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19세기 중엽에 등장한 사진은 미술의 정체성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특히 회화는 그때까지의 재현적인 문법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회화로서의 또는 예술로서의 자율성을 근간으로 하는, 다양한 해석으로부터 유래한 독자적인 행보를 진전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그 본질을 지향하는 한편,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현대회화는 이후 다양한 방향을 취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재현적인 특성으로 그 첫 행보를 시작한 사진은 조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회화와의 일정정도의 겹침 현상이 불가피했다. 현대미술에서의 회화와 사진 간의 이러한 상호 영향적인 관계는 서로의 범주를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계기로서 작용한다. 이제 단순한 영향의 차원을 넘어 회화가 사진을 그리고 사진이 회화를 모방하는 관계로까지 진전되면서, 이것이 결코 낯설지 않은 보편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동시대는 대중문화에 토대를 둔 이미지의 시대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진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진 그 자체의 자족적인 특수성에 주목하는가 하면, 오브제의 한 형식으로서의 사진의 스틸 이미지를 도입한 회화나 조각, 그리고 사진전사기법을 폭넓게 수용한 판화 등에서 보듯이 사진은 여러 형식으로 기존 장르에 합류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현대미술의 지형을 변화시킨 사실상의 가장 주된 매체이다. 나아가 컴퓨터 프린트 출력물의 형식을 띤 합성 조작된 스틸 이미지의 도입이나, 비디오를 포함한 동영상의 형식에 기초한 여타의 영상물들 역시 대상을 포착하는 최초의 단계인 사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했었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현대미술과 관련하여 기념할 만한 사진 관련전시가 1990년대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 대략을 보면, 1991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170명에 이르는 국내 사진작가들과 40여명의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비평가, 교육자, 디렉터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바 있는 <한국 사진의 수평>(토탈 미술관과 서울 시립 미술관, 그리고 공평아트센터 등 세 곳에서 열림), 1993년 예술의 전당에서 1백여 명의 사진작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1995년 경주 선재 미술관에서 열린 <사진, 오늘의 위상>, 그리고 1996년 <사진, 새로운 시각>(국립현대미술관) 등의 전시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금세기에 들어서는 2001년 개최된 이후 해마다 열리고 있는 <사진 영상 페스티벌>(가나아트센터, 토탈미술관)이 주목된다. 본 전시는 스트레이트 포토와 예술사진, 설치의 한 유형으로서의 사진조형작업, 그리고 영상마저도 하나로 아우르는 등 사진의 고유성과 함께 그 조형예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론 현대미술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국내작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 대략적인 경향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인물사진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작가로는 구본창, 이강우, 김옥선, 그리고 데비한 등이 주목된다. 구본창은 파편화된 신체의 부분 이미지를 일일이 실로 꿰매어 전체를 이룬 흑백사진으로써 동시대의 몸을 중심으로 한 정체성 담론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강우는 자신을 드러내는 전략으로써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신세대의 속성에 착안하여, 이를 일종의 신체풍경의 개념으로 대상화한다. 나아가 작가는 이들 신세대를 아예 그 자체 움직이는 사진으로 정의하기조차 한다.
김옥선은 일상 속의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통해 상품화된 성의 논리에 바탕을 둔 포르노그래피나 관음증적 욕망과는 그 거리가 먼 여성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드러낸다. 이로부터 여성주의적의 관점이나 해석의 일면이 느껴진다. 이는 데비한의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의 머리와 보통 여인의 몸을 결합한 합성사진, 자신의 할머니를 찍은 초상사진, 파나 마늘과 같은 채소류와 여인의 초상을 결합한 초상사진, 그리고 기타 성적 메타포를 암시하고 반영하는 일련의 사진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미의 전형을 문제시하는 한편, 여성의 몸에 대한 시각과 시선의 정치학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비너스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 작가는 서구인의 미적 기준에 지나지 않는 비너스가 어떻게 보편적인 환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으며, 현실을 왜곡시키는가를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황규태와 윤정미의 작업은 일종의 생물학적 사진으로 범주화된다. 황규태는 여러 이질적인 부분 이미지들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결합된 변형 이미지를 통해 유전자 복제와 신체 변형을 경고하는 한편, 픽셀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캡슐 형 알약을 거대한 크기로 확대 인화한 사진에선 추상과 구상 혹은 형상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윤정미는 사진작업 <동물원> 시리즈와 <자연사 박물관> 시리즈를 통해 자연과 이에 대한 인문학적 관계를 다룬다. 여기서 동물원이 동물이 아닌 인간을 위한 사회적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사박물관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자연사박물관은 인공적인 자연과 박제된 자연을 표상하며, 현대인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이처럼 인공적이고 박제된 학습과 확인의 형태로만 주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더불어 작가는 자연사박물관의 인위적인 분류체계가 근대화와의 상관관계 속에 있음을 주목한다. 그러니까 자연에 대한 분류 체계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체계적인 학습을 위한 자료로서, 그 자체 인간이 자연을 효과적으로 대상화하고 도구화하고 지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근대화의 산물로 보고, 이를 비판한 것이다. 이와 함께 자연사박물관의 배경 그림에서의 키치적 정체성(출처 불명의 이국적인 유사낙원 혹은 거짓 자연을 함축한)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김아타와 천경우는 존재론적 사진으로 범주화할만한 경향성을 보여준다. 나체의 부처를 소재로 하여 선(禪)적이고 성(性)적인 의미를 중첩시킨 김아타의 사진은 그 주제의식이 존재의 자기정체성 문제와 통한다. 이를테면 <뮤지엄 프로젝트, 니르바나> 연작은 성(性)을 통해서 성(聖)에 이를 수 있다는 탄트라의 교리를 실현한 것이다. 성(性)과 성(聖)을 결합시키는 것에서 작가의 종교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일면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작가는 정통적인 종교가 성(性)과 속(俗)을 동일시하고, 이를 억압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작가에게서의 성(性)은 유사 죽음과 동격인 것이며, 그 자체 금기와 터부의 경계를 넘어 존재의 연속성을 회복시켜주는 매개체인 셈이다. 이외에도 작가는 <이 속에 너 있다>에서 여러 개인들의 얼굴이 하나로 중첩된 초상사진을 보여준다. 그 얼굴들 속에서 개인은 자기정체성을 잃고,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다중적인 인격체로서 재차 태어난다. 이 일련의 사진은 주체가 실은 타자와의 영향관계로부터 축조된 인식론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즉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속에 내가 있음을 주지시킨다.
사진이 내재하고 있는 미덕으로는 피사체에 대한 증명성과 지표성을 들 수 있다. 흔들릴 수 없는 사실성과 현장성을 담보해주는 사진의 이러한 미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천경우의 인물초상사진이다. 그의 초상사진은 도무지 명료하지가 않다. 그러나 실체가 모호한 그의 사진들은 즉물적인 사진이 결여하고 있는 모델의 심리적인 내면을 투시한 듯 심층적이다. 작가는 빛에의 노출 시간을 수 시간씩 늘어트려 이런 독특한 분위기를 획득한다. 표면적인 리얼리티 대신에 심층적인 알레고리를 획득한 작가의 초상사진은 여러 이질적인 지층이 중첩된 삶의 불투명성을 닮아있다.
한편, 홍성도, 김영진, 권오상, 고명근, 정재규 등의 작업은 일종의 콜라주 사진 또는 사진 콜라주로 범주화할 수 있으며, 여타의 경우에 비해 조형성에 대한 이해와 임의적인 조작과정이 상대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작용되는 편이다. 이들 중 홍성도는 스캐닝 된 이미지로써 복제로 현상하는 동시대의 이미지의 존재방식에 대해 반응한다. 이로부터는 일종의 양가성에의 인식이 발견되는데, 특히 <키스> 연작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키스하는 장면이 우호적인 장면으로도,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으로도 읽혀진다. 사태의 이런 모호한 설정은 양가성에 대한 작가의 적극적인 해석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고, 사실을 중성화하는 기계적인 프로세스 탓일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작가는 스테인리스스틸 판에 인화한 등신대 크기의 인체 사진으로써 인간의 내적 욕망과 갈등을 표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전체 이미지 속에 마치 이물질처럼 부분 이미지가 콜라주 된 일련의 풍경 사진을 통해서는 실제와 재생된 이미지 사이의 차이를 드러낸다. 더불어 기억의 불완전한 재생력과 함께 재현의 불가능성을 주지시킨다.
김영진 역시 신체와 오브제를 소재로 한 일련의 디지털프린트 작업으로써 재현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사람의 머리를 무슨 전개도인 양 평면 위에다가 펼쳐서 조합한 일련의 사진은 무수한 방향에서의 시점을 하나의 평면 위에다 재현코자 한 입체파의 형식실험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시점은 시간과의 상관관계 속에 있다. 즉 대상의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시점을 이동해야 하는데, 이렇게 이동된 시점은 그대로 시간의 기록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주체가 살아온 삶의 과정으로서의 존재론적 시간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한 주체가 시간 속으로 함몰돼 압축되거나, 이와는 반대로 낱낱의 시간의 조각들로 해체되고 조합된 낯설고 생경한 결과물이 느껴질 따름이다. 그 이면에는 재현의 논리와 함께 일말의 그로테스크가 느껴진다. 허나 그것이 의식적인 왜곡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재현의 논리를 충실히 따른데 대한 결과물이란 점에서 아이러닉하다. 실상 재현이란 그 자체 진작부터 일종의 환영적인 환경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작가의 사진에서는 다만 그 재현의 논리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극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작가의 사진은 재현의 또 다른 용법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조각조각 나눠진 사진을 이어 붙여 등신대 크기의 인체나 사물을 재현한 권오상의 작업은 사진 한 장 한 장의 리얼리티가 모여 전체를 이루는 일종의 데오도란트 타입의 사진을 예시해준다. 이런 프로세스 상의 특질로 인해 그의 작업은 흔히 조각적 사진 또는 사진적 조각이란 말로 형용되며, 이는 곧 조각과 사진의 범주와 방법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마치 환조에서처럼 3차원적인 입체감과 함께 질량을 가진 덩어리로써 일정한 공간을 점유할 뿐만 아니라, 사진의 표면적인 세부마저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조각과 사진과의 경계를 허물며, 실제를 흉내낸 유사 실제를 떠올리게 하며, 그 조작적 프로세스를 공공연하게 노출시킴으로써 특유의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부분이 확대 축소 복제 왜곡되는 제반현상을 극대화할 뿐 아니라, 실제와 재현, 실제와 이미지, 실제와 허구로 현상하는 존재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고명근은 투명한 필름에 인화된 사진 조각들을 조합하여 가상의 건축물이나 구조물을 구축해낸, 일종의 미니어처를 제안한다. 이는 일견 실제를 재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작가의 공상 속에서 재편집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와 가상이 교묘하게 결합하여 그 자체 엄연한 현실처럼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정재규의 사진은 사진의 일반적인 프로세스가 끝나는 지점에서서 시작된다. 즉 도시나 풍경을 찍은 사진을 길게 오려 내어 이를 재차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판 위에 붙이기도 하고, 그 긴 띠 조각을 날실과 씨실 삼아 천처럼 직조하기도 하고, 이렇게 조성된 입체 조형물을 설치하거나 한다. 이렇게 생겨난 이미지는 최초의 사진의 기록성과 재현성 대신에 기하학적이고 옵아트적인 착시효과와 함께, 그 자체 순수 조형적인 매체로서의 오브제를 상기시킨다.
금중기와 정은정의 작업은 세팅을 한 연후에 이를 사진으로 옮기는 식의 일종의 연출사진을 보여준다. 먼저, 금중기는 일련의 사진작업들에서 사물들을 병치시킨다. 가방과 목마와 양철로 만든 물뿌리개 등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 자동차 미니어처와 소화기와 지구본 등의 인공물들, 대중적인 애니메이션에서 불려나온 듯한 로봇과 캐릭터 인형들, 마치 박물학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 미니어처들, 곤충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방독면, 나무인형과 두개골, 여기에다 먹다 버린 사과 등속의 유기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질적인 사물들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배치된다. 그 사물들이 얼핏 서로 무관하거나 이질적인 것인 양 보이기도 하지만, 초현실주의 시처럼 우연하게 결합한 그 사물들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처럼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사물들과, 그 사물들이 우연하게 의미를 생성하는 원리 혹은 현상을 작가는 느슨한 충돌이라고 부른다. 이 논리에 의거한 작가의 사유는 말하자면 사물 자체보다는 사물들이 놓여지는 방식 즉 맥락화의 방식과, 사물과 사물간의 사이로부터 의미가 생성되는 지점이나 그 순간을 향해 있다. 그 사이, 그 지점으로부터 앤틱적인 감수성과 팬시적인 감수성이 충돌하고, 자연에 속한 것과 인공의 산물이 부닥친다. 이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우연하게 결합된 이면에서는 일종의 신화적이고 문명사적인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이는 그대로 상호간 영향관계에 바탕을 둔 문명의 생리를 드러낸다. 더불어 의미가 생성되고 진화해가는 우연하고 유기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정은정의 연출사진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하나같이 도살된 것들이다. 몸통으로부터 분리된 양과 젖소의 머리, 그리고 털이 벗겨진 채 알몸을 드러낸 돼지와 거위 등이다. 그러니까 동물들은 바니타스(인생무상) 또는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경구를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죽음의 메타포로서 도입된 것이다. 그러나 이 도살된 주검의 이미지들로부터 죽음 고유의 암울한 비전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목가적인 초원의 배경 화면이 주검의 이미지를 완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거실이나 욕조와 같은 실내 풍경을 배경으로 한 돼지와 거위의 초상에선 주검 이미지는커녕 의인화된 누드가 연상될 따름이다. 이로써 광고 이미지에 그 맥이 닿아 있는 독특한 미적 감수성을, 그로테스크와 컬트에 바탕을 둔 인지 부조화 현상(상식을 넘어서는 파격과 충격 요법)을 느끼게 한다.
이와 함께 이상현, 조습, 니키리의 작업은 사진 속에 작가 자신이 직접 등장해서 서사를 리드해나가는 식의, 자기연출사진을 보여준다. 먼저, 이상현의 <자아이탈적 명상>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자아이탈에 대해서 명상 중인 작가 자신의 초상사진을 보여주며, 이는 그대로 자기 정체성 물음에 이어진다. 여기서 자아이탈은 진정한 나에 대한, 그 실체에 대한 회의로서 나타나고, 이는 작가의 작업에서 여장한 남자의 형태를 띠게 된다. 나는 남자이면서 여자이기도 하고, 여자이면서 남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를 넘나드는 나는 누구인가. 남자와 여자란 한낱 사회, 제도, 관습이 개인에게 요구해오는 정체성의 이름, 그 실체가 없는 이름(허명)일 뿐이 아닌가. 작가의 초상사진은 이러한 자기 외부로부터 호명된 정체성의 요구로부터 떠나있을 때 비로소 남자도 여자도 아닌 진정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조습은 스스로를 ‘명랑 시각이미지 생산자’로 자처하는 한편 자신을 대상화한 포토몽타주로써 한국사회의 비뚤어진 세태를 풍자한다. 광신적인 종교와 억압적인 군사문화 그리고 가부장적 체제 등 사회에 만연한 권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현대인의 상식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을 비판한다는 일면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한편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이는 풍자 즉 현실의 희화화를 통해 현실을 비판한다는 사실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 자신마저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아버리자 비판과 코미디의 경계가 불투명해진다. 일례로서 일종의 가상 종교인 ‘명랑교’를 테마로 한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자신을 명랑교의 교주로, 전도사로, 그리고 신자로서 등장시킨다. 이 사진들에서 작가는 특정 종교의 전도사 이상의 열성분자이거나 광신자를 연상시킨다. 화면 속의 피켓과 메가폰은 박해를 자처한 전도사의 선량한 의지를 데모자의 발악 속에 희석시킨다. 이제 종교는 도심 속에서 무심하게 지나치는 행인들을 향해 코피를 쏟을 만큼 열성적으로 바락바락 소리를 내지르는 데모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된 것일까. 종교와 데모, 전도사와 맹렬 분자를 나누는 경계가 불투명해진다. 게다가 명랑교라니. 작가의 작업이 유발하는 웃음은 현실을 희화화하는 통렬함에서보다는, 터무니없는 상황의 설정을 통해 현대판 키치로 전락한 종교와 그 맹신을 목격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가하면 니키 리(이승희)는 펑크족 프로젝트, 레즈비안 프로젝트, 관광객 프로젝트, 드랙퀸 프로젝트, 히스페닉 프로젝트, 여피족 프로젝트 등 일련의 가상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하위문화의 다양한 삶의 지층 속에다가 자기를 대입시킨다. 이 프로젝트 작업에서 작가는 다양한 맥락 속에 위치한 다른 자아(주체)들에 주목하면서, 자아(주체)란 실상 그가 매순간 처해있는 상황과 문맥 속에서 매번 새로이 태어나고 교정되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이렇듯 중층화된 다중자아의 인식은 개인에게 고정된 실체와 정체를 부여하여, 그를 통제하려는 제도의 욕망을 위반하는 노매디즘(유목주의)의 정치적 실천 논리와 통한다.
한편, 동시대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에로의 시대환경이 변화하는 과도기에 처해 있으며, 모든 가치와 체제가 디지털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는 혼돈의 와중에 처해있다. 기존의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서로 부닥치는 이런 미증유의 환경과 더불어 디지털 포토는 모든 결정적인 이미지를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비결정적인 이미지와 의미로 변질시켜 놓는 강력한 매체로서 부상하고 있다.
강홍구와 김준은 디지털 프로세스를 작업에 차용하여 디지털 포토의 매체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반영한다. 강홍구의 군락을 이룬, 난(蘭)처럼 보이는 흑백사진은 그러나 실상 작업실 주변 시궁창에 핀 흔한 풀들을 찍어 합성한 것이다. 산(山)처럼 보이는 흑백사진 역시 실은 그저 모래더미를 찍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강시민공원> 연작에서는 인화하는 과정에서 좌우가 뒤바뀐 똑같은 사진을 다른 사진에 편집하는 방법으로써 현실적인 풍경을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바꿔놓는다. 이와 함께 일종의 자기복제를 시도한 사진도 있다. 예컨대 타란티노 감독의‘저수지의 개들’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인 다섯 건달들의 얼굴을 하나같이 작가 자신의 얼굴로 대체한다거나, 특히 서로 죽고 죽이는 캐릭터들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대체한 작품에서는 이질감이나 생경함마저 느껴진다. 인왕산의 정기와 위용을 배경삼아 서 있는 <미미네 집>(사실은 건물 옥상의 개집을 찍은)이나, 기암절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르는 <수련자>(사실은 담벼락에 붙어있는 플라스틱 인형) 등 그의 사진 속 가짜 이미지는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미지 또한 한갓 소비재임을 드러내며, 그렇게 소비되는 맥락에 따라 그 의미와 기능이 재정의됨을 드러낸다.
그런가하면 온몸에 가득 새겨진 문신을 소재로 한 김준의 디지털프린트는 일종의 사회화된 문신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신은 문신 그 자체로서보다는 우리 모두의 고정되고 결정된 의식, 다시 말해서 삶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은 의식을 상징한다. 그 의식은 아디다스, 스타벅스, 구찌, 삼성과 같은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기호로서, 붉은 악마와 같은 사회적 기호나 개인의 이념 또는 신념으로서,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팬 동우회에 반영된 취향의 한 형태로서 현상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어떤 신념, 어떤 기호, 어떤 취향에 길들여진 저마다의 의식화된 문신을 새겨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들로써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의식이 그대로 이미 하나의 문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몸 자체, 의식 자체가 그대로 사회적 문신이고, 사회화된 문신인 셈이다.
그리고 배준성과 안창홍의 작업은 사진과 회화가 결합된 회화적 사진을 예시해준다.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유명 초상화를 패러디하는 배준성의 작업은 일종의 이중그림을 보여준다. 즉 명화에 그려진 상황 그대로를 재연한 연후에 이를 사진으로 찍는데, 이때 그 등장인물을 가상의 모델로서 대체한다. 그리고 그 사진 위에 비닐 그림을 중첩시키기도 하고, 그 자체 이중화면이나 다중화면이 가능한 랜티귤러로써 그 중첩된 이미지를 구현하거나 한다. 여기서 모델은 일종의 움직이는 정물의 배역을 연기하게 된다. 그러니까 모델이 사진에 전개된 상황 속에 임의적으로 편입돼 있으며, 이때 옷에 해당하는 비닐 그림이나 랜티귤러의 시점 여하에 따라서 착의와 나체를 넘나드는 식으로 가변적인 역할을 한다. 이렇듯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두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초상화의 전형화 된 틀과 그 아우라를 흉내내는 한편, 이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안창홍이 사진 위에 그린 <기념촬영, 봄날은 간다> 연작에서의 봄날은 삶을 통해서는 거머쥘 수 없는 일종의 비현실적 시간이며, 욕망이 유예된 불구의 시절이다. 그 봄날은 제대로 꽃피워 볼 기회마저 얻지 못한 채 일그러져버린 청춘과 함께 현란하고 감각적인 시간의 표면 위를 흘러 지나간다. 그렇게 배반당한 시간의 표면 위로 노랑나비 떼가 날아오르면서 기억을 망각 속으로, 존재를 부재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와 함께 작가는 익명의 사람들이 찍힌 명함판 크기의 네거티브 필름을 이용하여 일종의 명상록을 만든다. 이 필름을 확대 인화한 후, 그 위에 가필하는 방법으로써 눈을 감겨 영혼을 가두고, 입술을 붉게 칠해 생기를 불어넣는다. 작가의 그림에서는 이렇듯 죽은 이미지와 생기가 만나는 아이러니와 이율배반이 자연스럽다. 이들 목덜미나 이마 부위에서 나풀거리는 나비는 그들이 다름 아닌 사자(死者)임을, 최소한 잊혀진 존재임을 주지시킨다. 이 일련의 사진작업에서 작가는 사진의 미학을 인식론이 아닌 존재론에서 찾는다. 매체적 특수성과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보다는 한 장의 사진 속에 들어있는 정서적인 환기력에서 찾는다. 이는 죽음과 내통하고, 부재와 통한다. 여기서 죽음은 죽음 자체보다는 삶을 증명하며, 부재 또한 부재 자체보다는 존재를 증명한다.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매개로 하여 현실을 과거 속으로 밀어 넣고, 노란 필터를 매개로 하여 이를 영원히 박제화한 것이다.
이외에도 정연두의 연출사진, 김상길의 사회학적 사진, 그리고 이정진의 미학적 사진이 주목된다. 정연두는 일종의 역할극에 바탕을 둔 일련의 사진들과 가상연출사진으로써 이미지의 사회학적 의미를 묻는 한편, 현실과 가상현실과의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김상길은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간접광고 이미지를 일상 속에서 그대로 구현해낸 연출된 사진 찍기로써 사진에 재현된 이데올로기에 주목한다. 이와 함께 각종 인터넷 동우회를 소재로 한 집단초상사진에서는 일종의 가상현실 커뮤니티로 나타난 신종 문화 풍속도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이정진의 사진은 감광유제를 바른 한지에다 인화한 사진으로써 마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질감과 함께, 사진 고유의 즉물적 재현성과는 다른 아우라를 견인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사진의 역사는 불과 150여 년에 지나지 않지만, 그 동안 사진은 삶의 질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진 자체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사진이 주로 회화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변화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했는데 반해, 이후에는 영화와 TV, 비디오와 컴퓨터, 제록스와 프린트, 스캐너와 캠코더 등의 연이어 등장한 각종 신종 매체들이 사진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변화는 계속 될 것이며, 그 첨단의 매체들이 초래할 변화된 사진의 존재와 위상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껏 삶의 리얼리티에 천착한 스트레이트 포토나 다큐멘터리 사진, 사진의 본질이나 그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한 예술사진과 관련하여 여러 의미 있는 담론들이 생산되었다. 앞으로 사진과 관련한 논의는 앞선 담론들에 근거하여 예술사진의 의미를 재고하거나, 사진적 진실을 반성하는 것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각종 첨단의 매체들이 초래할 변화에 맞닥트려 예술사진의 위상을 지켜내면서, 이를 어떻게 재정의해나갈 것인지가 관건이다.
고충환
#3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