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 미술평론가


바닥이 유리로 된 어두운 공간에서, 장갑, 모자, 의자같은 사물들은 벽너머로 끝없이 연결되는 듯한 구멍들과 한데 어우러져 환상적인 무대를 연출한다. 그림 속 사물들은 의인화되어 있으며, 오브제와 영상(애니메이션)이 결합된 3차원 설치물에서는 활물(活物)적인 비전이 더욱 강화된다. 작품 속의 사물들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性)을 가지고 있으며, 아늑하고도 다채로운 환상 속에서 희노애락을 펼친다.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불확실한 환상적 사고방식은 어린이나 원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며, 노이로제 환자와 예술가들도 이 대열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금기]에서 격세유전적인 유물인 이러한 고대적 구조를 간직하는 이들의 공통된 사고로 애니미즘을 지목한 바 있다.

애니미즘은 무생물로 보이는 자연물을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정미영의 작품에서는 의자로 전치된 자아를 둘러싼 호의적이거나 악의적인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 그곳에서는 주술적 사고가 횡행한다. 작가는 여기에 기술적인 장치를 보태어, 보다 완벽한 마술의 세계를 펼치고자 한다. 사치스러운 장갑, 야한 뾰족구두, 고상한 중절모, 글자나 꽃무늬가 새겨진 의자 등은 그것을 소유했음직한 이와의 인접성과 유사성을 가지면서 모종의 내러티브를 만들고, 관객의 연상 작용을 촉발시킨다. 이 세계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상상의 힘에 의해 사물들이 움직여진다. 상상은 무의식과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 상상의 세계 속에서 성의 힘은 더욱 강력하고 직접적이다.

그것은 ‘애니미즘 체계의 기초를 이루는 독특한 이원론’(프로이트)라 할 것인데, 이 근원적 이원성은 정미영의 작품에서 화려함과 중후함, 부드러움과 딱딱함 등의 대조로 나타난다. 상상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에 비해 기준점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성적 이분법은 강조되기 마련이다. 정미영의 작품에서 강화된 여성성은 유쾌한 반란을 위한 가장 무도회를 지배한다. 전복적 욕망이 강하게 투사되는 무대는 환상을 넘어 현실적인 힘으로 전화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환상적인 예술작품은 단순히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퇴각이라 볼 수 없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남녀의 권력 관계를 뒤바꾼다. 차이를 차별로 전환시키는 현실원리, 그 금기의 선을 위반하는 것은 여성적 유혹이다.

거대한 모자 위에 올라선 작은 의자, 남성용 보다 더 큰 비중을 가지는 여성용 장갑, 여성의 육체를 가진 의자 위에 장난감처럼 씌워진 황제의 모자, 자못 권위적인 위용을 갖춘 듯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상징계의 흔적들로 덕지덕지 잇대어진 남성의 자리에 비해 강력한 응집성과 아우라를 발산하는 여성의 자리 등이 대비된다. 그러나 정미영의 작품에서의 여성성을 생물학적인 여성이나 특별한 개인, 가령 작가 자신 등으로 환원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모자, 장갑, 의자, 구멍 같이 정미영의 작품에 수년째 등장하는 주요 모티브들은 자연적 실체나 형이상학적 본질이 아니라, 껍질 같은 양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껍질들은 보이지 않는 중심 주변이나 표면을 떠도는 무한한 순환구조에 실려 유동하면서 끝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출전 | 월간미술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