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 우리는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불과 10여년전 과거를 역사 서술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시기이다. 현시대의 10년이 과거 100년에 못지않은 변화가 있다해도 그렇다. 물론 우리의 시간감각은 달라졌다. 90년대 들어와서야 대중화 되었던 ‘286’, ‘386’ 같은 개인 컴퓨터 기기가 얼마나 유물같은 느낌을 주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어느 시대에나 새로운 세대는 있어왔고, 역사는 새롭게 부상한 이들이 부침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유독 1990년대를 ‘신세대의 해’로서 기억한다. 윤진섭, 김현도 등 당시의 많은 비평가들의 평문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다 할지라도, 그 시대가 정치 변혁의 시기인 80년대와 기업 논리가 전사회를 지배하면서 냉정한 경제질서가 자리 잡아가는 2000년대 사이에 낀 시대로서, 폭발적인 ‘문화의 시대’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한다. 백지숙, 강홍구 등 이 시기에 많은 이론가나 작가들이 문화비평가로도 활동했다.

서태지 같은 대중 음악가가 전위 예술가 대접을 받았고,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소위 말하는 정식 코스를 밟아 작가 활동을 하는 미술인들도 대중문화 및 하위문화와 적극적으로 만났다. 제도 미술의 계보를 벗어나 보다 넓은 문화적 에너지에 젖줄을 대면서 새로운 입지를 만들어가는 전략은 8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90년대에 질적 도약을 거치면서 만개하였고, 현재에도 계속되는 추세이다. 이렇게 확대된 미술의 지평을 염두에 둘 때, 90년대의 미술을 전통적인 미술사나 비평의 방법론으로 정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처럼 가까운 시기의 미술은 주어진 실증적 사료의 분석이 아니라, 선택적 해석의 그물망 속에서 사건과 인물, 그리고 작품을 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90년대의 미술문화를 서술하는 성격을 가지는 이 글은, 90년대에 출렁거렸던 문화적 그물망을 재구축하면서 그 그물망의 결절점에 놓인 몇몇 작품들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언급되는 작가들은 상식화되어 있는 신세대의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이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의 현재 미술문화의 윤곽도 잡혀지기를 기대한다.

2. 87년 6월, 90년대의 시작과 변화된 문화지형

80년대가 80년 1월 1일이 아닌 80년 5월 18일에서 시작되었듯이, 90년대는 90년 1월 1일이 아니라, 87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90년대는 99년 12월 31일에 끝났다기 보다는, 97년 세계화 속에서 자본의 모순이 돌출되었던 외환위기 때 이미 끝났다. 어쨌든 그런 셈법으로도 10년은 채워진다. 2007년 6월 현재, 87년 6월 시민운동 2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 행사들이 풍성하다. 그 시기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87년 6월’은 광장에서의 민주화 운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정점이라는 표현은 그 이후의 퇴락, 또는 변화를 함축한다. 민주주의 쟁취라는 정치집중의 변혁운동은 그 후 보다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 또는 변주되면서 90년대에 여러 갈래의 문화로 펼쳐졌다. 87년 대규모 시민운동을 계기로 다양한 시민운동이 90년대에 힘을 발휘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 시민운동의 많은 의제들이 제도정치 속으로 흡수되고, 단순한 당위와 대의를 넘어 전문성을 담보하지 못한 시민운동은 이전 시대만큼의 힘을 받지 못하고 내리막 길을 걷게 되었다.

다원주의 경향 뿐 아니라, 노동자나 민중, 민족을 앞세운 문화단체들이 전국단위로 세워진 것도 80년대 말미에 와서야 본격화 되었다. 올해 18년 째의 구로 노동자 문학회가 생긴 것이 88년이었고, 그후에도 많은 노동자 문화단체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90년대 후반부터 침체가 시작되어 현재는 상당수가 사라진 상태이다. 대표적인 문인 단체인 민족문학 작가회의가 70년대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계승하여 87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고, 민미협이 설립된 것도 그 이후이다. 80년대에는 자생적인 문화단체가 산발적으로 저항의 핵을 형성했다면, 민중이나 민족이라는 이름을 걸고 전국단위의 조직이 생겨난 것은 80년대 말에야 가능했으며, 제도/비제도 공간을 아우르면서 본격적으로 집단화된 목소리를 낸 것은 90년대부터였다. 민중미술은 국립현대술관을 비롯하여 제도화된 공간들을 이전시대보다는 더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운동이 아니라 미술로서만 본다면 80년대보다 90년대에 더 전성기를 맞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 간에 말이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80년대는 민중미술의 시대, 90년대는 신세대 미술이라는 식의 시기 구분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이 시기에 두각을 드러낸 신세대 작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불, 최정화 등 몇몇을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90년대 미술이 80년대 말에 배태되었듯이, 이들로부터 비롯된 90년대의 전형적인 신세대 미술은 97년 외환위기로 한국의 자본주의가 위기를 거치며 보다 내향화 되었고, 2000년 이후의 젊은 작가군들의 전범이 되었다. 90년대는 이전 시대의 민중미술 운동처럼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룬 미술보다는 다양한 갈래들이 공존하면서, 세계화와 소비 자본주의의 파고 속에서 부침을 계속하였다. 그렇다면 90년대의 출발이 되었던 80년대 말의 시기를 당시의 몇몇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작가 오윤의 작품 [춘무인 춘무의](1986)(도1)는 이 시기 변혁운동의 열기를 힘찬 칼선이 드러난 판화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중의 힘을 표현하였다. 민족적 형식을 고민하였으며 86년에 타계한 오윤의 작품과는 다른 형식으로 민중미술의 한 축을 형성했던 신학철의 작품 [모내기](1987)(도2)는 농부가 쟁기로 헐리웃 영화, 무기 등 쓰레기를 밀어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순수와 오염이 극명하게 갈리는 보이지 않는 전선이 존재한다.

박불똥의 [코화카염콜병라](1988)(도3)는 [모내기]와는 약간 시점을 달리한다.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된 코카콜라병을 적으로 간주된 상대편을 공격하는 화염병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순수 대 오염이라는 단순한 적대관계가 아니라,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미 분리불가능하게 긴밀한 환경으로 자리잡은 소비자본주의의 힘을 역이용하려는 발상은 기존의 도상을 재활용하는 콜라주 스타일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중 소비문화는 80년대의 3S, 즉 ‘섹스, 스크린, 스포츠’로 분화되면서 독재정권에 아래 순응적 대중을 양산하였다. 80년대 초기의 오윤의 작품 [마케팅-지옥도](1980)(도4)는 이러한 우민화 정책에 동원된 소비문화의 일단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소비 자본주의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극도로 팽창하면서 민중미술 뿐 아니라 미술대학이라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급 예술’과 길항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90년대에 키치는 민중, 또는 대중적 무의식이 담지된 것으로 간주되면서, 서로 다른 미학을 추구하던 작가들의 공통적인 자원이 되었다. 좌파/우파로 나뉘어진 집단의 움직임과는 무관한 제 3의 흐름도 있었다.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80년대와 90년대의 연속과 단절을 감내한 작가군이 그들이다.

류인의 조각 작품 [급행열차-시대의 변](1991)(도5)은 기존의 구상조각이나 민중미술과는 다른 의미에서 시대의 짐을 지고 있는 초인적인 존재를 보여준다. 최승호의 [침묵의 마을](1991)(도6)은 섬세한 시적 감수성이 투사된 시대 해석이 돋보인다. 실존주의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이들 새로운 구상 조각의 흐름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90년대부터이다. 그림에서는 오치균과 최진욱의 작품이 그러했다. 그들 역시 기존의 구상미술은 물론이고, 한국적인 모더니즘이라고 칭해지기도하는 형식주의, 그리고 민중미술과도 다른 새로운 형상성으로 90년대 들어서 새롭게 보여지고 읽혀진 작가이다. 오치균의 [한강](1990)(도7)은 질척한 안료에 실린 서울 풍경으로, 하늘 대부분을 가리고 있는 묵직한 다리 상판이 우울한 정서를 자아낸다. 최진욱의 [1992년 서울의 서쪽](1997-1998)(도8)은 추레한 도시풍경과 만나는 원초적 체험을 표현하였다. 오치균이나 최진욱의 풍경은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모티브를 조형적인 힘을 통해 변형시키며 다른 세계로 펼쳐 보인다.

집단의 흐름과 무관한 이들 작품들에서, 관념주의 및 초월적인 지평으로 세련화(?)되어간 민중미술이나 신세대의 활기로만 기억되는 90년대 시대적 정서의 이면이 읽혀진다. 이 우울하고도 냉랭한 정서는 어디서 온 것일까. 2000년대 중반에 들어 국제 교역액을 비롯한 한국의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 안팍을 넘나든다는 통계가 나와있다. 한국에서 가장 흔한 동네 슈퍼 이름은 ‘현대’ 인 것으로 조사되었고, 세계화에 대한 선호도가 중국 다음으로 높다는 한국은 많은 모순과 희생 속에서도 80-90년대를 거치며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방식의 성장은 반드시 다른 한편에 빈곤의 그늘을 만든다. 성장의 신화 뒤에 남겨진 것은 빈부격차 확대, 여성 및 청년 실업인구 급증, 노동인구의 점차적인 비정규직화 등이다. 그것은 70-80년대의 독재정치 못지않게 삶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한 조사에 의하면 서울의 삶의 질은 89위(2006)로 나타났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자살율 1위라는 통계(2004)는 외형적 성장 이면의 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모두를 한 방향으로 몰아치는 개발시대를 지나면서 대중은 물론, 민중이나 노동자 문화도 점차 퇴폐적 유흥문화에 쩔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3. 근대에서 탈근대로

자연의 주기와 노동주기를 일치시키는 전통적 유기주의organicism는 급속한 근대화로 해체되었다. 공동체가 제공하는 안정성을 사라지게 한 것이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소외를 낳은 것이 모더니티이다. 70-80년대 산업시대의 풍경을 지나 9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사회도 급속한 탈산업 사회의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부가가치가 많이 생산되는 산업이 제조업 에서 정보기술로 이전되고, 세계적 분업 시스템 속에서 생산의 중심이 공동화 된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핸드폰, 인터넷 보급 등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도 90년대이고, 이는 기술 선진국과 시간적 격차도 없이 공동보조를 맞춘 것이다. 아니, 공동보조를 넘어 한국은 정보통신 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정보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산업분야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다. 물질이 아니라 기호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부류의 노동자들이 생겨나고 대중들은 익명적인 코드의 흐름으로 환원된다. 정보를 매개로 한 전면적인 체계화란 상품화의 또다른 변모이다. 노동과 이성에 의해 상품이 계획되고 소비되는 산업시대는 대중들의 무의식과 욕망을 추동하는 마케팅 중심으로 재편된다.

90년대에 소비는 생활의 중심, 또는 삶의 지배적인 방식이 되었다. 소비는 수시로 개인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해체한다. 우리가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90년대 신세대’ 작가란 본격적으로 진입한 대량 소비사회의 핵심을 포착한 작가들이다. 그들은 전시대, 또는 동시대 민중미술의 일부 경향과는 달리, 소비 사회에 대해 외재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은 풍자적이고 비판적일 때 조차도 자신들이 취한 모티브의 내부로부터 미학을 길어낸다. 그래서 그것은 그자체로도 충분히 향유할 만한 내재성을 지니고 있다. 이불의 [수난유감](1990)(도9)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울룩불룩 튀어나온 육질 덩어리 인간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욕망은 기이하면서도 아름답다. 최정화의 [수퍼 플라워](1995)(도10) 역시 거대한 가짜 꽃을 통해 부풀려진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거대한 동물성 꽃은 그의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 모티브인데, 그것은 단지 천박하게 간주되거나 억압되어야 할 차원을 넘어서 그자체로 압도적인 힘을 보유한다. 최정화의 작품에는 플라스틱 싸구려 기성 오브제(도11)들이 아무런 미학적 조치 없이 날것으로 등장하곤 한다. 그는 작가의 선택과 재배치라는 행위를 극대화시킴으로서, 기존의 미학이 쥐어짜듯 만들어내는 억지스러운 아름다움을 벗어난다. 그것은 일상을 아름다움의 재료나 수단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자체, 또는 아름다움 이상으로 격상시킨다.

90년대가 낳은 대표적인 신세대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이불은 90년대 후반까지도 인간의 한계 넘어서는 이질적 존재, 인간이라는 동일자의 타자인 괴물의 여러 변주를 지속적으로 표현하였다. (도12) 이러한 괴물의 모티브가 만화같은 대중문화 및 하위문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순수미술에서는 금기시된 화려한 장식성까지 구비한 작품(도13)으로 미술관 컬렉션의 새로운 차원을 열기도 하였다. 최정화나 이불의 작품 언어는 모더니즘 미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의 작품은 자기반영적이고 초월적인 제스추어에 가득한 이전 시대의 모더니즘 미학과는 차이가 있다. 비평가 서성록 등이 포함된 90년대의 비평가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논쟁적인 화두가 되었다. 추상미술을 비롯한 한국적 모더니즘 작가들이 어떤 초월적 미학을 주장하든 간에, 그들이 대학을 기반으로 하는 제도 미술권을 장악하면서 결코 ‘정신적’이거나 ‘자율적’, 또는 ‘순수함’이라 할 수 없는 집단 이기주의적 미술문화를 낳은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은 이러한 제도권 ‘주류’에 맞서 동시대 미술이 아니라, 모순과 활기로 가득한 동시대 일상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단순히 넘쳐나는 대중문화의 코드를 이것 저것 짜깁기하는 식의 물리적 반응이 아니라, 뒤섞어 기이한 것을 창출하는 화학적 반응이 이후의 신세대 작가들에게 진정 영향력 있는 부분이었다. 비평가 수지 개블릭은 [모더니즘은 실패했는가]에서 모더니즘이 미술이 무엇이 될 수 있고 없는가에 대한 강력한 명령으로 가득차 있는 관념적인 것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절충적이고 모든 형태의 양식, 장르, 환경, 다양성과 상충하는 가치들을 동화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약탈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과도한 선택의 가능성은 실제로 가능한 혁신의 정도를 감소시킨다. 어쨌든 새로운 세대에게 진보나 새로움의 가치는 본격 모더니즘이든, 사이비 모더니즘이든 모더니즘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비평계는 본격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없이 포스트 모던 논쟁으로 휩쓸려 갔다. 민중/모던/포스트모던 등으로 굵게 갈래가 잡히는 대립적 상황이 제도권 미술을 더욱 튼튼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90년대 우리의 미술문화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모던을 초월하지 못한 채 모던에 대립되는 것을 의미’(도날드 커스핏)하게 된 것이다.

4. 대중문화와 제도권 미술문화 사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서구에서 80년대에 시작되었다. 90년대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든 비판하든, 소수의 지식인이 외국의 ‘선진’ 이론을 단순히 수입한다는 차원은 아니었다고 본다. 90년대는 이미 한국도 세계와 동시대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리오타르가 개진한 바 있는 대서사metadiscourse의 종말, 산업주의의 몰락, 혁명의 퇴조, 총체성과 재현에 대한 불신, 규칙이 아닌 배리(背理),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강조같은 테마는 90년대 문화상황을 해석하는데 충분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 리오타르의 논의를 비롯한 포스트 모던 논의는 도래하고 있는 정보사회라는 새로운 생산양식, 즉 정보양식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에는 단선적인 근대적 시간성도 뛰어넘을 수 있는 탄력성이 있어서, 70년대초 까지만 해도 가발이나 쥐가죽 공예품 등을 수출하던 한국이 불과 20-30년만에 정보기술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획득할 정도였다. 어떤 시대에도 대중적인 문화라는 것은 존재했지만, 그것이 미디어 혁명에 의해 새로운 차원으로 증폭된 것은 90년대에 두드러진 특성이다. 90년대부터 시작된, 혁명적이라 할만한 정보양식의 힘은 2000년대에도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는 80년대보다는 2000년대에 더욱 가깝다.

손쉽게 복제되고 유통되는 이미지나 영상은 문화의 대량소비를 가속화할 수 있다. 미디어와 보다 일체화 되고 그 안에서 노는 후속 세대가 생겨났는데, 이러한 세대 중에서 90년대 중반 경에 등장한 작가 이윰을 들 수 있다. 이윰은 조각을 전공했지만, 미술 분야가 아닌 C.F, 영화, 음악 등 타분야의 동세대와 교감하였다. 작품의 주인공은 언제나 자신이지만 자신은 무엇과도 접속할 수 있고, 이러한 접속의 과정에서 더 이상의 이물감이 없는 발랄한 ‘플라스틱 세대’이다. 작품 스타일이나 발표의 장 역시 전방위적인 면모를 보인다. (도14, 15) 다양한 매체와 접속된 자아는 표상이나 실체라기 보다는, 조립이라는 고도의 인공성이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작품의 의미는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존재의 표면에 흩어진다. 그러나 발랄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지식 사회로 재편되기 시작한 90년대의 한국에 몰아친 외환위기는 미디어 문화가 매몰되기 쉬운 엽기 코드와 더불어 우리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낳았다. 98년에 열린 [인간과 인형](김원방 기획) 같은 전시(도16)에는 이상적 인간을 대신하는 유사(類似)인간들이 등장하여 이물감과 세기말 공포의 정서를 자아낸다. 그 시기에는 민중미술 또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안창홍의 작품 [꽃밭에서](1998)(도17)는 죽음의 빛이 감도는 심미적 아름다움 이면에, 이성이 자유보다는 죽음과 더욱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러나는 듯하다.

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부는 늘어났지만, 어둠도 그만큼 깊어진 탓이 아닐까. 생산력의 발전이 고용이 아니라 실업의 압박으로 다가오고, 실업은 공공영역에서의 시민을 퇴출시킨다. 고립된 사영역에서 과도하게 자극받은 개인들이 늘어나면서, 소수의 괴팍한 취향은 대중적인 차원을 획득한다. 본래 상업주의는 ‘자기 이해의 합리적 추구’(허쉬먼)를 통해 시민성을 만들어내고, 전근대시대의 열정, 비이성, 폭력 등이 순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돈 슬레이터는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자유주의 전통은 자기의 이해추구라는 동기를 통한 물질적 성공, 기술적 발전, 개인의 자유와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소비주의, 자유시민사회는 결국 한가지이다. 자유는 시장에 대한 개인주의적 자유와 선택할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가 모든 대중들에게 고무되고 심지어는 강요까지 되었지만 양극화에 의해 가로막히고 욕망은 어둠의 경로를 타고 흐르게 된다. 강고해지는 신자유주의의 질서는 그만큼의 혼란을 낳는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시장체제가 문화의 탈을 쓰고 전영역에서 관철되면서 대중 개인의 정체성은 중심을 잃고 상대화된다.

소비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매개시켜 주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한국에서 소비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시대가 바로 90년대이다. 80년대부터 그러한 증후가 있었지만, 90년대에는 미디어 혁명과 결합하여 소비주의는 양과 질적인 차원에서 도약한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부터 그 10년후의 FTA 협상 까지 신자유주의의 파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우리의 90년대를 다원주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는 다원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돈 슬레이터는 다원주의가 욕망과 이해의 다양성을 조절, 보유, 틀지우는 형식가치(이성, 평등, 자유)를 주장한다고 본다. 그러나 전면적인 시장지배와 이윤추구의 사회는 가치의 기준을 없애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생존과 정복을 위한 전략들만이 존재한다. 자본주의에 이러한 모순이 존재한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며 정치적으로 권위주의적인’(안토니 기든스), 후진적 산업주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수지 개블릭 이 근세기의 위대한 미술이 사회주의 아래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해 볼만하다고 지적한 것에 공감한다.

90년대의 미술은 미술대학의 제도화된 미술문화, 진정한 의미의 형식주의나 ‘예술지상주의’ 조차도 아니었던 그것을 거부하였지만, 민중미술적인 대안이나 전망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대중문화라는 지배적 문화에 매몰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미술문화는 고급예술도 저급예술도 아닌 제 3의 지역에 속해 있었다. 타일러 코웬은 [상업문화 예찬]에서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은 서로를 보완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장비와 재료에 크게 의존하는 자본집약형 장르는 대중문화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고, 비용이 적게 드는 장르, 즉 노동집약형 장르는 고급문화를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대중문화 장르라해도 제작비가 낮아지면 훨씬 다양하고 색다른 소재를 다룰 수 있다.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미디어 혁명은, 어떤 영역에 속해있든지 간에 크게 상관없이 작가적인 구상을 지지해줄 소수의 관객이나 독자, 청중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이는 90년대의 문화적 다양성을 밑받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그것이 문화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해석을 따라, 자유와 이성에 기반한, 진정한 의미의 다원주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소비적 대중은 순응주의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내부에서 새로운 것을 조합한다. 양적으로 밀려든 소비의 세계는 질적인 변모를 거쳐 하나의 색깔이 아닌 여러 겹의 무늬를 가지게 된다. 90년대 초부터 홍대 앞 등지에서 번성한 하위문화subculture가 그 예(도18)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신세대 이후의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도19, 20)에는 이러한 제 3의 지대에서 문화적 자양분을 길어올린 증후들이 발견된다. 이들은 2000년대 이후 화단의 ‘무서운 아이들’로 성장하고, 커진 미술시장 및 다양한 젊은 작가 후원 구조에 힘입어 작품성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다.

(도판 캡션)
(도1) 오윤, [춘무인춘무의], 광목에 고무판, 채색, 75x85cm, 1986년.
(도2) 신학철, [모내기], 캔버스에 유채, 112.1cmx162.2cm, 1987년.
(도3) 박불똥, [코화카염콜병라], 7x35cm, 1988년.
(도4) 오윤, [마케팅-지옥도], 캔버스에 유채, 162x131cm, 1980년.
(도5) 류인, [급행열차-시대의 변](부분), F.R.P, 118x1550x220cm, 1991년.
(도6) 최승호, [침묵의 마을], 동, 130x95x100cm, 1991년.
(도7) 오치균, [한강], 캔버스에 아크릴릭, 122x76.5cm, 1990년.
(도8) 최진욱, [1992년 서울의 서쪽], 캔버스에 아크릴릭, 182x520cm, 1997-1998년.
(도9) 이불,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산책 나온 강아지 새낀 줄 아냐?],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벌인 퍼포먼스, 1990년.
(도10) 최정화, [수퍼플라워], 방수천, 에어 컴프레셔, 센서, 1995년.
(도11) 최정화, [길거리 시장의 왕관], (국제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도록 중에서)
(도12) 이불, [Amarylis], 폴리우레탄, 알루미늄 선, 에나멜 코팅, 210x120x180cm, 1999년.
(도13) 이불, [Plexus], 가죽, 시퀸, 구슬, 95x80x35cm, 1997-98년.
(도14) 이윰, [빨간 블라우스], 1995년.
(도15) 이윰, [living sculpture-IUM], 1994-96년.
(도16) [인간과 인형]전 도록 표지, 1998년.
(도17) 안창홍, [꽃밭에서 2], 천 위에 아크릴릭, 194x130.5cm, 1998년.
(도18) 90년대의 키치문화의 반향이 울려퍼지는, 2000년대 한 인디밴드 콘서트의 안내 카드. (‘호치케스쿤’ 작)
(도19) 정수진, [무제], 캔버스에 유채, 51x51cm, 1998년.
(도20) 홍경택, [연필그림2], 캔버스에 유채, 1999년.

출전 | 한국미술새로보기(오광수 선생 고희 기념논총; 미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