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 미술평론가
‘기억에 관한 흔적 남기기’라는 부제로 열리는 배성미의 두 번째 개인전의 작품들은 사진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자족적인 작품으로서 전면에 배치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사진을 찍는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거나 예술적으로 찍으려고 노력하거나 막강한 촬영 장비가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배성미에게 사진은 개인의 사적 경험과 기억을 용이하게 수집하는 수단이며, 이번 전시에서 그렇게 수집된 기억들을 재편집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을 창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억은 과거의 세세한 행적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것이라는 점에서 열려있으며, 그 잠재적 가능성을 통해 타자와 소통하려 한다. 폰카나 디카를 가지고 사진 찍는 것이 습관화 되어버린 많은 젊은이들처럼 배성미도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찍은 수많은 사진 파일들을 제대로 정리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전시를 통해 사진들은 일련의 맥락을 되찾으려 한다. 계속되는 선택을 통해서 필연적인 맥락을 부여하려는 주체와 흩어진 자료들 사이의 간격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재편되고 내러티브가 만들어지며,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무엇이 찍혔는지에 대한 분석은 그것을 왜 찍었는지에 대한 물음과 대답으로 이어진다. 과거 어느 시점에 찍혀진 사진들은 현재에 추체험된다. 그러나 다시 조직화된 어느 장면들도 이미 전제되어 있는 필연적인 인과고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크게 보이는 작품 [언제나 지난 하늘 폴더]는 검은 바탕에 500장의 하늘 사진이 다소간 기계적으로 배열된 대형 디지털 프린트이다. 길이만 5미터이므로, 관객은 마치 하늘을 보는 듯한 자세로 작품을 보게 된다. 몇 년전 하늘부터 요즘의 하늘까지 시간대 별로 정리된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일부러 하늘을 찍으려 한 것이 아니었는데, 유난히 하늘 사진이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초고층 빌딩같은 도시적 기념비의 양상을 띠고 있는 거대한 하늘 이미지 모음은 어느날 무심코 스쳐지나갔을 하늘을 ‘한번 세상 밖으로 꺼내주는 행위’이다. 작품 [다녀간 사람들]은 북한산 등반 도중에 발견된 돌탑 무리들과 그 배경, 그리고 인물을 이리저리 조합하면서 작가 자신을 포함한 익명의 인간들의 행위와 시간의 흔적들을 부각시켰다. 흔적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은 3차원 공간에 드리워진 철제 프레임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작품 [눈에 보이는 공간의 흔적]은 전시장을 분석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서 추출한, 작가의 공간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그 형태의 원본이 되었던 입구, 계단, 구석 등의 실제 공간에 겹쳐져서 설치되기 때문에 관객은 작가가 포착한 공간에 대한 상을 실제와 비교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행히 참조대상이 병치되어 있는 예라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작가만이 알 수 있는 수집품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수집 당사자조차도 기억에 한계를 느낀다. 한 시기나 한 장소에서 아무리 많은 사진을 찍었다 한들, 사진과 사진 사이에는 크고 작은 단절과 간격이 놓여있다. 그것은 결코 총체적이거나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지 못한다. 그것은 총괄적으로 정리되는 전체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꿈속의 사물처럼 부분적인 대상들로 띄엄띄엄 나타난다. 여기에서 과거와 현재같은 시간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요소가 된다. 그것은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분석한 현대 예술의 시간관처럼, 모든 시간대를 현재와의 인과관계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여 서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시간대가 있음을 보여준다. 배성미의 작품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처럼, 전체화와 반대되는 국부화된 시간을 채우고 있는 국부적인 내용들이 담겨있다.
작품 [기억의 잔상]은 1박 2일의 여행 동안 찍은 사진인데, 100장 넘는 사진에서 12개 정도만 기억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기억에 남는 12장을 따로 뽑아 라이트 박스 안에 배치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순간적으로 저며낸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더불어 기억의 의미를 예시한다. 작품 [당신은 오늘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에서는 무심한 초침 소리와 더불어 아무 흔적없이 지나가 버린 현재들을 채우려고 한다.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들을 현장에서 폴라로이드로 찍어 채워넣는 원고지 모양의 거대한 시트지는 아마도 순조롭게 채워지겠지만, 작가는 그 순간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를 묻는다. 다소간 기계적으로 배치되는 프레임들은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기념비화하려는 의지가 배어있다.
작품 [사연을 위한 기념비]는 돌에 전사한 레이저 조각 작품으로, 잎새 한 장, 신발 한 켤레, 가짜 목련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이 스며있는 대상들을 단단한 돌에 새겨서 기념하였다. 작품 [용기를 위한 기념비]는 [사연을 위한 기념비]의 중성적 밎밎함을 넘어 좀 더 직설적이다. 거대한 배낭을 시멘트로 뜬 이 작품은 여행을 즐겨하는 작가의 특별한 물건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가장 확실한 기억을 위한 조치가 대상의 죽음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그것은 동시에 시간을 공간으로 고정시키는 행위에 내재된 위험성을 경고한다. 시간 그 자체의 흐름 속에 속한 진한 경험과, 그 경험의 순간을 수집, 분류, 분석, 서술하는 행위 간에 존재하는 간극을 사람들은 충만하게 채우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간극은 결코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석화된 배낭과 같이 설치된 작품 [길없는 길]은 스캐닝한 주민등록증 사진 상의 지문을 확대한 것이다. 지문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증해주는 가장 강력한 흔적이지만, 배성미의 작품에 나타난 지문은 미로와도 같은 수수께끼의 대상이다. 친숙한 것은 낯선 것으로, 동질적인 것은 이질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것, 그것이 사후 분석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면모이다. 배성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것, 즉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채집하는 행위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시점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외적으로 떠나는 것 만큼이나 내적으로 떠나는 행위이다. 작가의 여행은 특별한 목적이 없는 유랑, 또는 유목같은 양상을 가지는데, 그것은 꿈과 무의식에 대한 분석이 끝없는 해석의 과정을 가지는 것과 같다. [길없는 길]에 나타나는 미로의 이미지는, 의외의 상황과 맞딱뜨림이 빈번한 여행이라는 시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인생과 비슷하다.

인간은 모태를 떠난 이래, 입구와 출구는 있지만 여정의 순간마다 막막한 선택을 해야하는 표지 없는 길을 방황해야 하는 미로 속 여행자이다. 목표 지점까지 단번에 도달할 직선상의 투명함이 아니라, 막다른 길과 장애물, 위험이 놓여있는 불투명한 우회로를 통과해야 한다. 이러한 시행착오의 과정은 저주받은 자만의 운명이 아니라, 지문처럼 인간의 조건 그자체에 새겨 있는 것은 아닐까. 당장에, 사진 파일들이 잔뜩 저장되어 있는 컴퓨터의 반도체칩 자체가 미로 아닌가.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양자택일을 물으며 계속되는 지시어는 한없이 이어지는 분리 과정이고 수많은 길들 사이에서의 선택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자크 아탈리는 21세기에 유목과 미로가 되돌아오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가상 유목민, 즉 이미지와 환영을 좇는 여행자로 바뀌고 있다. 그의 책 [미로]에 의하면 근대의 이상과는 달리, 이제 모든 것은 더 이상 직선이 아니다. 우리는 곧고 투명한 것을 버려야 한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배성미의 작품에서 미로의 이미지는 그 직접적인 이미지 뿐 아니라, 작가 스스로와 관객으로 하여금 단절된 시공간의 수수께끼를 풀고, 끝없이 해석하는 여정에 놓아 둔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미로는 자아와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한 모델이 되는 것이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와 연관된 시간 감각을 논하는데, 그에 의하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 널리 퍼져 있다. 연속이나 진보로 간주된 근대적 직선적 시간관은 ‘시간을 아끼고 번다’라는 표현에 암시되어 있듯이, 경제적인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자크 아탈리는 미래의 지혜는 시간에 대한 경제적인 관념이 아니라, 시간을 채우고 경험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살펴보는데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경제성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의 문제가 된다.
배성미의 작품에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기호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관객에게는 물론, 작가 자신에게도 투명하게 드러나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대상들이다. 그것은 이미 결정화된 한 시간과 공간을 늘어놓는 행위가 아니라, 해석해야 하는 미지의 대상으로 열려있다. 과학이나 철학은 방법과 이념에 따른 길을 걷지만, 예술적 기호는 정처 없는 여행지나 미로에서 맞딱뜨리게 되는 것처럼 우연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질 들뢰즈는 예술적인 것을 구별한다. 그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기호를 우연히 나타나 자기 안에 들어있는 바를 해석하기를 강요하는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이성적인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가 시작되도록 자극하는 대상이다. 예술의 기호는 과학이나 철학에서와 같은 투명하고 즉각적인 소통이 아니라, 수많은 우회를 통해 반복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어야 하는 해석행위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예술의 방식이며, 예술 속에서 확인되는 참된 영원성이기도 하다. 이 맥락에서 들뢰즈는 예술의 기호는 우리에게 되찾은 시간을 준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을 통해 되찾은 시간은 펼쳐져 전개된 시간, 즉 흘러가는 계속적인 시간, 잃어버리는 시간 일반과는 대립되는 시간이다. 되찾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타자와 차이를 발견한다. 타자의 효과란,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사물과 내가 사유하는 각각의 관념의 주위에서 내 지각의 변두리의 세계, 즉 배경을 조직하는 것이다. 내가 대상의 이 숨겨진 부분에 도달하려고 할 때 나는 대상 뒤에 있는 타자와 결합하게 된다. 또한 예술 작품은 차이를 드러내 준다. 존재를 구성하고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차이와 반복은 뗄 수 없고 서로 상관적인 본질의 두 힘이다.
반복이란 차이의 힘이며, 마찬가지로 차이란 반복의 힘이기 때문이다. 차이란 한 세계의 성질로서, 가지각색의 환경들을 가로지르고 다양한 대상들을 통합하는 일종의 자동반복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다시 말해 반복은 하나의 근원적인 차이에 단계들을 구성해준다. 배성미의 작품에서 차이와 반복의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작품 중의 하나가 [흔들리고 부딪히는 것들]이다. 그것은 여행 중에 찍은 동영상으로 끝없이 파도치는 모습에서 인간의 ‘자기애, 이기심, 욕망, 그리고 용기’ 같은 단어를 발견한다. 파도와 텍스트가 함께 이합집산하는 장면들은 물리적, 또는 의미론적 에너지의 차이에 의해 끝없이 밀고 밀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차이와 반복을 보여주는 또 하나는 윈도우 갤러리에 걸린 작품으로, 갤러리 안에 걸린 큰 철제 프레임 이미지가 그 앞의 창에 놓인 작은 프레임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 이미지들의 출처자체가 창을 바라보는 관객의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
반복 속에서 차이를, 차이 속에서 반복을 간취하는 것은 공명의 효과이다.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장소와 순간의 공명이 간격 사이를 보이지 않은 끈으로 연결하면서 공감을 만들어낸다. 단번에 이해되기 보다는 끝없는 해석과 대화를 요구하는 배성미의 작품들이 사진, 영상, 오려진 종이, 레이저 조각 등 반듯반듯한 직선의 경계면들로 구획되어 있는 것은 다소 역설적으로 보인다. 그녀의 작품은 방법론이 이성적으로 정립된 철학이나 과학, 또는 경제의 직선과는 거리가 먼, 불투명하기 그지없는 통로들을 제시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로나 우회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객관적인 것을 단순히 재확인하는 방법이나 재현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예술 고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