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 속으로 거니는 산수화의 여백은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그 안을 돌아보게 하는 실제의 공간이 된다. 맨 아래층 전시장의 낮은 천정과 어둑한 공간은 바닥에 깔아놓은 모래와 우툴두툴한 시멘트 벽에 직접 그려진 풍경으로, 종이나 천 등 매끄러운 표면 위에 그려져 곱게 표구된 산수화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그곳은 거친 벽면의 상처와 우연한 흔적들까지도 심미적 요소가 된다. 공간은 먹으로 솜씨있게 쓱쓱 그려진 형상들로 채워져 있지만, 도시 깊숙한 곳에서 발견될 법한 방치된 폐허 안의 낙서화 같은 문명 속 야성을 느끼게 하는 연극적 공간이다. 그 위층의 작은 방에는 한지에 먹으로 그린 그림들을 쇠꼬챙이에 끼워 빽빽하게 걸어 두었는데, 마치 대량으로 처리되고 있는 고깃 덩어리처럼 배치되어 있다.

1층에 설치된 [라면풍경]은 수많은 라면 덩어리를 바닥에 뿌려서 산과 길, 그리고 들판을 만들고 작은 모형 집들과 비행기를 설치하였다. 그 옆의 [칠판산수]나 [고무산수] 역시 유사 조형언어로 채택된 사물로 이루어진 산수이다. 화선지나 먹물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이 시대에, 순수한 조형적 요소와 사물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르지만, 박병춘의 ‘채집된 산수’는 엄연히 전통적인 회화와 꼴라주의 차이에 비견할 수 있는 큰 차이를 가진다. 그림이라는 중성적 공간 속에 실제 사물이 도입, 침투되는 꼴라주는 자족성을 갖춘 미술작품에 우연성과 일시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박병춘의 산수에서 발견되는 현대적인 요소는 산수라는 관념상의 영원성과 당대성의 조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의 당대성은, 소재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상품으로서 흔히 접하고 있는 사물들의 동원이고,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구체적인 장소와 밀착된 일시적인 설치물이라는데 있다. 현대성의 고전적인 정의는 ‘현대는 덧없는 것, 사라지는 것, 우연적인 것이다. 이것이 예술의 반을 차지하며 다른 반쪽은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보들레르의 말에 담겨있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박병춘의 작품에서 영속적인 것은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산수에 대한 상이다. 반면 일시적인 것은 그 산수를 구성하는 사물로 된 유사 언어들이다. 이와 같은 두차원의 결합 및 교류를 통해 일상은 그 하찮음과 비속함을 벗어나 이상으로 고양되고, 먼지 쌓인 고답적 이상은 사회생활 한 가운데에서 살아 숨쉬는 당대성을 획득하게 된다.

출전 | 퍼블릭 아트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