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각형으로 이루어진 정육면체나, 3각형과 5각형으로 조합된 입방체는 내부의 구를 무한 반사하는 면들로 인해 어지러운 환영이 만들어진다. 그것들은 단독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한 작품이 일종의 모듈을 형성하면서 여러 개가 붙은 방식도 있다. 작품 하나에도 엄청난 노동량이 투여되는데, 그것들이 모여 집적된 또 다른 작품들은 거의 초인간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다각형 조합물인 입체들은 모서리가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어 금속 특유의 날카로운 반사면 대신에, 풀잎 위의 이슬처럼 부드러운 표면장력으로 빛을 머금고 있다. 2006년 포스코 스틸 아트 전에 출품한 작품에는 기하학적 형태를 벗어나 물방울 모양의 구조물에 구를 집어넣어, 하나의 물방울을 구성하는 수많은 분자적 형태를 은유하기도 하였다.
2007년 토야무라 국제 조각 비엔날레의 대상 작품인 [seed of cosmos]는 위세복의 작품이 작은 물방울로부터 우주에 이르는 규모를 가지고 있음을 예시한다. 정사각형 판위에 둥근, 혹은 사각형의 작은 반사면들이 박혀있는, 부조적 형태의 작품에서도 주변의 환경과 관찰자를 포괄하며 여러 개의 반사면을 보여주는 방식은 마찬가지이다. 요즘 작품은 구를 이루는 다각형 사이의 틈을 남겨놓거나, 완전한 구속의 구같은 또 다른 변주를 보여준다. 구가 아닌 육면체일 경우 모서리를 좌대 위에 세워서 보다 역동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2005년 개인전에서 선보인 육면체가 내부의 구에 의해 무한반사 되는 효과가 있었다면, 요즘 작품의 육면체 자체가 가로 세로로 무한히 분열하는 듯 한 형태도 보여준다. 위세복의 작품은 정교한 구성방식 외에, 막대한 노동이 집적되고 결정화된 방식으로 놀라움을 준다.

그러나 노동은 단지 노동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양은 질로 전화한다. 그의 작품은 ‘네모난 동그라미’, 또는 ‘둥근 사각형’ 같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도형에 근접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세복은 작가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생각하는 이라고 강조한다. 재료가 되는 쇠를 직접 마주 대하면서 끝없는 대화와 어루만짐을 통해 형태를 만들고자 한다. 작품의 기본 방식은 두께 3mm의 스레인레스 스틸 판으로 만든 구인데, 이 난이도 높은 작업에서 용접과 표면 연마는 기본적인 과정이다. 반드시 5각형이 12개 들어가야 하는 12면체가 최소단위이고, 3,4,5각형 등이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조합되면서 여러가지 다면체가 만들어 진다. 그것은 금속 조각을 이어서 입체를 만드는 방식인데, 값이 비싼 온전한 금속판 대신에 폐자재를 사용하여 조각 잇기를 시도한 것이다.
허접스러울 수도 있는 재활용이 너덜너덜한 정크 아트가 아니라, 보석같은 결정체로 재탄생했다. 이를 위해 투여된 노력이 얼마정도 인가는 일반 관객으로서는 가늠해 보기도 힘들다. 입체 구조물 내부에서 무한 반사하는 결정체들은 찬란해 보이지만, 그것은 자학적일 만큼 자신을 한쪽으로 몰아붙인 결과물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적 차원을 넘어서는 노력을 꿀꺽 삼킨 채 냉정하고 무심한 눈길을 던지는 듯하다. 그의 작품은 정답을 향해 나있는 1차원적인 선을 따라 진도를 나가는 식의 통상적인 방식과는 무관한 자아의 방황과 세상과의 불화가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지상 또는 외부와의 닿는 면적을 최소화 한 채 내부에서 무한대로 파열한다. 그것은 홀로 외로이 서서 흘러가는 세상의 한 순간을 담아낼 수 있지만, 곧바로 분자적 형태로 분해해버린다. 주변 상황과 상대를 비추자마자 섬광이 되어 확산되는 내부의 구는 동공처럼 텅 비어있으며, 목전의 사건들을 사방팔방으로 되반사할 뿐이다.
어지러운 반사면은 견고한 대상을 수많은 패턴으로 분산시킨다. 이 추상적 선들은 보링거가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개진한 바 있는 인간의 내적 불안을 투사하고 있다. 보링거의 가설에 의하면 환경과 행복한 조화적 관계에 있을 때는 감정이입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예술이 탄생하지만, 환경과의 부조화와 분리 그리고 불안의 감정은 추상적 예술을 낳는다. 그는 고딕이나 동방의 예술의 예를 들었지만, 주체와 객체 간의 불화관계가 거의 일반화된 현대에 와서 추상 충동은 현대예술의 주요 방향이 되었다. 위세복의 추상적 구조물이 외계와의 불화를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생명 억압적이지는 않다. 그의 작품에서 생명은 재현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의 외양이 아니라, 내재율을 표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 구조를 가지지만, 동시에 인간의 압축된 정서와 감각을 내포한다.
구에 비추어지는 순간 사방으로 도주하는 형태들은 곱게 연마된 고른 표면을 통해 선형적 다양체를 이룬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이러한 선형적 다양체들이 시작도 끝도 없이 변이하는 선이라고 말한다. 매끈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추상적인 선은 유기적 재현과는 달리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는다. 무한 반사면이 만들어내는 이 추상적 선들은 비유기적이지만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비유기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선들은 인간과 자연이 가두어 두었던 생명의 역량을 해방시킨다. 무한하며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어 한계를 갖지 않는 매끈한 공간은 외연적 공간이 아니라, 강렬한 내포적 공간이다. 반사면들을 따라 빠른 속도로 탈주하는 선들은 고른 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증식하면서, 입구와 출구를 가늠할 수 없는 미로로 변모하고 있다. 정밀한 체계를 구축한 위세복의 작품은 중앙 중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핵분열과도 같은 증식에 의해 다중심의 우주로 변모한다.

한계 지워진 입체 속에서 서로를 가로질러 나아갈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우글거린다. 위세복의 1회 개인전 부제에 나오는 ‘Kyklops’는 신화에 등장하는 외눈박이 괴물로 카메라같은 기하학적 눈을 가지고 있다. 수의 질서가 아로 새겨져 있는 이 눈은 외부 세계를 내부로, 내부 세계를 외부로 투사할 수 있다. 엄밀한 기하학적 구조로 짜맞추어진 위세복의 작품은 수학과 조응하는 신비로운 우주라는 점에서 피타고라스 학파같은 고대적 자연철학을 떠오르게 한다. 제임스 글리크는 고전 기하학에서 다루는 형태는 선분, 평면, 원, 구, 삼각형 그리고 원추 등으로, 그것들은 실재를 강하게 추상화한 것으로 플라톤적인 조화의 철학에 강한 영감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예술가들은 그 도형들에서 이상적인 미를 발견했고 천동설을 주장하던 천문학자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우주론을 정립했다. 그러나 세계의 복잡함을 이해하기에는 그 도형들이 잘못 추상화되었음이 드러났다. 위세복의 작품에서 겉껍질은 고전기하학이 투사되어 있다.
그러나 카오스나 프랙탈fractal 이론 같은 현대의 새로운 기하학이 투사된 곳은 무한 반사가 일어나는 작품 내부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카오스는 무질서라기보다는, 희미하게 떠오르다가 이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는 모든 형태들의 무한한 속도로 정의 한다. 그것은 무(無)가 아니라 모든 가능한 형태를 이끌어내는 잠재태로서의 공백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탄생과 소멸의 무한한 속도이다. 작가는 카오스로부터 다양성들을 가지고 온다. 위세복의 작품에서 매끈한 공간들을 가로지르는 것은 프랙탈 현상이다. 반사면을 통해 작은 형태로 부서지는 프랙탈 이미지는 해안선이나 눈송이 곡선같은 물리적인 현상은 물론 유기체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프랙탈 곡선은 여러 계를 관통하는 복잡성 사이에 숨어있는 조직적인 구조를 암시한다. 프랙탈의 핵심은 자체 유사성self-similarity이라고 지적된다. 자체 유사성은 회귀, 즉 패턴 안의 패턴을 의미한다. 거울 효과를 통한 무한 반사작용이 이루어지는 위세복의 작품에 나타나 있는 것이 자체 유사성이다.
라이프니츠가 상상했듯, 한 개의 물방울에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우주전체가 들어있고, 다시 그 우주 속에는 물방울이 들어있고, 그 물방울에는 새로운 우주가 들어있는 세계가 위세복의 작품에서도 펼쳐진다. 그런 의미에서 프랙탈은 ‘무한을 보는 방법’(글리크)이다. 프랙탈 조직은 규모가 작아지면서도 자체유사적인 형태가 유지되도록 조직되는 분지(分枝)이다. 분지의 연속체인 프랙탈 구조는 한정된 부피 안에 무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적했듯, 한계와 무한과의 맞부딪힘, 바로 거기에서 사물들은 생겨난다. 견고하게 서있지만 그 내부에서 시각적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위세복의 작품은 본질보다는 공백이 두드러진다. 그 공백 위에서 사건들이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구조와 제작에 있어 일련의 규칙을 따르는 그의 작품은 개념적인 면이 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개념을 다가올 어떤 사건의 윤곽, 지형, 자리매김이라고 정의한다. 사물들과 존재들로부터 언제나 하나의 사건을 추출해내는 것은 철학의 과업일 뿐 아니라, 예술의 과업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정황뿐만 아니라, 모든 체험을 조감하는 하나의 사건을 세우는 것이다.
저자들은 예술이 살과 더불어서가 아니라 집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말한다. 존재는 살이 아니라 우주의 비인간적 힘들,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들, 그리고 그것들을 교류시키고 조절하며 바람처럼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집의 구성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예술의 으뜸을 이룬다. 가장 과학적인 건축은 끊임없이 구도들, 단면들을 만들어내고 결합시킨다. 건축은 틀로, 즉 다각적으로 방향 지어진 틀들의 끼워 맞춤으로 정의될 수 있다. 분리되고 조각난 단편을 이어서 만든 위세복의 구조물은 건축을 닮았으며, 진부한 인간적 감정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서들을 산출한다. 동시에 그것들은 기념비적인 것을 이룬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기념비는 일어났던 무언가를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기념비란 잠재적 사건을 현실화함이 아니라, 사건에다가 하나의 육체를, 삶을, 우주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하나의 기념비이다. 예술로서의 기념비는 추억이나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적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