 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는 회화에만 머물지 않고 입체 및 타장르와 연계되어 진행된다. 일종의 눈속임과 관련된 조형행위는 회화에 머물지 않고 입체와 오브제, 사진을 차용한 작업 등으로 확장되면서 흥미로운 눈속임 전략을 구사하는 작업들이 무수히 많아졌다. 기존의 습관화된 미술의 외연을 전복시키거나 확장시키기 위한 새로운 이미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이 사실적인 재현을 통한 환영적 효과를 주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 사실적인 재현기법은 감상자의 미술에 대한 기존 관념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조절하고 반전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무엇보다도 미술의 위기와 해체에 맞서 이를 근원에서부터 사유하고 모색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재현술과 환영주의가 이전의 모더니즘미술관 아래 억압되고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이해되어온 회화를 다시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저간에는 현재 미술시장의 다소 저급한 상업주의 및 작가들이 당대 미술에 대한 고민 대신에 간편하게 그리기, 묘사력에 치중하면서 손쉬운 선택을 하고 있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나 현재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문제시하는 입장에서 환영주의, 눈속임 미술이 흥미로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과 회화는 서로 기존의 방식이나 결과물과는 또 다른 감각과 시각적 힘에 눈뜨고 그것을 선취해 나가고 있다. 이미 각 장르가 은연중 무화되고 사라져 버리는 어떤 경계 혹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를 껴안는 모순적인 영역으로 사라져버리는 것도 같다. 사진과 회화가 서로 조응하고 겹쳐지고 차용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감각의 힘들이 발아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사진적 질감, 시점이 회화를 통해 구현되고 역으로 회화적 구성과 연출이 사진 아래 조율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다른 장르 간에도 동일하게 진행된다. 새삼 눈속임 미술 혹은 극사실적 이미지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하이퍼 리얼리즘의 안과 밖’ 전(갤러리 LM, 6.5-6.15)과 ‘Real Image: Made in Korea’ 전(인사아트센터, 6.6-6.12)등이 그 대표적인 최근 전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작업들이 미술시장에 너무 온순히 길들여졌고 사회와 현실 등과는 거리를 둔 체 개인적인 영역으로 파고들고 있는데 따라서 작업의 경향이 대부분 자폐적인 분위기를 띤다. 사적 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중과 연관된 이 양식은 미술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전망이 부재할 때 우선적으로 자신의 본능적인 그리기의 욕구에서 다시 출발하고자 하는 의도와 만난다. 그리고 무의미한 현재의 시간을 그저 유희하고 집착하고 있을 뿐인 정신적 공황과 권태로움의 상황 또한 반영한다. 그래서 작가와 작품 사이의 경계 지우기, 극사실적 구상작업이나 드로잉이 부쩍 많아졌다. 작가 혼자만의 시간과 공력이 들어간 작업들이 두드러지게 양산되고 있는데 이 극사실주의 구상의 붐과 회화의 복귀에 대한 논의 및 그와 관련된 작품의 등장은 다름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보수성과 상업주의의 따른 반응이기도 하다. 그것은 회화에 관한 풍성한 담론과 비판적 내용과는 다소 무관한 지점에서 얄팍하고 공허한 손의 놀림과 공들임 아래 풀려나온다. 그리고 그런 작품이 시장에서 잘 팔린다. 여전히 시장이 요구하는 그림은 여전히 평면회화이자 손의 노동이 두텁게 축적되어있거나 보기 좋고 감각적인 그림들이다. 화장기와 세련미가 흐르고 어딘지 명품 냄새가 풍기는 그런 그림말이다. 그런 보수적이고 제한된 시장구조에서 작가들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박영택
#3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