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호두 개관기념판화전
판화, 4인 4색
석판화와 금박 템페라 작품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표현을 추구해온 구자현, 일본 모노하(物派) 태생에 중심적 역할을 한 이우환, 내적 비전을 원동력으로 해서 판타지의 세계를 열어 보인 쿠사마 야요이, 순수추상회화의 형식과 감각적 현실의 질감이 중첩된 회화를 제안하고 있는 타츠노 토에코, 이렇게 4명의 작가가 판화작품을 매개로 해서 함께 전시를 가진다. 하나같이 개성이 강한 작가인 만큼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판화의 경계를 넘어 그 표현의 다양한 진폭을 느끼는 기회가 될 듯싶다.
구자현의 근작판화는 군더더기가 없는 심플한 화면구성으로 인해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킨다. 화면 전체를 거의 가득 채우고 있는 옆으로 긴 타원형의 색면들이 미세하게 어긋나면서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된다. 그러니까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의 단색조의 색면들과, 이 색면들이 중첩되면서 그 가장자리에 미세하게 색띠를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색띠들이 일종의 일루전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데, 비록 낱낱의 색면 자체는 평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색면들이 중첩됨으로 인해 가장자리의 색띠가 마치 그림자와도 같은 입체 효과를 평면에 부여해주게 된다. 단지 평면과 평면을 중첩시키는 과정을 통해 입체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이 일련의 작품들은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면서 그 모호한 경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최종적으로 찍혀진 색면이 흰색인 경우에는 그 실체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욱 암시적이게 된다. 그러니까 흰색의 종이 위에 찍힌 흰색 이미지는 그 밑에 중첩된 다른 색면들의 가장자리 선에 의해 겨우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에서의 주요한 특징은 이처럼 평면이나 평면성을 환기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이 회화의 원리를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성질 대신에 순수한 형식요소에서 찾은 모더니즘의 환원주의를 연상케 하며, 특히 그 최소한의 요소를 평면이나 평면성으로 본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조각으로 치자면 도날드 주드의 최소한의 구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평면성의 환기로 인해 작가는 일종의 미니멀리즘으로 범주화할만한 양식적 특질을 자기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작가의 타블로 작품들과도 일정정도 내통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평면성이야말로 물성과 함께 작가의 타블로와 판화, 이 모두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것이다.
작가의 근작판화는 이처럼 평면이면서도 그 이면에서 입체를 암시해준다. 그리고 세로 2m 가로 1.5m에 이르는 이 일련의 대형판화들은 소형판화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판화개념의 틀을 깨는 데에 기여하는 바도 있다. 타원형의 원 형상을 3,4도 정도의 색도를 올려 겹쳐 찍은 이 판화들은 석판화 잉크로 찍은 실크스크린 판법이 특징이다. 일종의 혼용기법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석판 잉크 특유의 강한 점도로 인해서 잉크의 두께가 만져질 정도로 강한 물성이 느껴진다. 전면 균질 회화를 상기시키는 심플한 화면의 이면에는 이처럼 점도가 높은 잉크를 일정 두께를 유지하며 고르게 찍어내는 데에 따른 공정상의 난이도에 의해 뒷받침된다. 실크스크린 판화는 공판화의 일종으로서 판에서의 막힌 부분과 뚫린 부분이 일정 비율로 어우러질 때 효과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들에서처럼 뚫린 부분(이미지에 해당하는 부분)이 거의 화면의 전체를 차지하거나 그 폭이 사실상 스퀴지의 전체 길이와 엇비슷한 경우라면 균일한 화면을 찍어내기가 결코 쉽지가 않다. 게다가 점성이 높은 석판화 잉크라면 더더욱 그렇다.
구자현의 근작판화는 이런 난제를 기술력으로써 극복한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대형판화를 통해서 판화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을 재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를 통해 미니멀리즘과 색면화파로 나타난 모더니즘의 형식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화면에다 점 하나를 찍으면 지금까지 무미건조했던 화면이 갑자기 분주해진다. 점이 다른 점을 부르는데, 화면이 한쪽으로 쏠린 듯해서 다른 점을 찍어 그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다. 때로 그 균형이 지나칠 때 화면이 질식할 듯해서, 또 다른 점을 찍어 그 균형을 깨기도 한다. 이렇게 화면은 하나의 점이 불러들인 조화와 부조화, 균형과 불균형, 질서와 무질서가 길항하고 부침하는 생성의 장이며 생명의 장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질서와 무질서가 서로 스며들어 어우러질 때 비로소 화면과 대면하고 있는 주체는 평안을 느끼고 자연을 느끼고 생명을 느끼고 존재를 느낀다. 하나의 점이 화면을 미몽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 것이며, 익명의 장으로부터 존재의 장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이것이 이우환의 1969년 논문 <사물에서 존재에로>에서의 논지가 아닐까. 즉 한갓 돌멩이가 존재로 거듭나는 지점이나, 익명의 화면이 존재의 장으로 전이되는 계기에 작가의 관심이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에의 인식에 힘입어 우리는 화면 속에 일종의 보이지 않는 역학이나 자장과 같은, 그 자체 창조의 비밀을 엿보게 해주는, 존재를 생성시키는 원리가 작용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우환은 곽인식과 함께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엽 일본 모노하(物派)의 태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모노하는 산업용 재료나 자연 재료를 소재로 하여,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사물의 고유성을 드러나게 한다. 그 재구성이란 것이 작가의 적극적인 간섭행위이기보다는 작가의 개입이 아니라면 쉽게 간과했었을 사물의 고유성과 존재성을 유도하기 위한 매개적 행위에 머문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최소한의 행위로써 사물과 사물이 어떤 관계 하에 놓여있는지 혹은 사물과 주체가 어떤 관계의 자장 속에 들어있는지를 주목케 한다. 소재 자체의 성질에 천착한 오브제의 미학으로부터 소재가 놓여지는 방식 즉 배열과 배치에 주목하는 관계의 미학에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로부터 유래한 핵심개념이 만남과 조응 그리고 관계이다. 캔버스를 예로 들자면 하나의 점과 다른 점이, 하나의 점과 화면의 여백이, 화면과 주체가 모두 이러한 만남과 조응 그리고 관계의 자장 속에 놓여있게 된다. 나무와 돌이 만나고, 돌이 철판과 어우러진다. 존재하는 것치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 자체가 이미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잉태된 개념인 것이다. 이로써 화면은 세계를 모본(母本)으로 한 재현의 장이기보다는 강도와 밀도 그리고 중력과 같은 역학이나 긴장감(역학이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심리적 현상인)이 작용하는 장, 생성의 장, 생명의 장이 된다. 관계의 미학이나 비가시적인 공간역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1970년대 국내의 단색조 회화 경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우환의 석판화는 기본적으로 타블로 작업에서의 인식론에 의해 지지된다. 즉 작업의 프로세스를 장악하려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를 강조하기보다는 그 프로세스가 저절로 드러나 보이도록 돕는 조력자로서의 주체를 보여준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물과 기름의 반발작용이나, 해먹과 용제가 조응하는 미세얼룩효과, 그리고 회화적 질감 그대로를 전사해주는 석판화 고유의 현상이 오롯이 드러나게 된다.
이우환은 ‘최소한의 개입으로써 최대한의 세계와 관계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적게 개입할수록 오히려 회화적 질감이나 판화 고유의 현상은 그만큼 더 잘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텅 빈 화면이 관객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행위를 유도한다. 관객의 의식 속에서 화면이 완성되게끔 하려는 작가의 이러한 태도나 방식은 의미가 최종적으로 완결되는 지점을 저자가 아닌 독자로 본 ‘저자의 죽음’논의와도 통하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와 화면이 만나는 그 지점은 고스란히 관객과 화면이 조응하는 또 다른 관계의 자장 속으로 빨려든다.
쿠사마 야요이의 그림을 보면 예술은 정신적인 질병이라는 정의가 떠오른다. 그것도 즐거운 질병이라는. 그녀의 그림은 기꺼이 즐거운 환각 속에 빠져들게 한다. 실제로 작가는 1977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쿄에 소재한 한 정신병원에 거주하면서 쿠사마 스튜디오를 열어 창작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작가의 왕성한 창작활동은 정신병이 결코 비정상적인 병적 징후가 아님을 말해준다. 그러기는커녕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지극히 정상적인 인성의 한 요소로서 여겨진다.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그리고 더욱이 가치론적인 것과 같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현상에 대해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행은 다만 제도의 전횡에 지나지 않는다. 결여와 결핍, 잉여와 여분을 참아내지 못하는 권력의 무정한 폭력에 다름 아니다.
나아가 프로이드의 욕망이나 질 들뢰즈의 정신분열증 분석 개념은 오히려 비정상성이야말로 예술의 원동력이나 다름없음을 증언해준다. 즉 프로이드에 의하면 개별주체는 욕망을 실현코자 하고 제도는 그 욕망을 억압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 관계는 필연적으로 반목적일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예술가에게 있어서 이러한 반목행위는 의식적인 층위에서 적극적으로 수행된다고 본다. 욕망을 어떻게 사용하고 실천하는가에 따라서 예술의 정체성이나 그 질적 수준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런가하면 들뢰즈는 정신분열증 분석 개념을 국가와 제도와 권력의 편집증 개념에다 대질시킨다. 이는 차이의 논리 대 정체성의 논리의 등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식의 차이의 인식이 특정의 정체성을 강제하는 논리와 부닥치게 되고, 바람을 타고 널리 차이를 퍼트리는 민들레 홀씨의 논리(유목주의의 논리)와 천편일률적인 붕어빵의 논리가 충돌하는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의 그림은 이러한 욕망과 차이의 실천논리를 바탕으로 해서 즐거운 정신병과 유쾌한 일탈 그리고 건강한 도발을 감행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실크스크린으로 제작된 일련의 판화들에는 호박, 과일바구니, 나비, 맨드라미, 모자, 구두 등 그녀가 일상이나 추억으로부터 불러낸 소재들이 단독 초상화처럼 그려져 있다. 펄이나 반짝이 등의 자기발광성 성분을 함유한 안료로써 반짝거리는 표면질감이 현란한 원색과 어우러져서 한갓 일상적이었던 소재가 화려하고 장식적인 성격을 덧입고 거듭나게 된다. 화면을 온통 뒤덮고 있는 그물 모양의 망구조가 이 소재들을 하나로 포섭해 들이는가 하면, 존재의 씨앗을 떠올리게 하는 온갖 크고 작은 땡땡이 문양이 들뜬 기분마저 자아낸다. 마치 요술공주 밍키의 등장으로 진부했던 일상이 일순간 동화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탈바꿈된 것 같은 축제의 장을 펼쳐보이는가 하면, 엘리스와 더불어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이상한 나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무의식적 자아랄 수 있는 밍키나 엘리스의 손에 이끌려 축제의 향연 속으로 초대받은 느낌이다. 사랑의 메신저인 그녀답게 모두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순간의 희열로써 들떠있는 세계, 그 광휘의 은총으로써 감싸인 세계를 열어 보인 것이다.
타츠노 토에코의 그림(타블로와 판화)에는 그 의미나 실체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형상들이 등장한다. 책장이나 선반 등의 가구의 일정 부분을 연상시키는 사각 형태들이나 볼륨감이 있는 둥그스름한 형태들이다. 이 형태들이 어우러져 반복 중첩되기도 하고, 형태와 형태 그리고 부분과 전체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형태들은 일정한 패턴으로 변주되면서 화면을 가득 메우기도 하고, 한쪽에 쏠려서 나머지 대부분의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여백과 대비되기도 한다. 형태들에는 명암마저 더해져 실제를 연상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태들은 현실로부터 채집된 것들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불러 들인 순수추상의 소산이다. 엄밀하게는 순수추상이라기보다는 현실과 추상과의 사이쯤에 위치해있다. 현실을 닮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재현한 것은 아닌, 경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재현의 층위와 추상의 층위와의 사이에 대한 인식이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종래의 추상화에서는 중력도 인력도 존재하지 않지만, 이와는 다르게 나의 추상화에서는 현실세계의 중력이나 인력을 닮은 도식이 실현되고 있다’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순수추상회화는 회화의 자족적인 존재성이나 그 내재적 원리에 의해 견인되는 것으로서, 현실이나 이를 모방한 재현의 논리와는 상관이 없는, 전혀 별개의 순수한 영역이나 범주로 보는 것이 모더니즘의 관념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모더니즘에 의해 단절된 회화의 장과 현실의 장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모색한다. 이렇게 복원된 그림은 현실을 모본으로 한 재현적인 그림과는 전혀 다른 작가만의 독자적인 형식을 얻게 된다. 현실 속에서처럼 중력의 지배를 받는 형태들, 현실의 관계의 자장 속에 들어와 있는 형태들, 일종의 유사질서의식을 흉내 낸 형태들, 그 감각적 질감을 닮은 형태들을 실현한 것이다. 그 형태들은 추상과 현실, 추상과 재현 사이의 미지의 스펙트럼에 주목하게 하는데, 기실 이러한 인식은 표현의지(주관의 층위에 속한)와 재현의지(객관의 층위에 속한)와의 상호내포적인 관계에 대한 곰브리치의 회화 관념을 떠올리게 하며, 그 한 버전처럼 읽힌다.
이처럼 작가는 추상적인 형태에 명암을 부여해줌으로써 볼륨감(양감)을 획득하는가 하면, 형태와 형태간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는 회화적 평면에다 공간감을 더한다. 평면(평면이나 평면성은 모더니즘적 환원주의의 핵심개념 중 하나이다)으로서의 회화적 장을 공간적 장으로, 그리고 추상적 장을 감각적 현실의 장으로까지 확장한 것이다. 이와 함께 파스텔 톤의 색채가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여성적인 미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며, 특히 모노톤의 단색조 화면으로 나타난 판화 작품은 타블로 작품들에 비해서 금욕적이고 관념적인 인상이나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일련의 과정 즉 추상화에다 재현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성질을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일종의 유사현실(성) 혹은 의사현실(성)을 실현한다.