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철전 9.5-9.21 갤러리인
황혜선전 9.12-10.2 이화익갤러리
김창겸전 9.12-10.31 사비나미술관
이선영 | 미술평론가
김창겸의 [거울], 황혜선의 [기억의 창], 홍성철의 [지각의 거울]전은 거울과 창이라는 자못 투명해 보이는 수단을 사용하여 현실과 자아, 그리고 몸이라는 불투명한 실체를 탐색한다. 거울이나 창은 모방과 반영이라는 시각예술의 오랜 주제와 맞물려 왔으며, 재현주의 미학을 벗어난 현대에 와서는 메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2003년 사루비아 다방에서 구식 다방에 대한 문화사적 탐구를 보여주었던 김창겸은 이번 전시에서 그 때 사용한 소재 중의 하나인 거울을 전면에 내세웠다. ‘어떻게 보여져야한다’는 타자의 명령으로 가득한 다방 한켠의 거울이 단독 주제로 나타난다. 그의 방식은 현실의 사물에서 주형을 뜬 틀 거리와 영상을 중첩시키면서, 사진과 비디오로 대변되는 광학적 기계가 생산하는 이미지의 환영적 특징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광학적 기계들이 합성하는 현실이 그럴듯하면 할수록, 그 환영이 깨지는 순간은 더욱 극적이다. 석고나 폴리로 뜬 돌 연못, 어항, 거울, 병 같은 오브제는 3차원 현실에서 촬영한 영상의 스크린이 된다. 영상의 표피로 뒤덮인 기저물질은 3차원적인 사물의 실감 있는 환영을 재구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의 작품에서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것은 광학적 기계들에 의해 편집된 현실로, 관객이 가상현실에 감정 이입되어 몰입되려는 즈음에 여지없이 판이 깨지곤 한다.
현실을 반영했던 잔잔한 수면의 어지러운 파동, 깨지는 거울, 거대한 지우개처럼 지나가면서 모든 환영을 무화시키는 또 다른 환영(그림자)은 거울로 귀결되는 환영적 현실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비디오 설치와 더불어 전시된 디지털 프린트 역시 수석과 분재, 나무인형 등 유사 자연으로 짜깁기된 이미지들이다. 그는 거울의 방으로 상징되는 광학적 장치의 교란적 시각을 즐겨 활용한다. 현존과 부재 사이의 유희가 벌어지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관객은 든든한 바탕이나 지지대가 없는 현실의 심연과 대면하게 된다. 김창겸이 사용하는 비디오라는 매체는 그의 작품에 나오는 수면이나 거울과 마찬가지로, 자기반사적 형식을 가진다. 광학적 기계들은 인간의 사유 모델에 따라 가시적인 것을 구성하는 장치인데, 그것은 인간의 구체적인 지각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은 지각과 모델의 차이를 최소화하려 한다. 인간의 눈은 근대 이후 자신을 잠식해 들어왔던 기계를 닮아 외눈박이가 되려하고, 기계는 인간의 지각에 근접할 만큼 진보를 거듭하였다. 착각하는 관객을 전제하는 김창겸의 작품은 광학이라는 이성적 모델을 따라 발전해온 재현의 관습이 몸의 감각적인 영역을 축소시키고, 대상의 물질성도 추상화 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밖의 현실을 반영하는 창은 그 안쪽에 주체의 자리를 마련한다. 이때 창은 인간 내면의 심리적 현실을 투사하는 거울이 된다. 황혜선의 ‘기억의 창’들은 뿌연 우윳빛으로 외계의 빛을 굴절시키는 반투명 스크린이다. 사각 틀에 끼워진 면이라는 창문의 형식 이외에, 영상작업과 크리스탈 조각이 같이 전시되어 있다. 창유리에 새겨진 것은 작가의 눈을 스쳐갔을 일상의 풍경들이다. 각 작품에는 포인트를 주듯 채색된 사물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유리면에 투사된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드라마틱한 면모를 가지지 않는다. ‘기억의 창’에는 장소, 시점, 스케일의 차이를 무시하고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인상들이 다소 느슨하게 배열되어 있다. 나무틀 안의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려진 드로잉 역시, 시각적 인상이나 기억의 단편들의 병치이다. 영상작품에서, 안경에 비친 풍경들이나 화장품 옆에 세워진 거울 속 도시풍경은, 정지되어 보이는 구조와 움직이는 것 사이의 대조를 보여준다. 소소하게 변화하는 풍경이 비치는 검은 뿔테는 두개의 커다란 창문처럼 보이고, 작은 거울에 비치는 도시의 심각한 교통체증은 그 옆에 놓인 화장품들만큼이나 무덤덤하다. 렌즈나 거울로 투사된 또 다른 창 역시 ‘기억의 창’과 마찬가지로 계층화된 현실이 단편과 우연 속으로 흩어진다.

명확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 텅 빈 기표의 연쇄 고리는 단단한 존재감을 가질법한 일상들을 신기루처럼 만든다. 단순한 스타일로 정리된 통일된 형식만이 부유하는 기표들을 한 평면에 붙잡아 놓을 뿐이다. 여러 장의 유리에 그려진 선을 중첩시킨 이전의 작품이 요즘에는 고 굴절 렌즈처럼 하나의 판으로 압축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정식화된 원근법은 그림이 그려지는 캔버스가 창문으로 상상하는 문화적 관습을 만들었으며, 시각의 중심과 주관적인 눈의 일치를 통해 근대적 자아가 탄생되었다. 이러한 시각적 관습을 통해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눈은 대상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이도 현실의 지표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황혜선의 창은 단일 시점을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단일한 주체도 전제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서랍이나 앨범에서 나온 것들처럼, ‘기억의 창’에 명멸하는 인상과 무의식은 두서가 없다. 쓱쓱 그어진 듯한 가는 선들은 대상의 외관을 쿨하게 재현하지만, 이 창문 안에는 또 다른 수많은 창문들이 공존한다. 눈물 한 방울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작은 눈물방울처럼 말이다. 크리스탈에 에칭한 물방울은 기억의 창이 깨져 만들어진 결정같이 진한 감정의 집약 체를 이룬다. 영상작품은 시간성이 개입되면서 일련의 서사를 낳는다. 제자리걸음하는 구두, 아무리 따라도 같은 레벨을 유지하는 찻잔 등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망으로 점철된 삶과 예술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다.
홍성철의 ‘Perceptual Mirror’는 자신의 몸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나 팽팽하게 당겨진 줄과 LCD 유닛들로 이루어진 거울에 비추어진 몸은 잡으려할 수록 저 멀리 달아나는 듯하다. 스틸 프레임 안에 계층을 이루며 수직으로 배열된 줄에 프린트 된 몸의 일부는 관객을 향해 손짓한다. 연기하는 손들은 거의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잡아당기거나 튕겨보고 싶은 줄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중층적 표면을 이룬다. 수화를 하는 듯, 그림자놀이를 하는 듯 여러 제스추어를 보여주는 손들은 유령처럼 출몰하는 실재의 환영처럼 보인다. 그것을 애써 헤쳐 보았자 검거나 하얀 바탕만이 드러날 것이다. 시각적 가상은 몸에 기반 하는 촉각적 감각에 의해 그 허구적 통일성이 폭로될 수 있다. 전시장에는 줄로 만든 거울 외에 직사각형의 작은 태양열집진소자와 연결된 LCD 유닛들로 만들어진 거울들이 반짝거린다. 시선을 교란하면서도 깊숙이 흡수하는 듯한 ‘string mirror’와 달리, 빛에너지에 반응하는 이 거울은 만화경처럼 표면적이고 분열적이다. 그러나 홍성철의 조각난 거울들은 감상적이거나 파국적인 어조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온전한 존재가 분열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분열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메시지처럼 들려온다. 인간은 거울을 통해서 단편적인 육체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다. 거울은 주체의 단일성을 확인해주지만, 그것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이 말해주듯이 오인에 의한 것이다.
라캉은 공간적 일체화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는 주체를 위해, 환상을 이룩해내는 드라마가 벌어지는 거울 단계를 언급한 바 있다. 거울단계의 이론에 의하면, 거울 이미지는 외양의 총체성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고, 자아는 그 환영의 산물이다. 거울단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어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주체를 만들고, 파편화된 육체의 이미지들로부터 통합의 환상을 만든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환상들은 자기 동일성을 가정하는 자기 방어적인 갑옷의 형태를 띠고 주체를 소외시키는 역할을 한다. 붙잡을 수 없고 붙잡히지도 않는 string mirror에서의 소외된 몸짓은 perceptual mirror의 리드미컬하게 반짝거리는 표면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아직도 유기적인 전체를 기억하고 있는 손과, 부분 그자체로 충만한 새로운 기계적 단위 간의 대조이다. 후자의 거울에서 조각난 육체들은 본질과 총체성에 대한 환상을 접고, 영속적인 우연성과 유동성에 흔쾌히 자신을 맡긴다. 어둠의 대륙 속에 잠겨있던 몸은 이제 순수한 차이로서 그 흔적을 드러낸다. 기계 거울에서 몸은 고정된 실체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탈자연화 된다. 그것은 연결과 전달, 흐름과 생성이 교차하는 가변적인 장(場)이 되며, 의미가 각인되는 공간이자 생산과 구성의 공간으로 몸을 개방시킨다. 거울 저편으로 빠져나가거나, 혹은 조각난 단편으로 흩어지는 실재는, 현대 미술가들로 하여금 상실감과 더불어 끝없는 도전에의 욕망을 부추 키는 듯하다.
밖의 현실을 반영하는 창은 그 안쪽에 주체의 자리를 마련한다. 이때 창은 인간 내면의 심리적 현실을 투사하는 거울이 된다. 황혜선의 ‘기억의 창’들은 뿌연 우윳빛으로 외계의 빛을 굴절시키는 반투명 스크린이다. 사각 틀에 끼워진 면이라는 창문의 형식 이외에, 영상작업과 크리스탈 조각이 같이 전시되어 있다. 창유리에 새겨진 것은 작가의 눈을 스쳐갔을 일상의 풍경들이다. 각 작품에는 포인트를 주듯 채색된 사물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유리면에 투사된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드라마틱한 면모를 가지지 않는다. ‘기억의 창’에는 장소, 시점, 스케일의 차이를 무시하고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인상들이 다소 느슨하게 배열되어 있다. 나무틀 안의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려진 드로잉 역시, 시각적 인상이나 기억의 단편들의 병치이다. 영상작품에서, 안경에 비친 풍경들이나 화장품 옆에 세워진 거울 속 도시풍경은, 정지되어 보이는 구조와 움직이는 것 사이의 대조를 보여준다. 소소하게 변화하는 풍경이 비치는 검은 뿔테는 두개의 커다란 창문처럼 보이고, 작은 거울에 비치는 도시의 심각한 교통체증은 그 옆에 놓인 화장품들만큼이나 무덤덤하다. 렌즈나 거울로 투사된 또 다른 창 역시 ‘기억의 창’과 마찬가지로 계층화된 현실이 단편과 우연 속으로 흩어진다.

명확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 텅 빈 기표의 연쇄 고리는 단단한 존재감을 가질법한 일상들을 신기루처럼 만든다. 단순한 스타일로 정리된 통일된 형식만이 부유하는 기표들을 한 평면에 붙잡아 놓을 뿐이다. 여러 장의 유리에 그려진 선을 중첩시킨 이전의 작품이 요즘에는 고 굴절 렌즈처럼 하나의 판으로 압축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정식화된 원근법은 그림이 그려지는 캔버스가 창문으로 상상하는 문화적 관습을 만들었으며, 시각의 중심과 주관적인 눈의 일치를 통해 근대적 자아가 탄생되었다. 이러한 시각적 관습을 통해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눈은 대상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이도 현실의 지표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황혜선의 창은 단일 시점을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단일한 주체도 전제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서랍이나 앨범에서 나온 것들처럼, ‘기억의 창’에 명멸하는 인상과 무의식은 두서가 없다. 쓱쓱 그어진 듯한 가는 선들은 대상의 외관을 쿨하게 재현하지만, 이 창문 안에는 또 다른 수많은 창문들이 공존한다. 눈물 한 방울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작은 눈물방울처럼 말이다. 크리스탈에 에칭한 물방울은 기억의 창이 깨져 만들어진 결정같이 진한 감정의 집약 체를 이룬다. 영상작품은 시간성이 개입되면서 일련의 서사를 낳는다. 제자리걸음하는 구두, 아무리 따라도 같은 레벨을 유지하는 찻잔 등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망으로 점철된 삶과 예술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다.
홍성철의 ‘Perceptual Mirror’는 자신의 몸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나 팽팽하게 당겨진 줄과 LCD 유닛들로 이루어진 거울에 비추어진 몸은 잡으려할 수록 저 멀리 달아나는 듯하다. 스틸 프레임 안에 계층을 이루며 수직으로 배열된 줄에 프린트 된 몸의 일부는 관객을 향해 손짓한다. 연기하는 손들은 거의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잡아당기거나 튕겨보고 싶은 줄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중층적 표면을 이룬다. 수화를 하는 듯, 그림자놀이를 하는 듯 여러 제스추어를 보여주는 손들은 유령처럼 출몰하는 실재의 환영처럼 보인다. 그것을 애써 헤쳐 보았자 검거나 하얀 바탕만이 드러날 것이다. 시각적 가상은 몸에 기반 하는 촉각적 감각에 의해 그 허구적 통일성이 폭로될 수 있다. 전시장에는 줄로 만든 거울 외에 직사각형의 작은 태양열집진소자와 연결된 LCD 유닛들로 만들어진 거울들이 반짝거린다. 시선을 교란하면서도 깊숙이 흡수하는 듯한 ‘string mirror’와 달리, 빛에너지에 반응하는 이 거울은 만화경처럼 표면적이고 분열적이다. 그러나 홍성철의 조각난 거울들은 감상적이거나 파국적인 어조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온전한 존재가 분열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분열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메시지처럼 들려온다. 인간은 거울을 통해서 단편적인 육체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다. 거울은 주체의 단일성을 확인해주지만, 그것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이 말해주듯이 오인에 의한 것이다.
라캉은 공간적 일체화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는 주체를 위해, 환상을 이룩해내는 드라마가 벌어지는 거울 단계를 언급한 바 있다. 거울단계의 이론에 의하면, 거울 이미지는 외양의 총체성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고, 자아는 그 환영의 산물이다. 거울단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어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주체를 만들고, 파편화된 육체의 이미지들로부터 통합의 환상을 만든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환상들은 자기 동일성을 가정하는 자기 방어적인 갑옷의 형태를 띠고 주체를 소외시키는 역할을 한다. 붙잡을 수 없고 붙잡히지도 않는 string mirror에서의 소외된 몸짓은 perceptual mirror의 리드미컬하게 반짝거리는 표면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아직도 유기적인 전체를 기억하고 있는 손과, 부분 그자체로 충만한 새로운 기계적 단위 간의 대조이다. 후자의 거울에서 조각난 육체들은 본질과 총체성에 대한 환상을 접고, 영속적인 우연성과 유동성에 흔쾌히 자신을 맡긴다. 어둠의 대륙 속에 잠겨있던 몸은 이제 순수한 차이로서 그 흔적을 드러낸다. 기계 거울에서 몸은 고정된 실체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탈자연화 된다. 그것은 연결과 전달, 흐름과 생성이 교차하는 가변적인 장(場)이 되며, 의미가 각인되는 공간이자 생산과 구성의 공간으로 몸을 개방시킨다. 거울 저편으로 빠져나가거나, 혹은 조각난 단편으로 흩어지는 실재는, 현대 미술가들로 하여금 상실감과 더불어 끝없는 도전에의 욕망을 부추 키는 듯하다.
출전 | 아트 인 컬처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