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현대미술은 미술이란 개념과 그 개념에 따라붙은 모든 행위와 인습에 대한 과감한 자기 부정내지는 인식론적 비판일 것이다. 그러니까 미술행위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각자 그 미술이란 다분히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유희하고 부정하고 극복하고 갱신해온 이런 저런 궤적이 모여 수놓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미술일 것이다. 손에서 지적 유희나 정신으로 이동해온 것이자 산업사회의 대량생산 된 사물과 이미지와의 차별성을 궁구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고 협소해진 이미지, 미술의 삶을 모색해보려는 지난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현대미술의 정신과 본래의 뜻이 이 땅에 제대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요구되었다. 김구림은 현대미술의 이념과 스타일을 독특하게 체화시킨 작가이며 모더니스트로서의 작가적 삶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작가로 기억된다. 그의 너무 이른 그 작업과 제스처는 당시의 서구현대미술과 기이한 접합으로 이끌려가면서도 당대 한국 사회와 미술계에 겨냥되어 진행되어 왔다. 김구림은 특정한 스타일이나 관습적인 그림의 틀로 저당 잡히지 않는 작가, 모더니스트로서의 아방가르드 정신에 충실한 이, 장르를 넘나들면서 부단히 기존 미술의 진부한 관념과 획일적 사고를 이탈하고 유출시키는 작가다. 아니 늘 새로운, 낯선 감수성과 미술에 대한 고정되지 않은 사유를 선보인 작가라는 생각이다. 그의 존재를 미술계에 확실하게 각인한 작업은 70년대에 그려진 정물시리즈였다고 본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매혹적이고 이질적이면서도 무척 세련된 논리성과 감각적인 드로잉과 함께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70년대에 그려진 그 그림들은 그림이란 외부 세계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 자기 참조적이자 메타회화적인 그림이었다. 선가 물감, 붓질 그것 자체로 자족하는 상황을 연출해보인 그 작품은 그림에 관한 그림이자 그림에 대한 일종의 진술, 텍스트적 그림이었다. 몇 개의 선으로 표시된 사물 주변의 상황 설정 위에 사물을 두드러지게 그려냄으로써 시간의 중첩을 노리는 한편 사물의 이름, 위치, 크기, 거리 따위를 목탄으로 쓰거나 긋거나 지시, 표시하고 난 다음에 그 흔적을 다시 지우거나 입으로 불어내어 겨우 행위의 흔적만을 남겨둠으로써 일상적인 사물이 지니는 현존성을 확인하는 그런 작업이었다. 이미지와 문자, 그려진 부분과 물질 자체의 화면이 공존하는 다소 기이한 영역, 공간 상황을 연출해보인 그림이었다.




그의 근작 역시 일상의 사물을 다룬다. 그는 마술사, 연금술사처럼 그 버려진 사물에 혼을 넣어 독특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 그의 손에 의해 사물과 이미지는 변신을 거듭한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고 학습되어 견고하게 각인된 사물과 세계에 대한 관념과 시각을 풀어헤치고 묘한 충격을 안긴다. 그는 온갖 사물들이 혼재한 고립되고 안락한 왕국에 있는 마술사, 연금술사 같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물처럼 흘러 다니는 곳,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기이한 연출력, 그리고 현대문명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메시지와 관능적인 이미지들이 겹쳐있는 작업실에서 그는 놀라운 작업량을 축적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그곳에서 7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고 그리는데 대한 흥미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지속해서 현재라는 시대성을 ‘타킷’ 삼아 지칠 줄 모르게 이미지와 오브제를 빌어 미술적으로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변화하는 세계의 현상을 주목하고 장소적, 물리적, 시간적 요소를 자신의 예술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작가적 삶인 셈이다.




근작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우선 디지털로 출력 받은 사진이미지 위에 추상표현주의적인 붓질을 과감하게 얹혀놓은 페인팅이 있다. 기존의 이미지(사진)위에 기생 하는 이 그림은 일종의 오브제 회화인 셈이다. 디지털이미지의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화가의 붓놀림과 제스처가 한 화면에 공존하고 있는 형국을 보여준다. 바탕을 덮고 있는 사진이미지는 관능적인 백인 여자의 얼굴과 몸의 일부가 크게 확대된 것이다. 몸의 일부가 과도하게 증폭되어있는 이 이미지는 디지털로 대변되는 현대(서구)문화와 시각이미지, 아울러 포르노이미지와 동시대시각문화의 친연성을 동시에 아우르는 복합적인 의미를 안고 있어 보인다. 특히 젊은 여자들의 관능적이고 성적인 몸이 빚어내는 이 하드코어이미지는 기계적이고 차갑고 건조한 문명과 문화에 대응하는 생명의 이미지로 차용된 것 같다. 그에게 이 여성의 몸, 성적 포즈들은 한편으로는 뜨거운 생명과 본능의 기호로 작동하고 인간적인 본질을 이루는 그 어떤 것으로 드러난다. 그 위에 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갈기듯 그어놓은, 손의 의미성을 지닌 붓놀림이 드라마틱하다. 꿈틀거리고 기에 충만한 이 붓질은 차갑고 관능적이고 황폐한, 물화된 문화에 대항하는 한 개인, 예술가의 몸짓, 절박한 제스처와 음성을 닮았다. 그 붓놀림에는 여전히 한 작가만의 고유한 몸짓과 회화에 대한, 미술에 대한 자존적인 존엄성이 깃들어있고 생명력이 꿈틀댄다. 그런가하면 동양의 모필 문화의 상징적 기호역할도 한다. 그러니까 이 붓질은 생명의 불모성을 초래하는 서구문화, 디지털이미지 등에 대한 대안적 측면도 있고 아울러 그것들을 끌어안는 측면도 노정한다. 그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것의 충돌과 갈등 구조를 동시에 드러내는 한편 이것과 저것의 극단적 선택 대신에 두 가지를 모두 넘어서는, 혹은 동시에 포용하면서 그 경계의 날을 주목시키는 편이다.
사실 그의 작업실은 페인팅보다도 온갖 오브제, 그러니까 기계부품이나 마네킹 및 다양한 잡동사니들로 넘쳐난다. 이른바 정크아트에 가까운 그의 오브제작업들은 흡사 초현실주의자들의 작업과 작업실을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현대인들은 사물과 물질, 이미지의 포화 속에 잠식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더욱 극대화되거나 정교해지고 압도적이 되어 간다. 따라서 작가의 할 일은 그것들을 통해 역설적인 발언을 하고 그 사물들을 또 다른 언어로 환생시키는 것이 되고 있다. 아울러 뒤샹 이래로 작가의 손에서 새로운 것을 마치 신의 능력처럼 만들고 재현한다는 관점은 큰 도전을 받았고 따라서 이후 작가들은 이미 기존에 흘러넘치는 수많은 사물들에 말을 건네고 이를 변형하고 조작하면서 딴지를 걸거나 개입하는 방향으로의 선회를 보여준 바 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오늘날 현대미술의 주류적인 방법론이 되었다. 사실 김구림의 이 오브제작업은 이미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일관되게 기존의 사물과 이미지를 차용하고 이를 해체하고 변질시키는 ‘놀이’를 감행해온 작가다. 그는 아이디어나 건조한 개념, 관습적이고 형식화된, 그래서 이미 죽은 회화 언어로 말하기보다 끊임없이 자기 생을 이루는 현재의 사물, 이미지를 통해 동시대 문화와 삶에 대해, 잃어버린 감수성과 상상력에 대해, 진정한 인간의 생의 욕망에 대해 기술記述하는 작가고 그 기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이러한 궤적은 우리 미술계에서는 보기 드문 다소 경이로운 자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